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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신문에서도 남승룡 씨가 돌아가신 일을 기사로 쓰면서 `1등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재벌 광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를 쓴 신문은 자신들이 `으뜸(1등)'신문이라고 똑같이 말할 뿐 신문 매체로서 올곧은 길을 가고 있는지와 우리에게 결고운 빛깔로 아름다운 삶 이야기를 보여 주는 길잡이 구실을 하는가는 이야기하지도 다루지도 않지요.

남승룡 씨가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실리던 날, 자그마한 단골 헌책방을 찾아갔습니다. 헌책방 아저씨는 돌아가신 남승룡 씨와 우리 사회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안고 찾아갔지요.

하지만 <뿌리> 아저씨가 많이 지치셨을까요. 하나됨과 겨레 화합과 최선을 다하는 삶 이야기를 늘 힘주어 말씀하시며 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좋은 말씀을 하려 애쓰고 당신도 좋은 말씀을 되새겨 들으시던 모습이 조금씩 흐릿해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실이기도 하니까요. 1등만을 인정하고 1등만을 떠올리고 1등만이 으뜸이라며 내세우니까요. 지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식민지 조국에 꿈과 힘을 안긴 두 영웅 손기정 씨와 남승룡 씨 가운데 1등한 손기정 씨는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지만 3등한 남승룡 씨는 옹글게 잊혀졌고 당신이 돌아가신 일 또한 잊혀진 일로 묻혔습니다. 이렇게 응달진 삶을 안타깝게 여기고 쓸쓸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신문들도 이렇게 당사자가 죽었을 때만 잠깐 다시 반짝할 뿐이지 다시 원래(1등만을 비추는 모습)대로 돌아가잖습니까.

돌아가신 뒤 몇몇 신문에서 적잖이 무게를 두면서 뒷이야기를 적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황영조 선수가 1등을 했을 때 방송과 신문은 1936년 손기정 씨 뒤로 다시 올림픽에서 1등을 했다고만 말했지요. 그때 3등을 했던 남승룡 씨가 함께 있었음을 말한 곳은 없었다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교과서든 역사를 말하는 자료사진에서도 남승룡 씨와 손기정 씨를 함께 같은 크기로 다루지 않았지요. 심훈 스승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 3등을 했다는 호외'를 길거리에서 집어들고 그 뒤에 `절필'이란 이름으로 손기정 씨와 남승룡 씨를 함께 기린 글을 빼고 두 사람을 똑같이 소중하게 다룬 글도 이야기도 아직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아저씨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1등을 못하면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은 웬일인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삶이 소중하다'는 말씀엔 힘이 실리지 않는군요.

초등학교 교과서에 박찬호와 박세리를 넣는다지요? 하지만 남승룡 씨를 넣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니 남승룡 씨만이 아니라 지난 올림픽 때 펜싱에서 처음으로 메달, 그것도 금메달을 땄던 이나 체조에서 처음 메달을 땄던 이, 그리고 지난 올림픽 때 메달을 둘이나 땄던 이들의 삶이나 이야기를 교과서에 싣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박찬호와 박세리가 했다는 성공은 과연 어떤 성공일까요. 이네들이 세계 무대에서 1등도 많이 하고 눈길도 받는다 할지라도 버는 돈이 적었다면 과연 이들을 지금처럼 다뤘을까요?

책방 가운데에 있는 책무더기에서 <민중 제2권(1985.2). 청사>을 꺼냈습니다. <민중 2권>엔 농사꾼이면서 글을 쓰는 윤기현 씨가 "죽을 땐 호맹이만 내 벗"이란 글이름으로 `농민자서전'을 실었고 하종오 씨가 쓴 `반핵굿/여성굿'이란 굿시를 실었으며 `판소리 창작사설 : 방디기전(최인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글은 따로 자료모음이나 낱책으로 나오거나 실리지 않는 글이라서 우리 토박이말이나 입말을 살피고 찾을 뿐 아니라 토박이 삶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글이죠.


