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나는 FC서울의 팬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1에 소속된 이 팀은 2004년부터 상암월드컵경기장을 홈으로 쓰며 서울의 제일가는 팀으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창단부터 이 팀을 우리 팀으로 여기며 그 역사를 함께해 왔다.

그러나 가끔은, 아주 가끔은 우리 팀이 민망해질 때가 있다. 그건 마치 한국을 사랑하는 한 명의 시민이면서도 이 나라가 다른 나라의 섬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다 적발되었다거나, 먼바다에서 불법어업을 저지르다 국제기구로부터 IUU(Illegal Unreported and Unregulated fishing. 불법, 비보고, 비규제 어업) 적발국으로 지정됐다거나 하는 소식을 접할 때 느끼는 종류의 것이다.
 
FC서울은 스스로 그 창단의 역사를 2004년이 아닌 1983년이라고 말한다. 한국 프로축구팀 중 다섯 번째로 출범한 럭키금성 황소 축구단이 제 모태라는 것이다. LG와 GS그룹의 전신인 럭키금성그룹이 설립한 축구단으로 충청도부터 서울을 거쳐 1996년 안양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K리그가 오늘의 프로리그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안양 LG 치타스라는 이름으로 전성기를 보냈고, 최용수부터 서정원, 신의손, 이영표, 안드레 등 스타 플레이어를 여럿 배출했다.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FC서울과 FC안양 서포터의 특별한 관계
 
문제는 이 팀이 오늘의 FC서울에 이르는 과정에 있다. 안양을 연고지로 하던 치타스가 공석이던 서울로 연고를 옮기는 과정에서 안양 팬들을 깡그리 등진 것이다. 팬들의 응원을 근간으로 성립하는 프로스포츠팀이 연고를 이전한다는 데야 어느 팬이 환영을 하겠느냐만 이때는 그 정도가 심했다. 리그에서 손꼽히는 인기팀이 한순간에 서울로 새 둥지를 틀기까지 팬들을 설득하고 달래는 작업은 전혀 없었다. 서울에 팀을 창단할 기업을 유치하는 데 실패한 연맹의 수완부족과 제 팬을 가볍게 등진 기업 주도 구단의 결정이 빚은 참극이었다.
 
그럼에도 이 팀은 제 역사를 198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연고도 바뀌고 팬들도 바뀌었지만 모기업은 그대로니 같은 팀이라는 얘기다. 프로스포츠팀이 팬과 연고를 우습게 아는 이 같은 모습이 팀을 응원하는 나 같은 이에게도 민망하게 다가올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FC서울을 적대하는 다른 팀 서포터들은 우리 팀을 가리켜 북패(북방의 패륜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뒤틀린 역사가 낳은 참극에 얼굴을 붉히는 건 기업이 아닌 새로운 팬들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가 국가와 같은 단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말 또한 민족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테다. 말하자면 역사를 잊은 리그며 클럽, 팬들에게도 미래는 없는 것이다. K리그 팬들이 안양 LG 치타스의 연고 이전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 사건을 그저 흘려보냈기에 부천 SK의 제주 이전 같은 유사한 문제가 거듭 발생한 것이 아닌가. 제때 청산하고 심판하지 못한 역사는 반복될 밖에 없는 법이다.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안양 LG 치타스가 버린 팬들의 시간
 
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출품된 <수카바티>는 팀을 잃어버린 안양 서포터즈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다. K리그 서포터 문화의 태동부터 안양 LG 치타스의 전성기, 그 충격적 이전과 투쟁, K리그2 FC 안양의 창단까지를 다뤘다. 2000여 명에 이르는 안양 서포터 'A.S.U. RED(아래 레드)'를 구성했던 핵심 멤버들의 이야기로부터 그들이 누린 영광과 고난, 재기의 과정을 차근히 따라간다.
 
제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쳐 팀을 응원했던 이들이다. 목 놓아 불렀고 마음 다해 사랑했다. 그랬던 팀이 한순간에 저를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그냥 그렇게 됐다는 뒤늦은 통보에 상실과 분노를 한꺼번에 마주했다.
 
