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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애국지사들 중에는 국민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각급 학교를 세우는 이들이 많았다.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인재양성을 위해 정주의 오산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서울의 협성학교를 비롯해 각지에 학교를 세웠던 것처럼, 개인과 단체들이 학교를 세우고 가르쳤다.

이종일은 개화의 방법론으로 신문을 발행한 데 이어 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신문명과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1894년 보성보통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고종 때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 소학교·중학교·전문학교를 나누어 보성학원을 설립한 학교이다.

보성학원을 세운 이는 이용익이었으나 후견인은 고종이었다. 일제가 1906년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보성학원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주인이 없는 보성학원을 이끌고 있던 윤익선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찾아와 지원을 간청하여 간신히 살려냈다. 현 고려대학의 전신이다. 이종일은 이 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

이종일은 1898년 11월 민영환·임병구·한우·정교 등과 함께 사립홍화학교를 설립하였다. 1902년 2월에는 김가진·지석영·이재각·조동완 등과 국문학교(國文學校)를 설립하였으며, 한강 한남학교(漢南學校)의 건립을 협찬하는 등 학교 건립에 열심이었다. (주석 51)
 
묵암 이종일 선생
 묵암 이종일 선생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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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직접 학교에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국사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애국심을 일깨웠다.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병도(李丙燾)의 회고이다.

이종일 선생은 나의 은사이었다. 내가 어려서 공부하던 보광학교(창덕궁 앞)의 교장이었다. 가끔 그 분의 훈화와 또 국사의 강의도 들은 기억이 난다. 이 학교는 지금의 초등학교 정도지만, 어떤 과목은 중학교와 같았다. 더욱이 한문에 있어서는 글방 아이들을 모아다 놓은 만큼 정도가 지금의 대학생보다 높았다.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와 훤칠한 키에, 한복 차림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그분은 다른 일에도 바빴던 모양이나 학교에도 자주 나오셨다. 나는 어린시절이기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위대한 선각자임은 알지 못하였다. 내가 국사를 전공하고 또 우연한 일이지만 옥파 기념사업회의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기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주석 52)

이종일은 여러 가지 일을 지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건강체였다. 이병도가 '낭랑한 목소리와 훤칠한 키'라고 회고했듯이 그는 육척장신이었다. 손녀 이장옥(李璋玉)이 증언한 바 "육척 장구의 거인이셨으며 한번 소리를 지르면 쩌렁쩌렁 온 동네에 메아리칠 정도"(주석 53)였다.

그는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그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제국신문>에 여러 차례 교육 관련 논설을 썼다.

①교육은 국가·문명 발달의 척도, 청국의 쇠퇴·일본 융성이 입증을 비롯, ②교육은 문명과 부강의 기틀, 통일성 있는 국가방침 긴요, ③학부는 의무교육 실시 천연 말라, 일부 지방의 천연소식 놀라운 일 등 수십 편에 달한다.(①②③은 필자가 편의상 붙인 것임)

지금 우리 동양의 한·일·청 3국은 인종도 같고 풍속도 비슷하게 살아왔다. 그중 청국은 나라가 크고 문물이 발달했으며 사람들도 외모가 당당하고 위엄을 갖추었건만 지금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국세가 혼란한 지경에 빠져 있다.

한편 일본은 조그만 섬나라이며 인구도 적고, 사람들 외양도 보잘 것 없지만 세계에서 몇 째 안에 드는 강국이 되어 동양을 지배하려 하고 있으니 이렇게 청·일이 차이가 난 원인이 바로 교육의 유무에 달려 있다.

한국과 청국은 그동안 학문에 힘쓰지 않았고 허세만 부려왔으나, 일본은 교육에 힘써 국민을 개명시키는 데에 노력했기 때문에 나라가 지금같이 부강해진 것이다. (주석 54) 

그는 학교를 많이 세워 인재를 키워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거듭해서 주장하였다. 젊은이들이 전문 교육을 받아 1명이 10명, 10명이 100명을 가르치도록 제의하고 매국단체 일진회의 학교설립을 경계했다.

지금 전국 공사립학교의 수효를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1백 45개교가 세워졌는데 일진회(一進會)가 설립한 것이 근 1백여 개교나 된다고 한다. 파종(播種)은 비록 얼마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수확이 가능하며 누룩이 비록 적다 해도 큰독 속의 술은 결국 양조(釀造)되는 법이니 지금은 비록 교과서의 내용이 간단하고 학생을 가르칠 인재가 적어서 교육의 성과를 크게 기대할 수는 없으나 근일과 같이 교육을 진작시켜 한결같이 힘써 나간다면 한 사람이 10명을 가르치고 10명이 백 명, 천 명을 가르친다면 멀지 않아 전 국민이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주석 55)

주석
51> 박걸순, 앞의 책, 28~29쪽.
52> 이병도, 「옥파 이종일 선생과 나」, 『옥파 이종일선생 논설집』, 권1, 577쪽, 1984.
53> 『묵암 이종일 선생, 경세의 위업과 생애』, 「손녀 이장옥여사가 말하는 조부 묵암선생」, 26쪽, 1979.
54> ①『제국신문』, 1900년 2월 21일자.
55> 앞의 신문, 1906년 3월 13일자.


 

태그:#이종일, #이종일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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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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