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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 이순신 장군 동상. 진도 녹진 관광단지에 서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는 이순신 장군 동상. 진도 녹진 관광단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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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순신 장군을 꼽는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불패' 신화의 상징으로 꼽힌다. 명량대첩은 1597년 조선수군과 전라도민이 일본군에 맞서 울돌목에서 대승을 거둔 전투를 일컫는다. 때마침 명량대첩축제도 열린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을 기념하는 축제다.

명량대첩축제는 9월 8일부터 10일까지 해남과 진도 사이로 흐르는 울돌목 일원에서 열린다. 최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미디어 해전 재현, 드론 300여 대를 활용한 일자진 쇼, 해군 해상 퍼레이드, 수문장 교대식, 약무호남 제례 등이 펼쳐진다. 우수영 강강술래 등 볼거리와 저잣거리 체험 등 즐길거리도 준비된다.
  
지난해 명량대첩 축제에서의 해상 퍼레이드 장면. 올 축제는 9월 8일부터 10일까지 해남과 진도 사이로 흐르는 울돌목 일원에서 열린다.
 지난해 명량대첩 축제에서의 해상 퍼레이드 장면. 올 축제는 9월 8일부터 10일까지 해남과 진도 사이로 흐르는 울돌목 일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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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의 야경. 경간과 경간 사이가 1545m로 만들어져 있다. 이순신의 출생 년도를 상징하고 있다.
 광양과 여수를 잇는 이순신대교의 야경. 경간과 경간 사이가 1545m로 만들어져 있다. 이순신의 출생 년도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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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여수와 광양을 잇는 다리의 이름이 '이순신대교'로 붙여져 있다. 대교의 경간과 경간 사이를 1545m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다. 이순신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인 상주 방씨와 21살 때 혼인했다. 장인의 전폭적인 격려와 후원을 받으며 무예를 닦았다. 장인과 장모가 세상을 떠나고, 처가(충남 아산)를 본가로 삼았다. 묘도 아산에 있다.

이순신은 전라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인다. 전라남도에서도 이순신 장군 유적 명소화 사업을 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사업은 성웅 이순신의 업적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주역이었던 호남민중의 역할을 다시 조명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 재건길 여정도. 진주에서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진다. 50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 재건길 여정도. 진주에서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진다. 50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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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재란 때다. 이순신이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됐다가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한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 12척만 겨우 살아남는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제3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전라도 일대에서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울돌목에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기까지의 여정이 '조선수군 재건길'이다.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출발한 길은 구례, 곡성, 순천, 보성, 장흥, 해남, 진도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호남민중들이 큰 역할을 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은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됐다. 일본군이 뒤쫓아 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군사와 군기, 군량을 모으고 전함을 복원한다. 경남과 전남의 도계에 있는 석주관에서 구례읍-구례구-압록을 거쳐 옥과-곡성-순천-보성-장흥으로 이어진다. 이순신은 구례현청과 옥과현청, 곡성군청에 들러 체찰사와 군자감 등을 만나 전황을 파악하고, 군사를 모은다.
  
구례에 있는 정유재란 승전공원. 명량대첩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출정식이 여기에서 열린다.
 구례에 있는 정유재란 승전공원. 명량대첩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출정식이 여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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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사무소 전경.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이순신 장군이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모정(명협정)도 복원돼 있다.
 구례읍사무소 전경. 정유재란 당시 구례현청이 있던 자리다. 이순신 장군이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모정(명협정)도 복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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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구례에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군자감 손인필이다. 구례읍에 있는 손인필 비각을 중심으로 정유재란 승전공원이 조성돼 있다. 해마다 명량대첩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출정식을 여기에서 한다. 조선수군 재건이 지리산 자락에서 시작됐음을 공표하는 셈이다.

구례현청이 있던, 지금의 구례읍사무소 자리엔 당시 상황을 묵묵히 지켜봤을 500년 넘은 느릅나무와 왕버들나무 고목이 서 있다.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구례현청의 모정(명협정)도 복원돼 있다. 석주관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군관과 의병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이원춘 현감과 왕득인 등 일곱 의사의 무덤과 추모비도 그 앞에 있다.
  
보성 이순신 공원.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쓴 보성군청 자리에 만들었다. 가까운 데에 열선루도 복원했다.
 보성 이순신 공원. 이순신 장군이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장계를 쓴 보성군청 자리에 만들었다. 가까운 데에 열선루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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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순천에서 대포와 화약, 여러 종류의 화살을 구한다. 당시 순천부에는 둘레 1025m, 높이 3.6m의 석성이 있었다. 지금의 순천시내 중앙로다. 여기에 순천부읍성의 동서남북 성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순천 영동의 옛 승주군청 자리에는 이순신 장군과 만났을 수령 500년의 푸조나무 고목이 서 있다. 낙안읍성에는 이순신이 직접 심었다는 푸조나무가 객사 뒤에 있다.

