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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고산동(신촌)에 자리한 헌책방 [숨어있는 책]은 책을 찾는 시간이 적잖이 드는 곳입니다. 책이 그렇게 많이 들어온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새로 사오는 책을 갈무리하여 제자리에 틈틈이 꽂아놓기 때문에 어제 왔다 갔어도 자신이 본 책장엔 새로운 책이 한두 권쯤 꽂혀 있기 마련이거든요. 찻잔과 꽃그릇이 있는 책상 위와 그 뒤 걸상 위엔 갈무리를 어서 끝내고 제자리로 가고파 기다리는 책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나온 사진책이 겹겹이 쌓인 곳에서 <(꿈 바깥 세상)OUTSIDE THE DREAM(1991)>이란 사진책을 봅니다. "(미국에서 아이들 가난이란)CHILD POVERTY IN AMERICA"라 하여 미국이란 나라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 겪는 가난을 사진으로 담은 <꿈 바깥 세상>이라고 옮길 수 있는 사진책이죠.

사진을 찍은 스테판 세임즈(STEPHEN SHAMES) 씨는 사진 한 장마다 미국 아이들 현실이 어떠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총기 사고로 하루에 아이들 열이 죽고 서른이 다친다든지, 열네 살 짜리 아이가 고단한 노동으로 제 밥벌이를 하면서 집이 없어서 다른 집 문앞에서 잔다든지, 하루에 아이들 몇이 집(가정)을 잃는다든지, 하루에 몇 사람이 학교에서 쫓겨난다든지, 아이들 이백 만은 날마다 부모 없이 집에 혼자 있다든지, 날마다 죽는 아기 105명은 첫 돌이 되기 앞서 죽는다든지, 날마다 수많은 여성들이 폭력에 시달려 집에서 내빼거나 아이와 함께 내뺀다든지 급식을 못 받고 굶는 아이들이 몇이라든지...

집안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 남편이 아내를 두드려패며 집밖으로 들어서 내팽개치는 모습, 빗자루를 들고 험악한 낯빛을 한 어머니가 자식을 내리치려는 모습, 마약을 몰래 사고팔며 주사를 맞는 모습, 뒷간도 없고 물도 안 나오는 작은 방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 총으로 서로 장난하는 모습...

"Every day more than 12 million children wake up poor."

"적어도 천이백 만이나 되는 아이들이 가난 속에서 아침을 맞는다"는 얘기는 우리가 우러르는 미국이란 나라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들 이야기이기도 하고 북녘땅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를 생각하고 떠올리며 `강대국, 잘 사는 나라'라 하지만 그 안을 깊숙히 파고들면 가난한 이와 부자인 이 차이가 너무도 크고 차별과 폭력이 헤아릴 수 없이 일상화 되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꿈 바깥 세상>을 찍은 사진가도 그러한 모습에 사람들이 눈길을 두면 좋겠다는 뜻에서 오랜동안 따돌림받아온 아이들 삶 속에 뛰어들어가 훌륭한 사진들을 남겼지요. 아직 우리 나라엔 이만한 사진책을 펴낸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오>에서 펴낸 잡지 가운데 앵벌이와 정신대 할머니를 다룬 사진은 그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지만, 낱책(단행본)으로 한 가지 주제에 깊숙히 파고들어간 책은 아직 없지요. <종군 위안부>란 사진책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 사람이 펴냈거든요. 개인이 아닌 단체로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그 날 이후>와 <대인지뢰>라 하여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대인지뢰 피해자 삶을 좇고 찾아서 담아낸 사진책이 있습니다.

<한겨레> 기자 강재훈 씨가 펴낸 <분교, 들꽃 피는 학교>나 <안승일-굴피집>은 저마다 열 해 넘도록 문닫는 작은 학교 이야기와 깊은 산 속에서 굴피집을 만들어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담은 사진책이죠. 이렇게 따져 보니 없는 건 아니군요. 많지 않을 뿐이지.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그리고 우리네 아이들 삶을 깊이 있게 다룬 사진책은 아직 없다고 할 수 있고요.

부스러기 선교회에서는 해마다 `글잔치 그림잔치'를 해서 이렇게 모둔 글과 그림을 모아서 글모음을 하나씩 펴냅니다. 1999년에는 를 펴냈네요. 아이들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가 주제로 들어가 있는데, 아이들이 `글잔치'에 내는 글이라고 생각했는지 틀에 박힌 글이 꽤 많습니다. `상'이라든지 `대회'라는데 얽매여서 짐짓 꾸민 흔적도 가끔 보이고 너무 `교훈성'을 띠려고 애쓴 모습까지... 부스러기 선교회에서 `글잔치 그림잔치'를 하는 일은 좋은데 `잔치'로 하기보다 늘 하는 일로써 아이들에게 글과 그림을 즐기게 하고, 그렇게 즐기게 한 뒤 이를 모두어서 펴내는 일이 더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대목이 좀 아쉬워요.

