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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보다 소문을 먼저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소문은 이렇다. 학생이 경찰서에 교사를 신고하는 일이 잦다는 것, 친구들과 관계가 원만치 않아 민원이 발생하여 그 처리 때문에 힘들다는 것, 문제 행동이 심각하다는 것 등이다. 대체로 그 소문의 내용은 부정적이다.

소문은 특수학급에서 특수학교로(혹은 그 반대로), 특수학교의 학급에서 학급으로 교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 소문은 사실일 때도 있고, 사실과 다를 때도 있다. 필자는 소문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소문이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장애를 겪는 학생과 관련된 소문은, 교사가 학생을 '있는 그대로' 알기도 전에,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한다. 학생을 만나기도 전에 소문이 덕지덕지 붙은 시선으로 학생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교 후에 어린 학생을 위협하여 돈을 뺏는다는 학생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로 전학을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대로 그 학생이 왔다. 나는 그 학생이 새로운 물건을 가지고 학교에 왔을 때, 의심의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갑자기, 순식간에 친구를 때린다는 학생이 전학을 왔을 때 나는 그 교실에 들어갈 때마다 그 학생을 경계하곤 했다. 혹시나 내가 맞지 않을까 싶어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 말이다. 나는 그렇게 교사의 품위를 잃었다.

사실, 학교라는 공동체는 시대에 따라 그 폭이 다르긴 하지만 합의된 기준에 맞추어 생활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서툰 학생은 그 합의된 기준에 생소한 행동으로, 다소 거칠게 온몸으로 맞서기도 한다.

소위, 소문을 달고 온 학생의 '문제'는 소문 자체가 아니라, 그 소문이 장애를 겪는 학생의 진면목을 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소문은 학교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학생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몸부림의 단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학교에 적응을 잘하고 교사의 기대에 부응하고, 친구들과 관계가 아주 원만하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포기한 비싼 대가(에리히 프롬)"임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교사의 눈에 매우 모범적 학생으로 보일지라도 세심하게 보살펴야 하는 이유다.

'소문'이라는 벽을 넘어서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내 말로 다시 쓰면, 소문이 붙은 시선을 제쳐두는 것은 교사 자신을 개방하여 학생과 관계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소문의 끈을 끊어버리고 나면, 학생의 소소한 이야기에 귀가 열리기도 한다. 내가 '문제가 많은 특별 관심 대상 학생'이라는 소문으로 먼저 만났지만 기억에 남는 학생이 한 명 있다. 그 학생은 유머가 있었다. 또한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에 자신의 느낌을 거침없이 말했다. 내가 수업 중에 "아이고~ "하면 "어디 가세요?"라고 유머로 응대했다. "야~아~ 영어도 잘하네" 하면, "그거 저를 무시하는 발언 아니에요?"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느 날, 점심을 못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그 학생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선생님! 식사를 안 하시면 어떡해요?"
"오늘 일이 많아서 굶을 생각이었는데..."

"전화도 안 받으시고..."
"전화했어? 아~ 수업 들어갈 때 무음으로 해 둬서 몰랐네"

"이거 드시고 하세요."
"그게 뭔데?"

"오늘 점심 때 밥과 같이 나온 빵과 과일이에요."
"그래? 고맙다."


들려오는 소문을 막을 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교사로서 학생을 만날 때 들려오는 소문을 내려놓고, 학생에 대한 내 판단을 미루려는 노력은 할 수 있다. 소문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 벽이 된다. 그 벽은 교사와 학생의 만남에 선을 긋는다.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소문을 넘어서는 일이다. 소문을 넘어서야 함께 성장하는, 품위 있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문제행동#도전행동#특수교육#교사와학생의관계#긍정적행동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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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 교사이며,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휠체어를 탑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말을 글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장애를 겪으며 사는 내 삶과 교육 현장을 연결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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