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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우리가 생각없이 스쳐가는 책 가운데는 늘 `한돌(보배)'이 있게 마련입니다. 헌책방은 온갖 책더미 속에 묻혀 있지요. 새책방엔 `잘 팔린다는 사타구니 슬슬 달아오르는 책' 뒤에 묻혀 있고요.

하지만 헌책방에서 `한돌 찾기'는 쉽지 않답니다. 여러 번 시행착오-괜시리 이름만 보고 샀다가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책을 사는 일-도 거치면서 참말로 책을 살 때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눈길을 기르다 보면 우리들 사이에서 잊혀져 간 책이나, 처음 나올 때부터 묻힌 책을 볼 수 있어요.

윤 용 - 개인카드 번호 309
* 인적사항/생년월일:40.2.19 본적:충남 예산 덕산 시량 168
주소... 직업직위:전 고려대 신방과 교수 신장:171cm 체중...
* 전과관계/72.10.22 강제추행(혐의무) 72.12.1 폭력 기소 유
예 85.12.4 도운법 기소유예
* 개인특성/ ★ 고 윤봉길 의사 친조카 ★ 86.3.28 시국선언
문 초안 작성 및 서명을 시작으로 최근까지도 지속적으로 대
정부 투쟁을 해오고 있는 반골파...


1990년 11월치 <말> 별책부록으로 나온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에 나온 몇 가지를 옮겨 보았습니다.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는 외국어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끌려간 윤석양 씨가 폭로하면서 온누리에 알려졌죠. 그러나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에는 보안사가 거짓으로 꾸며 넣은 기록도 많이 있지요. 앞에 적은 윤 용씨 `전과관계' 같은 것도 그런 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무능과 부패와 독재에 찌든 정권과 맞선 운동가와 활동가에게 흠집을 내고 먹칠을 하는 좋은 연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말>12월호에서 천호영 기자는 `바로잡습니다'라 하며 이런 기사를 써 올렸습니다.

"... 이밖에도 보안사 특유의 왜곡된 시각과 편견으로 사찰 대상자를 재단함으로써 터무니없는 인물평가 행적 등이 사찰 자료에 입력돼 있는 경우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단지 몇줄의 글만으로 날조된 보안사 사찰기록 모두를 바로잡기란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보안사 사찰은 날조된 기록만을 따로 떼어 바로잡는 것만으로는 결코 풀릴 수 없는, 이 사회구조 전체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이기도 하다.
일일이 하나하나의 날조 사실들을 들춰내 바로잡기보다는 `거꾸로 서 있는' 나라 전체를 바로잡는 게 더욱 빠른, 더욱 확실한 문제 해결의 길이 아닐까." <90쪽>


자, 그렇다면 제가 왜 `윤 용'씨 기록을 굳이 적었을까요? 저는 헌책방에서 고려대 신방과 교수란 `안정된 일자리'에 있으면서도 굳이 고려대학교가 보이는 부정과 비리에 맞서기도 하고 나라꼴이 어수선할 때 `시국선언'을 외치며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려 애쓴 마음과 바람을 담은 `시국선언서집'을 두 번이나 보았거든요. 한 번은 `윤 용'이란 사람 이름도 까마득히 모르던 때 집어들었고 나중에는 예사롭게 보아넘길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으로 집어들었습니다.

`고 윤봉길 의사 친조카'.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가 떠올랐고 이를 뒤적여 보았지요. 이에 따르면 `윤 용'씨는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에 `1등 공헌'을 했다고 할 만한 윤봉길 의사 친조카입니다. 그런데 보안사는 `윤 용'씨에게 `반골파'라는 딱지를 붙여 주었습니다. 독립을 바라던 식민지 조선 땅에서 적장을 폭탄으로 죽인 윤봉길 의사도 `반골파'로 보는 흔적이 짙게 도는 `보안사 사찰카드 기록'입니다.

1987년 2월에 윤 용 씨는 태어나서 처음 써 보았다는 `시국선언시'를 모아서 청사출판사에서 <백기는 휘날리는데>를 펴냈습니다. 밤에 자다가 깨어 무언가 떠오르는 생각을 몇 시간이고 붙들고 끄적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시더라...하더군요.

... 신문사 편집실이 / 왜 이리 / 조용해졌나
왜 이리 / 혼이 빠져 있나 //
나는 / 유인물을 / 계속 나누어 준다 ......
쇠몽둥이로 / 피가 낭자해 / 떼굴떼굴 / 층계 아래로 굴러 떨어져도
할말은 했던 옛기개는 / 쫓겨났기 때문에 / 이젠 없다 ......
신문사 건물이 / 한눈에 드리울 만큼 / 멀리서 / 뒤돌아본다 //
아! / 저것이 신문사였구나 / 때맞추어 기사 먹고 /
때맞추어 기사 싸고 / 시간 맞춰 찍어대는 / 자동화 신문사로구나 //
100원짜리 신문을 산다 / xx일보(신문) /
5분만에 훑어보고도 / 시간이 남는 / 신문을 산다 //
화끈한 기사 / 시원한 기사 / 오늘도 없구나 //
잡담을 / "진실"로 꾸민 손재주 /
헛소리를 / "진담"으로 꾸민 말재주 //
안 사고는 못 배기는 / 싸구려 신문 ......
5분이면 족한 신문 / 그래서 / 신문이 필요한 모양이다 //
화장실에서 / 똥누는 시간은 / 10분이면 족하다 //
똥누기가 심심해 / 신문을 본다 / 그래서 / 신문이 필요한가 보다 //
도배질 벽에 붙은 / 누더기 신문 / 도배지 뒤에 숨어버릴 /
싸구려 신문지 / 그래서 / 신문이 필요한 모양이다 /
뒷간에 / 왕파리가 윙윙 ... 엥- / 밑을 씻는다 /
싸구려 신문지로 / 밑을 씻는다 / 아!
그래서 신문지가 필요한 모양이다 //
이사가는 달동네집 / 신문지가 불티난다 /
장독 항아리 깨질라 / 신혼경대 찌그러질라....


