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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수학능력시험(수능)에 대해 한마디 했다.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하면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국어 영역의 비문학 지문 킬러 문항을 콕 집어 지적하기도 했다.

신문과 방송이 시끄러워졌다. 대통령이 수능 쉽게 출제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고도 하고 그게 아니라 교과서 내에서 출제하되 변별력을 갖추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도 했다.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말로 인해 교육 현장과 수험생들이 혼란에 빠졌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나는 지방 소도시의 일반계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학교와 학생들이 혼란에 빠졌겠다고? 아니다. 학교는 평온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왜냐고? 우리 학교의 경우 대학 진학에 있어서 수능이 그렇게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지금은 입시 지도를 직접 하고 있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입시 지도를 직접 했다. 그때 학생들에게 수능은 너희들 것이 아니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하긴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수능이 자신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수능은 특목고와 자사고와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대통령이 수능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다고 한들 우리가 눈 하나 까딱하겠는가?

우리 학교가 비록 지방 소도시에 있지만 대학 진학 실적이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다. 교육적으로 올바른 잣대는 아니지만 흔히 서울대 입학 인원을 기준으로 그해 입시 성적의 성패를 가늠한다. 작년에 서울대에 1명도 합격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재작년에 1명, 재재작년에 3명이 서울대에 합격했으니 지방 소도시에 있는 일반계 고등학교치고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우리 학교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학생들은 모두 수능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전형으로 서울대에 합격했다. 흔히 '지균'이라고 부르는 지역균형 전형으로 합격했다. 이 전형은 주로 내신 성적과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 그리고 면접으로 합격자를 선발하고 수능은 최저 기준만 충족하면 된다.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절에는 수능 3개 영역 등급 합 9 이내, 그 이후로는 3개 영역 등급 합 7 이내이면 최저 기준을 만족하게 되니 수능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전형이라 할 수 있으리라. 

또한 서울대를 제외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우리 학교 학생들 죄다 수능 최저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진학에 성공했다. 수능을 100% 반영하는 정시 전형이나 수능 최저 기준이 상당히 높은 학생부교과전형에 지원했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리라.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다른 일반계 고등학교들의 사정도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시 전형으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기이다. 2년 전쯤 지역 내 어느 학교의, 내신성적이 1.00에 수렴하고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이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평가받은 학생이 서울대 지역균형 전형에서 불합격한 사례가 있었다. 수능 3개 영역 등급 합 9 이내라는, 수능 최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형편이니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수능은 그저 '그들만의 리그'라고 할 만하다. 1학년 학생들에게 수능 공부의 중요성을 아무리 설파해도, 전국연합 학력평가 한두 번 보고 난 뒤 수능 공부를 접어버리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내신성적 관리와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을 위한 활동에 몰두한다. 교사들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 학교 내에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데 필요한 교육활동 프로그램을 찾아보기 어렵고 학생들은 학교는 수능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형국이다.

대통령이 수능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우리 학교 학생들은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수능으로 변별하려고 하는 대상은 최상위권에 속하는 학생들이다. 수능이 어렵게 나오든 쉽게 나오든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수능 100% 전형과 수능 최저 기준 적용 전형을 합쳐도, 수능과 관련 있는 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 내 계단. 올라가야만 할 듯한 느낌.
 학교 내 계단. 올라가야만 할 듯한 느낌.
ⓒ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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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한마디에 언론이 호들갑을 떨고 정치권에서 논박을 벌이는 상황에 낯설기만 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수능과 관련이 없는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성적이 뛰어나지 않기에 세간의 관심이 떨어질 뿐이다. 

이런 상황이 마땅한가 싶다. 성적이 뛰어난 소수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는 온 나라가 냄비 끓듯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와 관련한 사항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집단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반응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힘 있는 특정 집단에 휘둘리는 경우를 많이 보아서 드는 생각이리라.

이 기회에 우리나라의 교육 시스템 전반을 살펴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깁고 개선하고 바꾸어야 할 부분이 얼마나 많겠는가. 고교학점제가 당장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모든 고등학생들과 직접 관련이 되는 제도인데 2025학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이 된다고 한다. 제대로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건대, 무늬만 학점제가 될 가능성이 클 듯하여 심란하다.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은 정비하지 않고 '그냥 2025학년도부터 시행!'이라고 밀어붙이는 듯하여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수능 가지고만 뭐라고 하지 말고, 교육 시스템 전반을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제발.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태그:#수능, #학교,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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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교사로 재직 중. 2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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