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나가 다양한 나라들을 돌아보다 보면 한국이 참으로 독특한 나라란 걸 실감하게 된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이를 낳지 않고, 또 서른을 훌쩍 넘겨서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하며, 거의 전 국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수가 대도시적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그렇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한국이 서울에 집중된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일 테다. 한국의 인구밀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기한 지도에선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텅 빈 모습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제2의 도시라는 부산마저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년들이 떠나가는 형편이다. 하물며 중소도시의 사정이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지방 도시가 놓인 처지란 딱하기 그지없다. 인구는 줄고 그나마도 노화가 심각하며 재정자립도 또한 위험 수준이다. 열악한 사정 가운데 중앙정부가 결정한 복지정책을 집행하고 나면, 자체 예산으로는 정책이랄 걸 펼쳐볼 수도 없다는 볼 멘 소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갈수록 죽어가는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태어나길 바라는 것도 무리라지만 한국 영화와 소설 가운데 지방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점점 찾기 어렵게 된다는 건 이러한 이유라 하겠다.
 
창밖은 겨울 포스터

▲ 창밖은 겨울 포스터 ⓒ ㈜영화사 진진

 
경남 진해에서 사는 청년의 삶
 
<창밖은 겨울>은 근래 흔치 않은 지방 배경의 영화다. 경상남도 진해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는 청년 석우(곽민규 분)와 터미널 매표소 직원 영애(한선화 분)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 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석우는 작품이 잘 되지 않자 고향인 진해로 낙향하여 버스기사로 취업한다. 영화 촬영차 대형면허를 따둔 것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한때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과정에서 애인과도 이별을 고하게 된다. 석우와 마찬가지로 영화일을 했던 그녀는 아직도 계속 영화판에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고향으로 와서는 영화판을 쳐다보지도 않는 석우가 그녀의 소식을 알 리가 없다.
 
석우의 삶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여 버스를 운행하고, 다른 기사들과 점심을 먹고는 탁구장에 가서 점수표를 넘긴다. 그러다가 다시 오후 근무를 하고 때가 되면 퇴근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부모님과 함께 산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살가운 아들도 아니다. 젊은이가 많지 않은 진해에서 저보다 훨씬 나이든 기사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 유쾌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가.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낯익은 뒷모습, 그녀가 놓고간 MP3
 
그러던 어느 날이다. 운행을 마치고 터미널에 들어선 석우의 눈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눈을 뗀 사이, 그녀가 사라졌다. 여자가 떠난 터미널 대합실 자리엔 MP3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석우는 이게 분실물이라 생각하고 챙겨 터미널 분실물 담당자에게 건넨다. 그 담당자가 바로 매표소 직원 영애다.
 
시대가 어느 때인가. MP3는 과거의 유물로 남겨진 지 오래다. 아이팟을 넘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전화는 물론 음악까지 듣는 것이 기본이 된 세상이다. MP3가 CD플레이어를, 또 CD플레이어가 그 전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대체했듯이 MP3도 쓰는 이 없는 물건이 된 지 오래다.
 
영애는 MP3는 분실물이 아니라 누군가가 버린 것일 거라고 말하지만 석우는 어쩌면 주인이 찾으러 올 거라며 수시로 그녀를 찾아 누군가 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없다. 영애는 유실물 관리대장을 펼쳐들어 잃어버린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오지 않으면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석우는 주인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서툴러서 낯선 소도시의 로맨스
 
답답한 구석이 있는 석우에게 영애가 묘한 감정을 품는 건 그때부터다. 도대체 왜 켜지지도 않는 MP3의 주인을 찾겠다고 저 난리를 피우는 건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조금씩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는 기사들만 이용하던 휴게실에 영애가 나타나 화려한 탁구솜씨를 뽐내더니, 마침내 석우와 조를 이뤄 운수회사들이 주최한 탁구대회까지 나가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탁구연습을 하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근래 로맨스 영화에선 보기 드문 잔잔한 연출 가운데 그려진다.
 
<창밖은 겨울>은 경남의 작은 도시 진해를 배경으로 한다. 이제는 마산과 함께 창원에 통합돼 창원시 진해구가 된 이 작은 도시가 영화가 펼쳐지는 배경이다. 러닝타임 내내 등장하는 인물이 몇 되지 않고, 쇠락한 구도심의 황량한 풍경이 마음을 헛헛하게 만든다. 석우가 모는 버스도 대부분은 텅 빈 채로 운행되기 일쑤, 매일 점심시간 기사들이 탁구를 치는 그 모습이 그나마 활기를 불어넣을 정도다.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한국영화에서 찾기 힘든 지방의 목소리
 
언제나 화려하고 무언가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되는 영화 속에서 이토록 텅 빈 듯한 헛헛함을 마주하게 되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한국 영화에서 점점 더 지방도시가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과 전주, 강릉과 무주 등 영화제가 있는 도시 정도가 그나마 지원을 받아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그리하여 한국영화에서 진해와 같은 곳이 이처럼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일을 귀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창밖은 겨울>은 여러모로 근래 보기 드문 로맨스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하지 않은 속도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평소 잊고 있었던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선 자리에서 다른 무엇을 보게 마련이다. 선 곳이 달라지면 다른 시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진해에서의 삶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온통 빠른 것들 가운데 치여 있던 지친 마음이 조금쯤 여유를 갖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위안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고는 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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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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