자기 집을 업신여기고 남의 집만 제일이라고 하는 통에 고향의 마을 집들이 많이 헐려 나가고 국적도 알 수 없는 양옥들이 들어선 경우도 적지 않다. 새마을운동이 그런 풍조를 만들어 내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세'의 지향은 좋았는데 초가집 없앤 뒤에 어떤 집이 들어서야 이상적이냐의 과제는 무시한 채 부수는 일부터 강행하였다. 그 결과는 허무한 자기 상실과 외세의 영합이 되고 말았다.
<신영훈, 김대벽-한옥의 고향, 대원사(2000)>


`1등만'을 좇는 흐름은 2등, 3등, 꼴등이 모두 소중하며 저마다 값어치가 있을 뿐 아니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임을 잊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우리 살림집은 업신여기게 되고 `국적도 알 수 없는 양옥'만이 따라가야 할 문명인 듯 여기지요.

그저 부지런히 애써서 했는데 누군가 `당신이 으뜸이요'라고 하는 으뜸과 옆도 뒤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달려서 으뜸이 되는 일과는 사뭇 다르죠. 아직 우리 말도 채 익히지 못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으나 아이는 오히려 머릿속에서 말 혼란을 겪으며 이 말도 저 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책방에서 라디오로 듣습니다.

<뿌리> 아드님도 중학교 들어가던 때 반아이들이 죄다 미리 과외받고 들어왔는지 영어를 외국에서 살다오기라도 한 듯 너무 잘해서, 선생님이 알파벳을 하나하나 배우고 소리내기를 가르치지 않고 `너희들은 미리 배워서 알겠지'하는 생각으로 잘 모르는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넘어가서 따라가기 애먹었답니다.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부모도 문제지만 학교에서도 차근차근 모든 아이들을 고루 가르치려는 마음이 적지요. 그러나 부모도 학교에서도 왜 아이들을 자꾸 바보로 만드는가를 깊이 따지고 살피는 사람은 적네요. 그리고 이런 흐름을 살피는 분들도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도 힘겹다 보니 어쩌는 수 없이 시나브로 끌려가고 마는 게 아닌가 싶고요.

책방에서 흐르는 라디오에선 `요즘 사람은 놀 줄 모른다'면서 놀이 문화가 이러느니 저러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최상수-한국 전래 어린이놀이. 웅진(1989)>에만 해도 아이들 놀이가 아흔 가지 즈음 나옵니다. 분명히 지금 어른들은 이런 놀이를 어릴 적부터 즐겨 했겠죠. 하지만 지금 어른이 어른이 되면서 지금 아이들에게 이런 놀이를 물려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오로지 공부와 남을 밀거나 밟고 올라서라는 것만 가르쳤죠. 그러니 아이들 놀이는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고 체육 시간에 가르치고 맙니다.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놀 줄 모르고 혼자서만 하는 셈틀과 오락에 푹 빠지는 탓 거의 모두는 바로 지금 어른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3등이 설 자리가 없다는 대목입니다. 하물며 4등이나 5등, 10등, 꼴등은 어떨까요? 100등은? 500등은?

고등학교를 마친 아이들에게는 대학교만이 `하나뿐인 목표'라는 듯 말하고 가라 합니다. 그렇다면 대학교를 가지 못하거나 갈 수 없거나 떨어진 아이들은?

모두를 살리고 우리가 살고 다 함께 웃고 즐기며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고 이런 삶을 살아가야죠.

<뿌리>를 찾아가면 이런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나눠야 하는데 그때는 제대로 나누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눈 이야기처럼 삶을 살아가고요. 하지만 어제 못했다고 앞으로도 못 하리란 법은 없으니, 다음에 찾아가면 좀 더 살갑게 책을 보고 이야기도 나눠야겠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헌책방에서는 책을 가장 많이 사가는 사람도 한 권만 사가는 사람도 사지 않고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도 모두 똑같이 소중한 책손님으로 맞이하고 그네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몇 시간 죽치고 있어도, 잠깐 인사만 하고 지나가도 모두 한결같이 소중한 사람이고 손님임을 생각하는 헌책방을 다녀오면서 우리 사회가 이런 모습을 헌책방에서 배워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사진 소개

1957년에 국제보도연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펴낸 [한국화보집(PICTORIAL KOREA) 1956-1957] 46쪽에 실린 사진으로 1956년 전국체전 때 남승룡 씨가 성화 마지막 주자로 나와서 불을 붙이는 모습입니다. 영어로 적은 소개말 가운데 아래쪽에 보면 `1939년 베를린 올림픽' 제패자로 되어 있으나 이는 `1936'년을 잘못 쓴 말이지요.

[서울 용산 뿌리서점] 02) 797-4459 (낮 두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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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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