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현실화되자 대중문화계 안팎에서는 찬반논란이 뜨거웠다. 찬성쪽에서는 이미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 일본문화를 소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만큼 이를 양성화해 시장의 흐름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편 반대쪽에서는 불법으로 금지시켜도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일본문화를 본격적으로 개방하면 국내 대중문화가 일본에 의해 잠식될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나타냈다.

결과적으로 '태풍'처럼 한국 대중문화를 집어삼킬 수 있다고 우려했던 일본 대중문화는 개방 24년이 지난 현재 '미풍'에 그치고 있다. 영화와 극장용 애니메이션,음반,게임,공연 등 여러 부분에서 전면 개방이 이뤄졌지만 일본문화에 열광하는 대중들은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처럼 소수에 그치고 있다. 오히려 K-팝과 K-드라마 등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큰 사랑을 받으면서 한국과 일본 대중문화의 입지가 뒤집힌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시장에서 좀처럼 먹히지 않았던 일본 대중문화 중에서도 유독 한국 대중들에게 잘 통했던 장르가 있었다. 바로 아름다운 스토리와 색감으로 관객들의 감성을 건드렸던 일본의 멜로 영화였다.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 개봉한 지 4년이 지난 1999년11월에 국내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인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서울에서만 64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멜로 영화의 바이블'로 큰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러브레터>는 춥고 눈에 오는 계절이 되면 국내에서 여지없이 재개봉하는 영화다.

<러브레터>는 춥고 눈에 오는 계절이 되면 국내에서 여지없이 재개봉하는 영화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뛰어난 영상미와 감수성 겸비한 감독

요코하마 국립대에서 미술학을 전공한 이와이 슌지 감독은 1991년 드라마 <본 적 없는 내 아이>를 통해 데뷔한 후 TV와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993년 드라마 < 쏘아 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를 만들며 일본감독연맹으로부터 신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전문 영화감독이 아닌 TV 드라마 PD가 이 상을 받은 것은 당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1994년<언두>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와이 슌지 감독은 1995년 자신이 썼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러브레터>를 선보이며 단숨에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러브레터>는 1998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에 이어 일본문화개봉 이후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한 두 번째 작품이었다. <하나비>가 서울 관객 3만7000명으로 외면을 받은 것에 비해 <러브레터>는 세기말과 새천년의 겨울을 수놓으며 큰 사랑을 받았다.

<러브레터>를 기점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감독이 됐다. <러브레터>의 인기에 힘입어 2000년4월에는 1998년 작품이었던 <4월 이야기>가 개봉했다. <4월 이야기>는 <러브레터>와 무관한 작품임에도 한국 관객들에게 <러브레터>의 속편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연출과 각본,제작,편집,음악까지 담당한 <하나와 앨리스>가 개봉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는 작품의 색깔에 따라 '화이트 이와이'와 '블랙 이와이'로 특징이 구분됐다. 실제로 <러브레터>를 비롯해 <4월이야기> <하나와 앨리스> 등이 전형적인 일본식 감성 멜로라면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피크닉> 등은 작품의 색깔이 상당히 무겁다. 대중들에겐 당연히 '화이트 이와이' 작품들이 더 유명하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은 자신의 유작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고르고 싶다고 할 만큼 '블랙 이와이'에도 애정을 보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해외 제작사들과의 협업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2017년 한국에서 제작한 배두나와 고 김주혁 주연의 단편 영화 <장옥의 편지>를 만들었고 2018년엔 <첨밀밀>로 유명한 진가신 감독이 제작한 중일 합작영화 <안녕, 지화>를 연출했다. 그리고 2020년에는 <러브레터>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라스트 레터>를 선보이며 <러브레터>의 겨울을 기억하는 관객들을 추억 속으로 초대했다.

22년째 일본 실사영화 최다관객 보유
 
 <러브레터>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여러 매체를 통해 수 차례 패러디될 정도로 유명하다.