"그래서 신문이 필요한 모양이다"라는 시입니다. 윤 용 교수(해직되기 앞서) "빼앗긴 자주와 언어를 되찾읍시다"라는 유인물을 한국,동아,조선,중앙,경향신문사를 찾아가서 편집국과 논설위원실 언론인에게 나눠 주고나서 느낀 소감을 적은 시라고 합니다.

... 신문은 귀뚜리다 귀뚜리 소리다
몸음 숨기고 입으로만 떠드는 / 귀뚜리 소리이다

신문은 노루다 노루 소리다
총소리에 혼이 나간 / 노루 소리이다

신문은 광고다 광고 소리다
재벌 광고를 뺏어 먹고 사는 / 광고 소리이다

신문은 돈이다 돈 소리다
양심보다 돈을 편드는 / 돈 소리이다
...
신문은 물이다 물 소리다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 물 소리이다

신문은 수영이다 헤엄치는 소리다
땅 짚고 헤엄쳐 부자되는 / 헤엄치는 소리이다
...
신문은 달이다 달 소리다
빛이 두려워 밤에 나타나는 / 달 소리이다

신문은 좀이다 좀 소리다
민중의 말을 잡아먹고 사는 / 좀 소리이다

신문은 무덤이다 무덤 소리다
진실을 생매장하는 / 무덤 소리이다

신문은 개 소리다 똥개 소리다
도둑을 보고도 짖지 않는 / 똥개 소리이다


"신문소리"란 시를 보면 눈물까지 핑 돕니다. 어쩌다 이 땅 신문은 `똥개'까지 나뒹굴고 말았는지 말입니다. 헌책방에서 찾은 책 또 한 권은 <핏빛 6월,일월서각(1987)>입니다. 이 책은 윤 용 교수가 기말시험 때 학생들에게 `제도언론을 보며 느낀 점'을 시로 쓰라고 갑작스런 문제를 내서 학생들이 시험 시간에 쓴 글을 모아서 펴낸 책입니다.

윤 용 교수는 학생들에게 `매스콤론'을 가르쳤습니다. 수많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매스콤론'을 배우고 기자가 되고 피디가 되어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일을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대학교에서 배우고 대학원도 가고 유학도 다녀오며 배웠으나 정작 신문사에 들어가고 방송사에 들어가면 배운 대로 `언론이 갈 바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험 시간에 배워도 지식쪼가리로만 알고 실제 현장에서는 하나도 담아내지 않는 걸로 점수를 매기지 않고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을 시로 담아보라고 한 시험문제는 올바르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서른다섯 대학생이 `나서 처음으로' 시라는 걸 썼답니다.

최루탄 맞아가며 / 민주쟁취 외치는
이 땅의 젊은이들 모습은 / 오간 데 없고
뜨겁게 포옹하는 / 서지오 발렌테 차림의
짧은 남녀의 모습만

일당 5000원을 요구하며 / 자신의 몸을 불사른
노동자들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죠다쉬 바지에 아놀드파마 셔츠의 / 모델들의 모습만

똥값이 되어버린 / 소값 때문에 울부짖는
농민들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새참 때 햄버거에 커피를 마셔대는 / 농민의 모습만

부서져가는 초라한 보금자리를 보고는
울고불고 기절하는 / 철거민들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60평 아파트에서 양주잔을 기울이는 / 부유층의 모습만


법학과 85학번 김상국 씨가 쓴 "우리들의 TV에는"이라는 시입니다. 교수가 시험시간에 시켜서 쓰긴 했겠지만, 이렇게 엉겁결에 쓴 시 줄거리는 그 뒤로 열네 해가 되어가는 2001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네요. `서지오 발렌테'가 `배꼽티'로 바뀌고 `죠다쉬' `아놀드파마'가 다른 옷으로 바뀌고 `소값'이 모든 농산물값으로 바뀌고 `철거민'이 `세입자'로 바뀌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안타까움과 함께 <백기는 휘날리는데,청사>와 <핏빛 6월, 일월서각>이란 책은 새책방에서는 만날 길이 없고 헌책방에서나 겨우겨우 찾아볼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아쉽긴 해도 헌책방을 찾아가며 이러한 책이 있을 때 모르면서 지나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뿐입니다. 더불어 요즈음처럼 `언론 문제'가 시끌버끌한 때에 이러한 시모음을 헌책방에서 찾아서 볼 수 있다면 더욱 더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 <말> 1990년 1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보안사 민간사찰 개인별 기록카드" 또한 헌책방을 잘 뒤지면 찾을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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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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