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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날. 차례를 지내고 치우니 어느 덧 낮밥 먹을 때입니다. 차례는 지내려면 먹을거리 준비하느라 며칠동안 애먹지만 애써 지내고나서 치울 때도 여럿이 함께 치우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제기를 다 닦아서 제자리에 놓고 제삿상에 쓴 그릇 치우고 차린 먹을거리를 반찬통에 담고 설거지 마무리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니 치우는 데만도 두 시간을 잡아먹네요.

가장 많은 일을 한 어머니는 다 치우고나서 그대로 마룻바닥-거실-에 쓰러지십니다. 저도 한 게 뭐 있다고 함께 곯아 떨어집니다. 낮밥도 안 먹고 곯아떨어진 뒤 일어나니 두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집에서 할 일도 없고 오랜만에 고향동무를 만나려고 동인천으로 버스 타고 나옵니다. 동무 만나러 가기 앞서 금창동 헌책방 골목에 갑니다. 한가위나 설날이면 모든 헌책방이 문을 닫지만 이곳 한 군데는 꼭 열거든요. 물론 이곳 말고도 두어 곳 더 문을 열고 있더군요.

한가위 날인데도 <아벨>엔 손님이 북적입니다. 모두들 볼 것도 없는 텔레비전 앞에 앉기도 싫고 친척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한갓진 낮이라 이렇게 헌책방 <아벨서점>으로 모여드나 봅니다.

지난 번에 와서 찍은 할아버지 사진이 참 잘 나왔다며 <아벨> 아주머니가 교회에 함께 다니는 분과 다른 책손님 부부 두 분과 함께 사진 한 장 찍어달라 하십니다. 사진 찍는 일을 썩 내켜 하지 않아 하셨는데 할아버지 사진이 책방 분위기를 참 잘 담아냈다 싶어서 반가운 사람들과 함께 사진 한 장 담아두고픈 마음이 드신 듯했습니다.

한갓진 한가위 낮. 잔잔히 책방을 감싸는 노래를 들으며 <아벨> 아주머니가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책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시는 모습을 봅니다. 멀리서 오셨다는 책손님은 책을 거의 십만 원 어치 사는데 얼만큼 먼 데서 오셨을까요.

요즈음 들어 부쩍 늘었는지 몰라도 <아벨>에서 갖춰놓는 책을 보니 우리 나라 문화와 얽힌 책이 많이 눈에 띕니다. 어느 분이 소중히 갖고 있었다던 '열화당' 책들도 열 해가 훨씬 지난 책들인데도 아주 깨끗하게 책꽂이에 꽂혀 있고요. <한국의 굿> 스무 권 가운데 열 권 즈음은 꽂혀 있습니다. 저도 이 가운데 제가 아직 보지 못한 <평안도 다리굿(5번)> <함경도 망묵굿(8권)> <은산 별신굿(9권)>을 집었습니다. 이 책들은 한 권에 3500원씩 매겨 놓으셨습니다.

책 아래에 보면 숫자로 `35'로 적어두셨죠. 이건 3500원이란 뜻입니다. 1985년에 나온 책이 갓 나온 새 책 마냥 깨끗하니 이만한 값을 받을 만한 값어치는 넉넉하지요.

그리고 좀 낡긴 했어도 김원룡 선생이 돌아가시기 앞서 1981년에 낸 <한국의 미술,열화당> 같은 책도 5000원이라 매긴 값이 비싸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헌책이라 해도 이만한 값을 치르고 사야 하고 그만한 댓가를 치르고 사야 저도 소중히 지니면서 볼 테니까요.

<전통문화>란 잡지를 펼치니 어느 고서동우회 모임 소개가 나옵니다. 고서동우회 사람들은 1959년 앞서 나온 책은 `고서'로 친다더군요. 도서관에서 그 때 앞서 나온 책들을 제대로 보관하지 않는 게 큰 까닭이라고 밝히는군요.

저는 이 모임에 계신 분들을 만나뵈온 적은 없지만 이 모임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다지 달갑게 들리지 않더군요. 우리 책 문화가 그다지 폭 넓지도 못하고 정부가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는 현실도 아니라 이러한 모임이 하나라도 있다는 사실이 참 반갑긴 합니다. 소중하고요. 더구나 이 분들이 캐내고 건져낸 소중하고 값진 책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 분들이 고서값을 많이 올려놓는 대목에서 쓴 소리들을 여기저기서 많이 하더군요. 끝내 이렇게 책값만 많이 올리는 일은 당신들한테 돌아가는 안 좋은 일일 텐데도 그리 된다고...

