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7 06:07최종 업데이트 22.04.0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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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요즘은 드라마를 침대 위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으로 본다. 온갖 OTT에 가입하곤 있지만, 정작 드라마를 선택하는 기준은 SNS에 떠다니는 짧은 클립들이다. 화제가 되는 드라마는 2~3분, 길어봐야 5분을 넘지 않는 클립으로 만들어져 넘쳐난다.

주인공들이 예쁘고 잘생겼거나, 충격적이고 화끈한 액션이 쏟아지거나, 기막힌 속임수로 악당을 속이는 통쾌함이 있거나 해서 그 3분짜리 클립을 보고 나서 마음이 동하면 어느 OTT에서 볼 수 있는지 검색하고 시청을 시작한다. 드라마의 본방이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어차피 OTT와 SNS의 클립들로 보는 드라마. 그렇게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SNS의 클립들이 준 것과 같은 쾌감을 준다. 계속 통쾌하고, 계속 감동적이고, 계속 예쁘고, 계속 화끈하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한 장면 ⓒ tvN

 
최근 가장 열심히 본 드라마는 tvn의 <스물다섯, 스물하나>였다. 출연한 배우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IMF 시대의 청춘'이라는 소재도 흥미로웠다. 총 16개의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동안 눈이 즐거웠다. 스무살 무렵의 사랑에 빠진 주인공들이나, 꿈을 쫓아 최선을 다하는 청춘들이나, 온갖 쓰잘데기 없는 일에도 낄낄거리며 즐겁거나, 정작 중요한 것들은 뭔지 몰라서 지나쳐 버리는 스무살들을 연기도 잘하고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재현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즐거웠다.

귀도 즐거웠다.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OST들이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 물건들. 그런 말들을 듣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일이다. 그렇게 16편의 드라마를 다 보고 난 후 남은 것은 눈과 귀가 즐거웠던 '감각'이다.

드라마트루기가 없는 드라마

드라마트루기는 드라마의 작법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류 최초의 문예비평이라는 <시학>에서 처음으로 언급한 이래 지금까지 사용되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희곡에 한정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TV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모든 드라마를 쓰는 원리라는 의미로 더 폭넓게 사용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예술을 보편적 진리를 모방하고 재현해 그 본질을 배워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극을 "고귀하고 완결된 상당한 길이를 가진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했다. 즉, 사건 그 자체를 분절시키거나, 인물의 행동 그 자체를 드러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그 유기적 연결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만들어낸 이야기가 어떤 '보편적 진리'를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으로 극이 존재한다고 했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트루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이라고 제기했다.

플롯은 사건의 결합이다. 인물(<시학>은 성격이라고 표현한다)의 행동과 행동이 결합하는 것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과 사건이 유기와 개연으로 이어지면서 플롯, 즉 이야기가 발생한다. 드라마는 이 이야기를 통해 '보편'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것이고 그 재현과 모방에서 얻는 쾌락이란 배움의 쾌락이다. 즉, 극예술의 본령을 구현함은 플롯에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트루기는 단순히 작법, 기술이라기보다는 극이 존재하는 원리 혹은 이유에 더 가깝겠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드라마가 시각적·청각적으로 작지 않은 쾌감을 준 것과는 별개로 극이라는 예술의 본령에 충실했느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드라마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상황을 부여하여 사건을 만든다.

그러나 사건과 사건이 부딪혀 갈등을 만들거나 갈등과 갈등이 이어져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건은 한 에피소드 안에서 제기되고 그 에피소드 안에서 해소된다. 대부분의 상황은 분절되었고, 인물과 인물은 극 전체를 통해 유기적 관계를 맺기보다는 상황 안에서만 관계를 맺어 단절된다. 결국 플롯은 발생하지 않는다. 마치 3분짜리 흥미로운 SNS용 클립들을 수십 개쯤 나열하는 것처럼.

이런 '클립 드라마'는 비단 <스물다섯 스물하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드라마의 경향은 대부분 이런 식인데, 그건 아마 본방 시간에 60분을 지켜보기보다는, 이동 중에, 침대 위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짧게 스마트폰을 통해 드라마를 접하는 시청 행태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모처럼 드라마에 출연하는 대형 배우,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소재(가족이나 첫사랑, 향수, 레트로의 노래들 같은), 예쁘고 화사한 톤과 배경, 감각적이고 유려한 편집 같은 플롯 이외의 요소들이 드라마의 주요 요소로 떠오른 이유겠다.

플롯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관객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사유하여 마침내 거기서 '보편적인 무엇'을 재현하는 예술에 대해 배우는 쾌락을 얻기에 3분은 너무 짧다. 드라마적 쾌감이 발생하여 어떤 결과가 남지 않고, 순간의 감각만이 들렀다 휘발하는 예술을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엔 드라마트루기에 대한 대사가 짧게 나온다.