이순신은 보성에서 군량미를 다량 확보했다. 이순신 일행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이 당시 조양창이 있던 조성면의 고내마을과 득량면 다전마을 양산항의 집이다. 득량(得糧)이란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말은 보성에서 나왔다. 2021년 도쿄올림픽 때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있다'는 패러디가 나왔을 정도다. '신에게는 아직 12㎏의 지방이 남아있다'는 다이어트 자극 문구도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이순신의 편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임금한테 한 말이었다.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선 절규였다. 이 장계를 쓴 곳이 보성 열선루다. 지금의 보성군청 자리다. 보성군은 군청 옆에 이순신 공원을 만들고, 열선루를 복원했다.
  
보성 고내마을 풍경.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당시 조양창 터로 가는 길목이다.
 보성 고내마을 풍경.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당시 조양창 터로 가는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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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다전마을 양산항의 집 터.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 가운데 하나다.
 보성 다전마을 양산항의 집 터.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다량 확보한 곳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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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이 이끌고 있던 조선함대를 찾아 배를 타고 간 곳은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이다. 이순신이 배를 타고 찾아간 곳은 회령포였다. 지금의 장흥군 회진항이다. 이순신은 여기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조선함대 12척을 인계받아 거북 모양의 구선(龜船)으로 개조를 한다. 사다리를 타고 뱃머리로 올라와 싸우는 일본군의 백병전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다.

장흥 회진에 회령진 역사공원이 조성돼 있다. 당시 회령진성의 흔적도 남아있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출정식을 갖고 바다로 나아간다. 회령포에서 9월 1일부터 사흘 동안 '회령포 이순신축제'가 열린다.

'12척의 판옥선! 회령포 시간여행'을 주제로 한 축제는 12척 해상퍼레이드, 삼도수군통제사 입성식, 회령포 결의, 출정식 등으로 진행된다. 판옥선 노젓기 대회, 전통무예 시연, 전통예술 공연, 회령포 역사여행, 조선수군 체험 등도 마련된다.
  
장흥 회령진 역사공원 전경.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서 공식 출정식을 갖고 바다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9월 1일부터 사흘 동안 ‘회령포 이순신축제’가 열린다.
 장흥 회령진 역사공원 전경. 이순신 장군은 여기에서 공식 출정식을 갖고 바다로 나아간다. 이곳에서 9월 1일부터 사흘 동안 ‘회령포 이순신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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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나아간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바닷길을 따라 해남으로 향한다. 해남은 울돌목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순신은 해남 이진, 어란진을 거쳐 진도 벽파진으로 간다. 어란진에선 정탐 나온 일본군과 땅끝 앞바다까지 추격전을 벌인다. 벽파진에 머물 땐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한밤중에 공방전을 벌이기도 한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옮긴다. 이순신은 울돌목을 등진 싸움이 어렵고, 강한 해류를 이용하면 일본군이 쉽게 진격하지 못할 것으로 봤다.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울돌목의 좁은 바닷길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도 내렸다.

우수영에 통제영을 설치한 이순신은 조선수군과 함께 울돌목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각오로 싸워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호남민중들의 목숨을 건 도움은 전쟁의 동력이 됐고, 승리의 토대가 됐다.
  
울돌목을 가로질러 놓인 진도대교와 우수영 풍경.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벽파진에서 이곳 해남 우수영으로 옮긴다.
 울돌목을 가로질러 놓인 진도대교와 우수영 풍경.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벽파진에서 이곳 해남 우수영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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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에 설치된 해남 스카이워크. 관광객이 바다 위에서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울돌목에 설치된 해남 스카이워크. 관광객이 바다 위에서 울돌목의 거센 물살을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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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의 현장인 해남과 진도에 당시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대부터 한·중·일이 만나는 국제 해상로였고, 제주도 해로와 조운로의 중간 기착지였던 어란진에는 만호진성이 있었다. 우수영에는 옛 우수영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수영대첩비도 세워져 있다.

진도에는 명량대첩 때 순절한 군사와 지역주민의 무덤인 정유재란 순절묘역이 고군면 도평리에 있다. 명량대첩 이후 바닷가에 밀려온 일본군의 주검을, 주민들이 거둬 묻어준 왜덕산은 고군면 내동리에 있다. 벽파항에는 한국전쟁 직후 진도군민과 교직원들의 성금으로 세운 이충무공전첩비가 있다. 벽파정도 복원돼 있다.
  
울돌목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이순신 상. 해남 우수영 앞바다에 세워져 있다.
 울돌목을 바라보며 고뇌하는 이순신 상. 해남 우수영 앞바다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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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선수군재건로, #조선수군재건길, #명량대첩, #이순신장군,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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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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