고서가 고서 대접을 받긴 받아야겠지만 책을 너무 `값'에 얽매여 생각한다면 문제겠죠. 책이란 수집품이 아니라 `널리 함께 보고 나누는 문화유산'이니까요.

지지난달인가 왔을 때 점찍어둔 <조선의 미소(옛낙서),나랏말(1998)>가 팔리지 않고 그대로 있네요. 그때는 돈이 모자라서 못 산 책인데. 아쉽지만 다른 좋은 임자 만나겠지 했는데 값이 안 맞았을까요? 다른 분들이 건져가지 않았군요.

이 책을 처음 펴냈다는 `나랏말'은 전국국어교사모임이 세운 `나라말'이라는 출판사와는 다른 곳입니다. <조선의 미소>는 조선시대에 걸쳐 나온 옛 책들을 뒤적이면서 옛 선비나 아이들이 책에 끄적인 낙서만 모아서 그 낙서를 파헤치고 무슨 뜻을 담았는지, 그냥 낙서인지를 살펴 모은 책입니다. 옛 선비들이 했던 낙서를 보면 요즘 우리가 하는 낙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석을 본답니다.

지구 환경을 더럽히는 사람 탓에 동물들이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야기를 일본 사람 다지마 신지가 1977년부터 1991년까지 짬짬이 써낸 환경 철학책 <가우디의 바다,정신세계사(1991)>도 건집니다. 하지만 이 책을 써낸 일본 사람 다지마씨 나라에서도 이 책을 펴낸 정신세계사가 있는 대한민국도, 이 책을 펴낸 정신세계사조차도 우리 환경을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있지는 못하죠. 정신세계사조차 이 책만 `재생지'를 썼을 뿐 다른 책들은 코팅하고 난리가 아니니까요.

<강정규-짱구네 집,성바오로(1977)>와 <신경준-산경표(박용수 해설,푸른산(1992)> <송시현-삶의 노래 사랑의 노래,천마(1990)> <최근학-한국속담사전(1991)> 들을 더 건졌습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가 나왔다는 <신동아 8월호>를 <아벨>에서 비로소 찾았습니다. 하지만 <신동아> 기자분이 제 사진과 다른 사람 사진을 잘못 넣었더군요. 사진으로 사람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꿔 버렸더군요. 제 이야기를 쓰고도 책 한 권 보내지도 않고 사진도 엉망으로 실어버리다니!

지난 1월에 강연했던 이야기를 실었는데 <아벨> 아주머니가 보시더니 "사람들이 튕기는 이야기보다 사람들에게 스며 들어가면서 자기 주장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제 아무리 좋은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깨닫고 고쳐야 한다치더라도 그 사람이 튕겨낼 만큼 이야기가 딱딱하거나 뾰족하면 빛을 잃기 쉽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아직 저는 모든 사람 마음에 시나브로 스며드는 이야기를 할 만큼 무르익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하려고 부러 애쓸 때도 아니라고 느낀답니다. 아주머니도 그걸 이해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어떨 때 튕기는지 모른 채 스며들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죠. 어느 때 더 찬찬하고 따스히 받아들이는지 알려면 그 사람이 지금 곧장은 튕기더라도 여러 갈래로 이야기를 해 보아야죠. 그러면서 제 갈 길을 찾고 제 말길을 터야죠.

좋은 약이 입에 쓰지만 좋은 약이 입에도 달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늘 달디 단 이야기만 할 순 없어도요.

안쪽 책방으로 들어가 보니 지지난 달까지 불교 책이 있던 자리를 말끔히 치우고 그 자리에 계간지와 월간잡지들-거의 모두 문학,철학,사회학 잡지-을 꽂아두었습니다.

불교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지 못했군요.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을 십삼만 원에 파시는군요. 이 값은 오히려 서울 여느 헌책방에서 파는 값보다 만 원이 쌉니다. 허참. <한국의 발견>이 개정판을 내지는 못하지만 민간이 한 크나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죠. 생각하면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인데.

모처럼 찾아와서 아주머니를 만났기에 이야기도 좀 더 해야 하는데 다른 책손님들도 많고 고향동무가 책 그만 보고 어서 오라는 통에 책값 셈을 치르고 나섭니다. 금창동 헌책방거리에 오면 거의 <아벨>과 <삼성> <한미>만 들르는데 나중에 참말로 짬을 내서 다른 가게도 가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갈 만한 틈이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4333(2000).9.14.나무.ㅎㄲㅅㄱ

덧붙이는 글 | <인천 금곡동 아벨서점> 032) 766-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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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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