<러브레터>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여러 매체를 통해 수 차례 패러디될 정도로 유명하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러브레터>는 이미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되기 전, '어둠의 경로'를 통해 무려 30만 개의 불법 비디오가 유통됐다고 알려질 정도로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영화'였다. 따라서 정식으로 개봉을 한다 해도 극장 수익은 크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러브레터>는 멀티 플렉스도 많지 않던 90년대 후반에 서울에서만 64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러브레터>는 현재까지 한국에서 개봉한 모든 일본 영화 중에서 6위의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5위까지의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일본 영화들은 모두 실사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들이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벼랑 위의 포뇨> <너의 이름은>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러브레터>는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6번이나 재개봉 됐을 정도로 한국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영화의 인기와 함께 이츠키가 모교 운동장 사진을 히로코(이상 나키야마 미호 분)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즉석 카메라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핸드폰 카메라의 성능이 워낙 좋아져 필름카메라도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지만 즉석카메라는 여전히 영화나 CF 등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러브레터>에서 힘들게 띄워 놓은 폴라로이드는 22년 후 <범죄도시> 마석두 형사(마동서 분)에 의해 '프로보이드'로 전락했다.

<러브레터>의 최고 명장면이 뭐냐고 100명의 관객에게 물어보면 아마 101명 정도는 히로코(나키야마 미호 분)가 눈밭에서 하늘을 향해 남자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 분)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러브레터>를 보지 않은 사람도 "오겡끼데스카! 아타시와 겡끼데스!"라는 대사는 알았을 정도. 심지어 2004년 국내에서 <러브레터>더빙판을 방영할 때도 '오겡끼데스카' 장면은 일본어 그대로 내보내고 자막을 띄우기도 했다.

<러브레터>의 명장면은 워낙 유명해 한국의 K-팝 스타들도 많이 패러디했다. 2001년 핑클의 성유리는 <당신은 모르실거야> 뮤직비디오에서 중간에 뜬금없이 "잘 지내고 계신 거죠?"를 외쳤고 트와이스 역시 < Cheer Up >과 < What is Love? >의 뮤직비디오에서 <러브레터>의 명장면을 패러디했다. 하지만 <러브레터>를 잘 모르는 일부 일본팬들은 <러브레터> 패러디를 보며 한국 드라마를 따라 한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이돌 가수에서 <러브레터>의 히로인으로
 
 히로코의 현 남자친구 아키바를 연기한 토요카와 에츠시는 일본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히로코의 현 남자친구 아키바를 연기한 토요카와 에츠시는 일본 아카데미에서 두 번이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을동화>의 송혜교처럼 멜로영화나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인기스타로 도약하는 경우가 많다. <러브레터>에서 이츠키와 히로코를 동시에 연기했던 나카야마 미호 역시 <러브레터> 이후 국내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실제로 나카야마는 <러브레터>에서 청순한 연기를 통해 많은 남성관객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녀가 영화 속에서 이츠카의 안부를 물을 땐 남성 관객들도 속으로 함께 "오겡끼데스카"를 외쳤다.

1982년 모델로 데뷔해 1985년부터 아이돌 가수로도 활동했던 나카야마는 싱글과 정규앨범을 포함해 170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량을 기록했고 배우로도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었다. 지난 2010년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연출했던 이재한 감독의 <사요나라 이츠카>에 출연했고 2020년에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에 출연하며 이와이 슌지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러브레터>에서 히로코의 현재 남자친구 아키바 역은 186cm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배우 토요카와 에츠시가 연기했다. 아키바는 여자친구인 히로코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옛 남자친구 이츠키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의 추억이 있는 곳을 함께 방문한다. 히로코가 눈밭에서 "오겡끼데스카"를 외치며 다른 남자를 그리워 할 때도 아키바는 한 발 멀리서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1991년 <12명의 마음 약한 일본인>을 통해 주목 받은 토요카와는 슌지 감독의 영화 데뷔작 <언두>에서도 주연을 맡은 바 있다. 2003년에는 <생명>, 2011년에는 <필사의 검 토리사시>를 통해 두 차례 일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토요카와는 지난 2019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미드웨이>에서 일본의 해군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연기하며 50대 중·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러브레터 이와이 슌지 감독 나카야마 미호 토요카와 에츠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