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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편집자말]
비 오는 날 근처 공원을 지나다 우비를 입고 반려견과 산책 가는 사람을 보았다. 우산은 생략하고 우비를 챙겨 입은 건 곁에 있는 존재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 아닐까. 여성과 반려견의 움직임에서는 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경쾌함이 묻어났다.
 
빗 속에 대화를 나누는 듯 했던 두 존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 다른 존재와의 교감 빗 속에 대화를 나누는 듯 했던 두 존재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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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아까 본 여성과 반려견을 다시 만났다. 여성은 반려견 앞에 쪼그려 앉아 몸의 높이를 맞추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모습이 한창 대화에 빠져있는 친구들 같았다.

텅 빈 공간이 그들을 부각시켰다. 더없이 친밀해 보이는 둘의 모습이 평화로우면서 아름다웠다. <이토록 굉장한 세계>(양병찬 옮김, 어크로스)에서 에드 용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다른 환경세계를 탐험하는 능력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감각 기술이다. (…) 인간은 (…) 다른 동물이 무엇을 감지하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었고, 아마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 것이다." (531쪽)

다른 존재와 교감하려 했던 세 명의 여성 과학자

다른 환경세계나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평생을 헌신한 여성 과학자들이 있다.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을 연구한 제인 구달(1934~)과 다이앤 포시(1932~1985), 비루테 갈디카스(1946~)다. 사이 몽고메리는 <유인원과의 산책> (김홍옥 옮김, 돌고래)에서 이 여성들의 일과 사랑,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인 구달과 다이앤 포시, 비루테 갈디카스의 놀라운 삶
▲ <유인원과의 산책> 제인 구달과 다이앤 포시, 비루테 갈디카스의 놀라운 삶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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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구달은 아프리카의 곰베에서, 다이앤 포시는 르완다 비룽가 산, 비루테 갈디카스는 인도네시아 탄중푸딩에서 각각 침팬지와 마운틴 고릴라, 오랑우탄을 연구했다. 이들은 모두 수십 년에 걸쳐 각 개체의 생활 행태와 상호작용을 관찰하여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영장류의 특성을 발견하는데 기여했다.

곰베에서 연구를 시작했을 때 제인은 침팬지 무리에 자신의 존재를 그저 알리는 데만 첫 4개월의 시간을 들였다. 그녀는 어떠한 실험과 조작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며 그들의 모습을 숫자가 아닌 언어로 기록했다. 제인의 접근법은 "지배보다 관계, 일반성보다 개체성, 통제보다 수용을 강조"(169쪽)하는 것으로, 이는 대체로 여성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일치한다고 사이 몽고메리는 서술한다.

다이앤과 비루테도 제인과 유사한 방식을 따랐다. 시간을 들여 오랑우탄과 고릴라 집단에 스며들었으며 기존의 인간 중심적, 양적, 통계적 자료 수집 방식에서 벗어나 개별 개체의 행동과 반응을 기록했다. 그들이 지닌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 그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놀라운 사실을 목격했고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제인은 어미 침팬지 플로를 통해 모성애를 배웠고 다이앤은 수컷 고릴라 디짓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비루테는 성인 고릴라 랠프와 신뢰를 주고받았다. 이들의 발견은 유인원과 인간 사이, 동물과 인간 사이의 관점 변화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으며 이후 환경 및 동물 보호 운동에 도화선 역할을 했다.

세 명의 여성 과학자의 노력에 더해진 사이 몽고메리의 탁월한 문장력은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이라는, 각 동물을 집단적 특성과 통념으로 납작하게만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에 다채로운 모양과 굴곡을 만들어 준다.

비슷하지만 너무도 다른 세 여성 과학자의 삶

이 책의 묘미는 세 과학자의 성과를 확인하는 데에 머물지 않는다. 사이 몽고메리는 세 여성 과학자의 일생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영장류 학자로서 닮은 꼴이었던 삶 전체의 윤곽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지닌 고유한 성격과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개별적으로 펼쳐졌던 자잘한 무늬까지 놓치지 않고 새겨 넣는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세 과학자가 동물 연구에서 개체성에 집중했던 자세와 묘하게 닮았다.

제인 구달은 타고난 이야기꾼의 기질과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샀고 그 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침팬지 개체의 상황에만 집중하느라 전체 집단이 겪는 문제에 소홀했고 내성적이고 상대와 맞서길 꺼렸던 성향 탓에 초기 환경 보호 운동에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한 심포지엄 참가를 계기로 이후에는 침팬지 보존 문제에 맹렬히 뛰어들었다).

제인과 대조적으로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다이앤은 평생 외로움에 시달렸다. 호전적이며 외골수적인 기질로 고릴라 보호를 위해서라면 폭력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았다. 밀렵꾼들과 전쟁을 벌이고 르완다 관리들과 적대 관계에 서면서 그녀 삶은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비루테는 다이앤을 통해 교훈을 얻었을까. 그녀는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관습을 철저히 이해하며 적을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현지 부족민과 결혼, 정착하면서 '본토인'으로 변모했고 정부 관계자와 타협하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잃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캠프를 방문한 서구인들에게는 권위적이거나 오만하다는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사랑과 시간이 만드는 특수한 함수의 결과

책을 읽고 내가 사로잡혔던 부분은 유인원에 대한 발견이나 세 과학자의 드라마틱한 삶도 아니었다. 나는 오직 이것이 궁금했고 그 힘이 부러웠다.

지독한 더위와 습기, 곤충과 거머리 떼의 습격, 재정난의 압박과 현지인과의 불화 등 온갖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제인과 다이앤, 비루테가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침팬지와 고릴라, 오랑우탄을 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는 저자 사이 몽고메리에게도 해당된다. 수중에 비행기 값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 여성 과학자의 평전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여행길에 올랐다. 안정적인 수입도, 그들과의 인터뷰에 대한 어떤 확신도 없었다.

과학자들을 관찰하고 인터뷰한 이후에도 평전을 완성하기까지 (엄청난 자료를 확인하는 것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요구되었을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녀에게 책을 완성하게 했던 힘은 무얼까? 무엇이 우리를, 끝내 헌신하게 할까?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거기에 있는 까닭은 그들과 그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13쪽)

반려견 곁에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던 여성이 떠오른다. 그와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단지 거기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곁에 있는 존재에게 다가가는 게, 나와 다른 존재와 공감하는 순간의 기쁨이 그저 좋아서.

커다란 결심이나 엄청난 보상만이 우리를 이끄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 대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관심으로 충분한지도. 그 순전한 사랑이 긴 시간과 만나면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이들의 삶은 알려 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유인원과의 산책 - 제인 구달, 다이앤 포시, 비루테 갈디카스

사이 몽고메리 (지은이), 김홍옥 (옮긴이), 돌고래(2023)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태그:#여성과학자의삶, #제인구달, #다이앤포시, #비루테갈디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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