[숨어있는 책]에서 책을 보면 책장에 틈틈이 새로 꽂는 책이 많아서 날마다 찾아가도 다 둘러보기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렇게 본 자리를 다시 보고 또 보고 하노라면 처음 문을 연 뒤로 아직도 제자리에 꽂혀 있는 책도 쏠쏠히 만날 수 있습니다. <류은규-잊혀진 흔적, 포토하우스(1998)>도 퍽 오랜동안 제자리에 꽂혀 있던 책입니다.

[숨어있는 책]에서 오랜동안 팔리지 않은 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먼저 `책값 딱지'가 붙어 있느냐 붙어 있지 않느냐로 따집니다. 다음으로 `책이름과 책값을 적은 전표'가 있느냐 없느냐, 다음으로 책 뒷겉장 앞쪽에 `연필로 쓴 숫자로 책값'을 적었느냐 적지 않았느냐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잊혀진 흔적>은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오래 묵은 책이죠.

남만주에서 활발하게 항일을 했던 조선혁명군의 양세봉 장군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영웅이다. 해방 후 김일성은 그의 처자식을 평양에 불러들여 후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이 고생을 했던 양세봉 장군 셋째 제수인 김화순 할머니는 아무 곳에서도 보상도 대우도 못하고 시골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잊혀져 간 역사의 흔적을 김화순 할머니는 혼자 근근히 지키면서 살고 있었다.
"할머니, 사진 좀 찍을게요"
"그냥 찍으면 안 돼. 한복을 입어야지"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방안에서 등을 돌려 할머니가 갈아입는 것을 기다렸다. 내 카메라 앞에 선 할머니는 한국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할머니의 그 모습이었다. <26-27쪽>

김좌진 장군의 딸이 생존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에 믿어지지가 않았다. 김산조 씨를 만나 보니 김좌진 장군의 다섯 번째 부인의 딸이고,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김좌진 장군의 딸이라는 것은 이미 조선족 역사학자들이 여러 명 증명하고 있엇다.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김좌진 장군의 딸이라면 한국에 가도 대접을 받으실 텐데 왜 가시지 않으세요?"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우리 아버지를 죽인 친일파 정권이지 않아요. 박정희가 만주에서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사람이 세운 정권이면 친일파 정권이 아닌가요? 그런 나라에 내가 가면 그 놈들이 나를 죽이겠지요" <28-29쪽>

김좌진, 이청천 등과 같이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항일을 했던 영수급 인물인 김규식 선생의 딸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소 하나 들고 어렵게 찾아간 김현태 할머니의 집은 그 동안 가본 어느 집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었다. 아버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말에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김규식 선생이 당파싸움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고나서 만주에 남겨진 유가족들의 고생은 말할 수도 없이 비참한 것이었다. 해방 후에도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씩 찾아오는 한국 사람 때문에 맛이 있는 것도 먹을 수가 있지"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지나가는 트럭 한 대를 빌렸다. 집에서 4-5킬로미터 떨어진 그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아버지... 이젠 여기 찾아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지도 모르겠어요. 아버지..."라고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때 김현태 할머니 나이는 80세였다... 그 2년 후, 나는 김현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34-35쪽>


몇 분 이야기를 옮겨 적었습니다. <잊혀진 흔적>은 식민지 때 일제와 맞서 싸운 분들과 남은 식구들을 좇고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고 이야기를 듣고 남겨서 적어 놓은 책입니다. 헌책방 [숨어있는 책]에서 <잊혀진 흔적>은 그야말로 사람들 손길과 눈길에서 `잊혀져 버린 책'이기도 했군요. 이 책은 책대로 잊혀졌겠지만 실제로 중국땅에서 지금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남은 식구들은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으며 우리가 잊고 있을까요.

`헌-새' 책방에는 잊혀져 가는 책도 많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는 잊혀진 임(존재)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많은 `잊혀져 가는' 임이란 참말로 잊혀져야 할 만한 쓸모없는 임일까요? <잊혀진 흔적>을 덮고 흐른 눈물을 스윽 문질러 닦으며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이번에 `잊혀지는 책들'을 찾은 <숨어있는 책>은,  02) 333-1041 / xbooks@kornet.net
 <- 이곳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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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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