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31 06:06최종 업데이트 22.03.3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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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축구장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나를 쳐다볼 정도였으니까. 중앙 수비를 보던 동료가 그날 안 나와서 익숙지 않은 자리에 섰던 게 문제였을까. 황당해서 별로 아프지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더 이상 발목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두꺼운 아킬레스건이 이렇게 쉽게 끊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을 따름이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병원이 쉬어서 다음 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힘겹게 보내고서야 근처 외과병원에 갔다. 의사는 MRI 영상을 보더니 수술날짜를 잡아줬고 안심하라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이야기 했다. "4개월 뒤에는 목발 없이 발로 걸을 수 있고, 6개월 뒤에는 운동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나에게 한동안의 장애가 찾아왔다.

출퇴근이 힘들지 않냐는 가족들과 직장 동료들의 물음에 할 만하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목발에 의지해 고양시 백석에서 사무실이 있는 혜화까지 출퇴근 한 4개월은 험난했다. 쉽게 오르내리던 계단들은 이제 위험천만한 장애물이었다. 과장을 조금 허락하자면 지옥 같았다. 한동안 마음에 뭔지 모를 가라앉지 않는 화(火)가 항상 배어 있었다.

목발 출퇴근, 하루에 여섯 번의 화를 삼키다

엘리베이터 없는 3층 집을 한 쪽 다리로 콩콩콩 내려가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힘든 여정의 시작이었다. 세 살배기 아이가 다니는 시립 어린이집은 불과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지만 내 손이 목발을 잡아야 하는 탓에 아이 손을 잡고 데려다 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1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을 데려다 주는 착한 택시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이집을 경유해 멀찌감치 택시요금이 7000원도 넘게 나오는 지하철역을 도착지로 설정해야 나와 아이를 태울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불편한 다리에 택시도 마음대로 잡히지 않으니 소외감이 들었다. 아니다. 소외감이 아니라 어떤 화가 났었던 것 같다. '카카오택시고 나발이고 왜 가고 싶은 데로도, 가고 싶은 만큼도 못가나.'
 

목발 보행자에게 계단은 두려운 곳이다. ⓒ 장나래

 
출구가 대여섯 개나 되는 번듯한 신도시 번화가 지하철역이래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출구는 하나뿐이었다. 다치기 전까지는 장애인들이나 노약자들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출구를 이용하면 되겠거니 무심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엘리베이터가 있는 출구를 두리번거리며 찾아가는 신세가 되고 나니 소외감이 작지 않았다. 아니, 화가 났다. '엘리베이터. 요즘 세상에 그깟 게 뭐라고 역마다 하나씩밖에 안 놓나.'

사무실이 있는 혜화에 가려면 안국역에서 내려 버스 환승을 해야 하는데 혜화 가는 버스가 서는 종로경찰서 정류소 쪽으로 난 안국역 6번 출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목발을 무겁게 옮겨 버스를 기다리면 저상버스는 3~4대는 넘게 걸러야 1대씩 왔던 것 같다. 종로 쪽 노선을 다니는 버스들은 그래도 저상버스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내가 타야 하는 율곡로를 지나는 버스는 저상버스가 드물었다. 결국 아침 출근시간이 빠듯해서 저상버스 아닌 일반 버스의 높은 계단을 한 발로 콩콩콩 오르다 넘어질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다친 다리를 잘못 디뎌 수술부위를 도로 다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버스에 오르면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장애인 단체들이 그렇게 싸웠는데도 저상버스는 왜 빨리 안 늘어나나. 일반버스보다 저상버스가 더 많아야 하는 거 아닌가.'

저녁 퇴근길은 출근길의 정확한 역순이었다. 똑같은 화를 느끼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이렇게 하루에 화를 여섯 번을 삼켜야 나는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집에 도착해서는 피곤함으로 끼니도 팽개치고 몸을 누이기 바빴다. 몸의 피곤함 때문인지 화의 피곤함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여름엔 출퇴근 이동만으로도 옷이 흠뻑 젖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4개월이 지났고 의사의 예언대로 나는 다시 두 발로 걷고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6개월이 지나면서는 계단을 뛰어 오를 수 있었고, 그렇게 독했던 화는 몸이 다시 자유로워진 다음에야 비로소 희미해졌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3호선에서 25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위해 지하철에 탑승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전장연과 이준석, 그리고 김예지

전장연은 지난 12월부터 3월 25일까지 27차례 출근길 지하철 휠체어 탑승 선전전을 벌였다. 대선기간 동안에는 대선 후보들에게, 대선이 끝난 후에는 당선인과 인수위원회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과 장애인 인권권리 예산 편성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이 시위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 뉴스에서 그들은 휠체어를 타고 출근시간 혼잡한 역을 누비고 문에 끼이고 휠체어에서 넘어지면서 비좁은 만원 지하철 열차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다. 다리가 회복되고 3년 동안 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나는 그냥 전장연이 또 그렇게 시위를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사람이란 게 이렇게 무심하고 얄팍하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20년 전부터 항상 그랬다. 버스에 몸을 묶고, 휠체어로 띠를 만들어 차도를 막고, 넘어지고 고함쳤다. 그들의 투쟁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이동에 불편을 초래했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태로운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아마 내가 잠시나마 느꼈던 것과 같은 그 화들이 켜켜이 쌓여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행동이고, 아무도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지 않아서 취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3월 2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자신의 SNS에 전장연의 시위 방식을 두고 "불특정한 최대 다수의 불편이 특별한 우리에 대한 관심"이라며 비난했다. "최대 다수의 불편"에 의존하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니니 전장연에게 "불특정 다수의 불편을 볼모 삼는 시위"를 조건 없이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준석 대표의 SNS를 보고 잊었던 화가 다시 가시처럼 가슴을 찔렀다.

이준석 대표는 철지난 공리주의의 문장을 그럴 듯하게 빌려와 엉터리 형식논리로 전장연의 시위를 떼쓰기로 깎아내렸다. 장애인들은 평생을 이준석이 이야기 한 불편 속에서 산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불편을 겪지 말아야할 최대다수에 장애인들은 포함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장연은 그 '최대다수'에 장애인들도 포함되어야 한다며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표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장애인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그가 당대표임에도 이런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준석 대표의 발언에 가장 처음 반응한 이는 놀랍게도 같은 당 비례대표 의원이자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의원이었다. 김예지 의원은 전장연 시위 현장을 찾아 무릎을 꿇고 이준석 대표를 대신해 전장연 활동가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는 김예지 의원이 보인 예의에 마음이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군 채 한동안 들지 못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지하철타기 출근 선전전에 동참해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한 일 때문에 시민들이 불편을 겪게 해서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있다. ⓒ 유성호

 
이후 전장연과 김예지 의원에게는 전례 없는 규모의 연대와 후원이 이어졌고, 이준석 SNS 포스팅 댓글에는 여전히 장애인 혐오 댓글이 넘쳐나는 중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정치,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 결국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말과 풍경들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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