"내가 드라마국에 와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드라마트루기. 다른 말로 연출법의 기본은 드라마는 갈등이라는 것이다. 갈등 없는 드라마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최대한 갈등을 만들고 그 갈등을 어설프게 풀지 말고, 점입가경이 되게 상승시킬 것. 그것이 드라마의 기본이다. 드라마국에 와서 내가 또 하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는 드라마는 인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드라마와 인생은 확실한 차이점을 보인다. 현실과 달리 드라마 속에서 갈등을 만나면 감독은 신이 난다. 드라마의 갈등은 늘 준비된 화해의 결말이 있는 법이니까, 갈등만 만들 수 있다면 싸워도 두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인생에선 준비된 화해의 결말은커녕 새로운 갈등만이 난무할 뿐이다."

갈등과 다툼만의 연속인 삶의 형질을 그대로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 그것을 고작 3분짜리 클립 안에서, 잘 봐줘야 한 에피소드 안에서 어설피 해소하고 넘어가며 그저 순간의 감각적 쾌락만을 제공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드라마트루기가 없는 삶

고작 드라마 얘기에 이렇게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미메시스(mimēsis 모방)를 통해 인간은 성찰하고 배우며 즐거울 수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미메시스는 어차피 다 쓸데없는 것일 뿐이라고 했으니까. 사실 극과 예술, 드라마니 드라마트루기니 하는 것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고단한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 저녁 먹고 아랫목에 앉아 졸기 전까지 대충 시간이나 보내게 해주면 그만인 것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는 영화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반영의 현실"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이 드라마를 통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드라마를 만들고 보는 이들의 의식과 현실이 반영되어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마흔살에 의대 교수가 되고, 엄청 잘생겼는데, 젠틀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며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취미로 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한 재현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살고 싶은 우리 의식의 재현에 가깝겠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럽고 고단하며 삶의 보편적 진리 따위를 찾고 사유하는 과정을 찾기보다는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말초가 감각적인 드라마를 즐기는 것 역시 우리 의식의 재현과 다름없다.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서 사유하기에 우리는 너무 고단하니까. 그런데 그건 정말로 괜찮나.

비단 드라마만이 아니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3분짜리 클립'처럼 소모된다.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면서 서사가 발생한다. 이 서사와 서사가 얽히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겠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수없이 중첩되는 것이 세계가 이어지는 구조겠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플롯을 볼 겨를 따위는 없다는 듯 단면만을 본다. 마치 3분짜리 클립을 보고 말초의 감각적 쾌락만을 느끼듯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28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3호선에서 25차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를 위해 지하철에 탑승하고 있다. 2022.3.28 ⓒ 공동취재사진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장애단체의 탈시설-이동권 보장 시위에 보내는 사람들의 경멸과 분노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장애인들의 시위로 지하철의 운행이 지연되는 '클립'이다. 그러나 이 클립의 앞과 뒤에는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박탈된 시간을 '평상시'로 부르며 그들의 희생을 강요해온 장면, 그들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생존과 권리를 주장해 오던 장면, 지하철역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국회와 정부에 정중하게 토론을 요청하던 장면, 그들의 그런 노력을 보지도 듣지도 않은 채 무심한 비장애인들의 장면이 있다.

이 장면과 장면들이 이어지고 개연성을 만들어 장애인들의 시위라는 플롯이 만들어진다. 그 길었던 서사에서 고작 몇 분짜리 클립을 떼어내서 보고, 분노나 경멸이라는 감각만을 취하는 것은 어쩌면 드라마의 이야기 전반과 그 드라마를 통해 배우고자, 관찰하고자 했던 보편의 진리를 귀찮아하는 태도와 맥이 닿아 있지 않을까.

장애인단체의 시위뿐 아니라, 많은 것들에서 우리는 그렇다.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젠더의 불평등을 말하는 여성들의 주장에서, 고작 클립 하나만큼의 감각만으로 서사를 짓뭉개고 있지는 않은가.   

고작 드라마일 수 있다. 갈등을 외면하고, 장면의 감각적 쾌락만을 남기고, 유통하기 쉬운 클립으로 이야기를 배제한 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고작 드라마니까 어쩌면 상관없다, 드라마트루기 따위. 나도 희도와 이진의 꽁냥꽁냥한 연애를 보면서 매일 밤이 흐뭇했다.

다만 그 '클립의 세계'가 실은 아무것도 재현해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건 인지해야 한다. 드라마트루기가 없는 클립은 세계를 재현하는 예술일 수 없다. 거기서 배우는 것이 그 세계를 맥락없이 감각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의 세계마저 클립 단위로 감각해서는 곤란하다. 아니 위험하다.

극예술이 보편의 진리를 재현하면서도 안전한 것은 그것은 말 그대로 모방이고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곳의 비극이나 고통은 무대 위 혹은 스크린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험과 고통을 실제의 살갗으로 인식하기 전에 배움과 사유의 영역에서 그것들을 안전하게 경험하고 사유한다.

그러나 실재하는 세계는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그.사.세.>에 나온 대사처럼 드라마와 인생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 드라마의 감독이기도 하고 배우이기도 하다. 60분짜리 드라마 따위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복잡한 서사와 갈등이 얽혀 있는 인생을 드라마트루기 없이 고작 3분짜리 클립처럼 이해하고 연기하거나 혹은 연출한다면 드라마는 망할 수밖에 없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연출하는 드라마트루기를 배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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