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작품을 준비하면서 ”선생님에 대한 기록이 사실 많지 않아요. 절판된 책도 많아서 기념회 통해서 자료들을 받았어요. 그런데 짧은 인터뷰만 봐도 어떤 분인지 되게 딱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극을 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또 따라가려고 했고, 그걸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각들을 막 수집했던 것 같아요. 정말 많은 일을 하신 분인데, 기록된 그 분의 목소리의 힘, 눈빛, 이런 것만 봐도 ‘이분이 어떤 분이구나’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죠.“ ⓒ 우란문화재단

 
"저희가 작품 안에서 '꾸준함'을 이야기하는데, 연습 때 '목소리 프로젝트를 하는 게 나의 꾸준함입니다'라고 한 적도 있어요. 제가 선택해서 개근을 한 건 아니고요(웃음). 기회가 와서 그냥 잡았을 뿐인데, 주변에서 막 주목해 주고 계시더라고요(웃음). 목소리 프로젝트를 했던 사람들은 계속 다 참여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섬: 1933~2019>를 했던 게 벌써 4년 전이잖아요. 이번에도 제가 정말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제게 세 번째 기회가 왔다는 게 너무 좋은 일이었죠.
 
인터뷰 중에 '연기자를 하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한다'라는 말을 많이 해왔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이미 저한테는 지금, 이 창작진이 너무 가족 같은…, 아, '가족 같다'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취소할게요(웃음). 너무 고루하고 지루한, 뻔한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공연을 같이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해요. 너무 편안하고 믿음직한, 서로가 좋은 동료들이기 때문이에요."

 
잊힌 누군가의 목소리를 오늘의 무대로 되살리는 '목소리 프로젝트'가 그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노동자, 고 전태일 열사의 목소리를 전한 음악극 <태일>이 그 첫 번째였다. 두 번째 프로젝트 <섬: 1933~2019>는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 그리고 차별과 편견 속에 놓인 이들과 함께 희망을 노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여성 2인극인 <백인당 태영>은 '목소리 프로젝트'의 세 번째 작품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고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훑으면서 그가 마주해야 했던 선, 그리고 그 선들을 끊어내기 위해 분투했던 목소리가 담겼다.
 
극은 7살의 이태영이 교회에서 첫 웅변에 나섰을 때를 시작으로, 그가 왜 변호사의 꿈을 품게 되고, 숱한 역경 속에서 결국 그 꿈을 이뤄냈는지 풀어낸다. 당시 여성이 처한 부조리에 분개했던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관습에 저항하며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백인당'은 그가 여성을 위해 지은 '백인회관'에서 따온 호이다. 이번 작품으로 목소리 프로젝트에 모두 도장을 찍은 배우 백은혜는 이태영 변호사로 분해 연기하고 노래한다.
 
수채화 같은 배우, 백은혜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어려웠던 숙제 ”목소리 프로젝트가 1탄부터 3탄까지 대본의 결이 다 달라요. 그러니까 말맛이 좀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같은 작가가 쓰셨어도, 이번 대사가 말을 입에 붙이기가 되게 어려웠었어요. 수식하는 말들이 매우 많았고, 한마디로 ‘한 마디’가 엄청나게 길어요. 말의 ‘한 마디’가. (웃음) 그래서 외우는데 어려웠죠.“ ⓒ 우란문화재단

 
지난 5월 19일 개막한 <백인당 태영>은 오는 18일 그 첫 무대의 막을 내린다. 공연후반으로 달려가고 있던 6월 초, 우란문화재단 리허설룸에서 백은혜를 만났다. 그는 본인이 말 주변이 없는 것을 우려했고, 너무 두서없이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나 대답이 자칫 거만하게 비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태블릿 PC에 미리 답변을 메모해 온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수채화' 같은 배우였다. 본인은 '수채화처럼 말을 너무 퍼뜨려 놓는다'라는 맥락에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백은혜는 무대에서도 수채화처럼 자기 색을 흩트려 놓는 배우이다. 본인의 색깔로 무대를 칠한다.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막달레나로 올랐을 때, <세인트 조앤>에서 조앤(잔 다르크)으로 등장했을 때 무대를 물들이는 색깔이, 공기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다. 그러면서도 다른 배우가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분명하게 남겨두는 배우. 색깔이 확실하면서도, 주변을 그저 덮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맑은 채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색을 더하기보다는 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양'까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극화를 꺼렸던 작품이죠. 제 개인적인 욕심을 제일 버렸던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100% 빠졌다고 할 수는 없죠. 어쨌든 한 번 해석이 된 인물이고요. 하지만, 자료를 읽고 제가 느낀 것에 제일 가까운, 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제일 가까운 '이태영'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보통은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말투부터 시작해서 아주 작은 것들까지 선택할 게 많거든요. <백인당 태영>은 가장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작품이라 새로웠어요. '저'화(化) 된, '백은혜'화(化) 된 이태영으로 모두가 알게 될 수도 있잖아요. 이태영 선생을 아는 분들이 정말 적고, 저로 인해 공연을 보고 이태영 선생을 처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저로 인해 '왜곡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컸죠."

 
대학로의 베테랑인 백은혜에게도 분명 어려운 작품이었다.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것 역시 난도가 높은 작업이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이 이 작품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즐거움이기도 했다.
 