팀의 이전 뒤 일어난 팬들의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릴레이시위부터 경기장 난입, 항의표명 등으로 이어진 저항은 차라리 성숙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연맹이며 팀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지만 차라리 바위가 더러워지기만 바랐다던 어느 팬의 회상이 꼭 그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이들은 제 삶을 던져 바위를 더럽히려 했고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 어떤 이는 떠나가길 선택했고 어떤 이는 잊기를 택했다. 그러나 떠나지도 잊지도 못하는 이도 있는 법이다. 애정이 상실로, 분노로, 무력감으로, 우울로 변하는 과정을 그대로 감당한 이들이 카메라 앞에 서서 제 삶을 돌아본다. 누가 있어 감히 이들에게 고작 공놀이에 삶을 거느냐고 말할 수 있을까. 축구와 서포터와 낭만을 아는 이라면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FC 안양 엠블럼

FC 안양 엠블럼 ⓒ FC안양

 
그러나 레드는 주저앉지 않았다
 
놀라운 건 다음이다. 이들은 그저 주저앉지 않았다. 제게 힘이 없어 당했다는 적확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힘을 모아 새 팀을 창단하자는 발전적 미래를 그린다. 시장 후보에게 입장을 전달하고 시의회를 압박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제 팀을 다시 세운다.

오늘의 FC안양이 바로 그 팀이다. 온갖 어려움 끝에 단 몇 표 차이로 안양에 안양 시민들의 팀을 만든다. 팀 창단의 주역인 레드는 그 이름 그대로 보랏빛 유니폼을 입은 FC안양의 서포터가 되었다.
 
중국 옛 성어인 홍득발자(红得发紫)를 새로 해석하여 '아주 붉은 것은 이미 보라색이다'라고 풀었다. 안양 LG 치타스의 상징색이었고 이제는 FC서울의 상징이 된 붉은색과 FC안양의 빛깔인 보라색의 관계로부터 이 같은 명문을 뽑아낸 것이다. 보라는 붉음이 될 수 없지만 그 보라 안에는 붉음보다 더 붉음이 있다는 역설이 이 영화의 끝에서 해소된다.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영화 <수카바티> 스틸컷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힘을 내라 보라돌이, 1부에서 만나자!
 
<수카바티>는 이제껏 나온 한국 축구 다큐멘터리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할 작품이다. 축구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지 못했으나 프로축구의 근간을 이루는 팬들의 관점에서, 연맹과 팀이 외면해 온 중요한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로부터 축구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저 기업과 이해득실을 넘어 존재하는 가치를 되새긴다. 그건 축구를 즐기는 이들의 삶이며 혼에 대한 것이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조광래, 최용수, 이영표 등 안양 LG 치타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현재까지 한국 축구의 중심에 선 이들의 인터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제작진은 영화제 상영 뒤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몇몇 이들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긍정적인 답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축구사에 빼놓을 수 없는 과오를 이야기하는데 축구인들의 이야기가 거의 담기지 못했다는 점은 한국축구가 저들이 써온 역사를 여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영화는 선호빈과 나바루, 두 명의 감독이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두 감독은 제작 과정부터 수차례 다툼을 벌였다고 했다. 선호빈은 이 영화를 인간과 문화에 대한 것으로 찍으려 했고, 나바루는 축구와 서포터에 대한 것으로 찍고자 했다고 전한다. 영화는 서로 다른 성향의 뱃사공이 두 명일 때 나타날 수 있는 긍정적 효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사람과 문화와 축구와 서포터가 적절히 어우러졌다는 뜻이다. 그 이상이었다면 더 좋았겠으나 이 정도만으로도 썩 괜찮은 다큐멘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이 글을 적는 나는 FC서울의 팬이다. 나는 저들이 스스로 레드라고 칭하는 서포터들을 그저 보라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들이 언젠가 반드시 K리그1으로 승격하여 FC서울 앞에서 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내기를 바란다. 이 영화는 그 대면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럼, 보라돌이들의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FC안양 레드 수카바티 선우빈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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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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