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포스터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1620년 11월 21일, 대서양을 건너온 배 한 척이 북미대륙 동쪽 해안에 닻을 내렸다. 영국 플리머스에서 출항한지 66일째 되던 날이었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목적은 종교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떠나온 102명의 승객을 북미대륙까지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첫 겨울은 유난히도 가혹했다. 추위와 배고픔, 질병이 그들 가운데 절반의 생명을 앗아갔다. 원주민들로부터 옥수수 재배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이들 가운데 가장 건강한 자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는 십 수 년에 걸친 청교도 이주행렬의 시작이었다. 정착이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수많은 영국인들이 연이어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듬해인 1621년에는 32명의 청교도가 이들과 합류했고 1623년에는 100여명, 1630년에는 1000명이 넘는 이민자가 북미대륙에 발을 디뎠다. 이후 10년 동안 1만8000여명의 영국인이 북미에 도착했으니 150여년 뒤 독립을 이룬 미국의 역사가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신작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청교도의 이주와 서부개척, 그 사이에 놓여 좀처럼 주목받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17, 18세기는 청교도 이주민의 북미 정착과 독립전쟁이 있었고 19세기 말은 남북전쟁부터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과 대륙횡단철도 개통, 본격적인 서부개척이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다. 200여년에 걸친 시간 동안 원주민들은 백인 이주민에게 살육당하거나 자신의 땅에서 내몰려 비좁은 보호구역 안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북미는 그렇게 백인의 것이 되었다.

복수극 혹은 생존극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첫 오스카를 안길 수 있을까?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첫 오스카를 안길 수 있을까?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의 배경인 19세기 초반은 미국 역사는 물론 영화나 소설 등에서도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시기다. 미개척지 곳곳에서 원주민과 백인 군대 사이에 살육전이 펼쳐졌고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프랑스 등 외국군도 진주해있었으며 용병에 가까운 형태의 군대가 물소 등 동물을 사냥해 그 가죽을 유럽에 파는 형태의 무역도 이뤄졌다.

1820년 회색 곰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은 사냥꾼 휴 글래스가 수백 킬로미터를 기어간 끝에 자신을 버리고 간 동료들에 책임을 물은 일화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레버넌트>는 복수극인 동시에 생존기다. 복수극인 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악당을 처단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를 뒤쫓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존기인 건 척박한 환경 가운데 성치 못한 몸으로 내던져진 주인공이 살아남는 과정이 담겼기 때문이다. 2시간 30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마주하는 건 오로지 복수와 생존이며, 빛나는 건 이를 표현한 디카프리오의 처절함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감독 이냐리투가 말하고자 하는 게 주요 서사가 아닌 상징과 디테일에 있는 듯도 하다. 의도 없는 대사처럼 의미 없는 배경인 듯 그렇게 지나치지만, 찬찬히 생각하다 보면 수면 위로 본래의 뜻이 떠오르는 그런 장면 말이다.

세 번 등장한 기독교적 상징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역을 맡아 유명세를 탄 이후 할리우드 유명 작품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돔놀 글리슨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역을 맡아 유명세를 탄 이후 할리우드 유명 작품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돔놀 글리슨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엔 기독교적 상징이 모두 세 차례 등장한다. 하나는 피츠제럴드가 휴 글래스를 죽이려던 장면에서 내뱉는 대사이고 둘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한 피츠제럴드 일행이 하룻밤 머문 동굴의 벽화이며 셋은 휴 글래스의 상상 속에서 등장하는 무너진 교회 터다.

감독은 얼핏 중요하지 않게 지나치는 이와 같은 장면들을 통해 복수와 생존이라는 주요 줄기보다도 무겁고 중한 이야기를 전한다. 청교도들이 새로운 땅에 세우려 노력한 기독교적 가치들이 무너져 내린 자리, 그 위에서 자행된 탐욕에 찌든 폭력 말이다.

약자를 살해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비겁자의 입에서 신의 이름이 불리고 청교도들이 남긴 벽화는 버려져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며 한 때는 신앙이 움텄을 교회도 무너진 채 터만 남아있는 시대, 영화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와 같은 부분들이 아닐는지.

이냐리투가 이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건 미국이 어떤 역사 위에 세워졌느냐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휴 글래스의 인간승리나 부성애의 위대함이 아닌 미국 초창기의 역사, 그들이 자랑해마지않는 청교도적 가치가 무너진 시대의 적나라한 폭력을 영상화함으로써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그들의 맨 얼굴을 들춰 보여주는 것이 이 위대한 감독의 진의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이 영화를 보았다. 비록 영화가 그 뜻을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와 <빅 이슈>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김성호의 씨네만세 빅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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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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