"어렵죠. (웃음) 분명히 어려운데, 저한테는 이렇게 다양한 조건에서 연기할 게 많아지는 건 좋은 소식이죠. 자칫 오만함으로 느껴질까 봐 항상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저에게는 다 재미예요. 한 인물을 이렇게 쭉 가지고 가는 그 어려움마저도, 다행히 아직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업인 것 같아요. 
 
연기할 때도 '레이어'(층)가 많은 게 너무 좋아요. 그래서 제가 처음 <태일>을 만났을 때 기뻤고, <오만과 편견>도 그래서 했었죠. '태영'이라는 인물을 풀어내는 것도 저한테는 다 즐거움이었어요. 이런 행운이 어딨어요? 레이어가 많은 연기를 하지는 않지만, 대신 단계별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탁탁탁' 보여줘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특히 어렸을 때의 신들은 아주 짧아요. 7살도 짧고, 13살도 짧으니까, 그때 명확한 것들을 보여줘야 해요. '짧은데 그 포인트를 어떻게 잡을까?'가 숙제였죠. 7살로 보여야 하고, 13살로 보여야 하는 그 자체는 결국 풀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더 중요한 건 '왜 아들을 낳으면 좋아하고, 딸을 낳으면 싫어할까'라는 7살 때 질문, 그리고 '왜 하라는 공부를 아들은 안 하고, 왜 안 해도 될 딸이 할까'라던 엄마에게 13살 때 하는 질문. 그런 질문들을 순간순간 잡아내 풀어내는 게 더 큰 숙제였죠. 제가 얘기한 게 혹시 너무 뻔한 대답으로 들릴까 봐 걱정이지만, 저는 그런 숙제를 좋아해요. (웃음)"

 
백은혜의 꾸준함, 이태영의 꾸준함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일관된 고민 ”‘이 작품을 하면서 내가 행복할 것인가’ 같은 실질적인 고민도 당연히 하죠. ‘내가 매일 연습을 하고, 매일 극장으로 출근을 하면서 즐거울까’라는 생각도 하고, ‘같이 하는 사람들과도 즐거울까’ 이런 생각도 당연히 하고요. 그게 저한테는 제일 일관되는 지점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이 드네요.“ ⓒ 우란문화재단

 
작품 속 태영은 자신 앞에 치는 수많은 파도에도 굴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어렸을 때, 오라버니가 했던 말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한국에 아직 여성 변호사가 한 명도 없던 때, 일제강점기라는 폭압의 시대가 겹쳤지만, 그는 꿋꿋하다. 멈췄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을 때 성과가 좋지 못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나' 싶다가도, 결국 그 길을 다시 나아가고야 만다.
 
"시험도 한 번 떨어졌잖아요? (웃음) 지고는 못 사셨던 것 같아요. 친오라버니의 영향도 굉장히 컸을 것이고, 이분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사회적으로 힘이 없으신 분들,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 대해 정말 많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물론 '이것만으로 평생을 그렇게 싸우실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본인의 기질과 이 모든 것이 맞닿지 않았을까 해요. 천성적으로 그런 기질을 갖고 나셨기 때문에, 그 목표를 한 번 세우고 나니까 쭉 갈 수 있었고, 공부를 꾸준히 하게 됐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요. 막상 또 어려운 분들을 만나고 나니 애가 닳으시고, 그것들을 넘어서야 되겠으니 마지막까지 싸우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백인당 태영>의 중심은 이태영 변호사이지만, 그 주변의 조력자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이태영 선생이 걷는 길은 분명 고난의 길이었지만, 혼자서만 가지는 않았다. 여성이 대학에서 공부를 하더라도 가정에 얽매이는 게 다반사였던 때, 이화여전에서 그를 법학 공부의 길로 이끌어준 정광현 교수가 있었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묵묵히 함께 있어 준 정일형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태영 선생이 그의 옥바라지를 위해 누비이불 장수로 보내야 했던 세월, 날이 잘 드는 가위 하나 갖는 게 그저 소원이었던 그 때가 지나자, 남편은 그 가위로 이태영 선생이 자신을 가로막은 선을 자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작품이 사실 많은 순간을 빠르게 넘어가지만, 이분의 생애에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을 크게 다뤘다고 생각해요. 이태영 선생의 삶을 보면, 이분도 정말 대단하시지만, 돕는 손길도 정말 많았거든요. 저는 연습하면서도 항상 이태영 선생이 저희 어머니 같다고 말했어요. 저희 어머니는 '그때 나한테 끌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저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많이 하셨죠. 이태영 선생은 본인이 가진 것도 많고, 욕심도 있고, 능력도 있었지만, 정말 주변에서 이분을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이태영 선생의 과거 인터뷰 자료들이 제 안에 있기 때문에, 나중에 환상인 듯 진짜인 듯 정광현 선생이 나오시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남편과 대화를 나눌 때도 '동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울컥했어요. '줄탁동기'를 이야기하면 어느 순간 가슴이 찡해지고, '가족은 언제나 2순위'라고 할 때 막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이죠. 그런 거를 저희가 극에서 더 부풀 리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말고 끝까지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여전히 유효한 답변 “‘여성들의 실제적인 삶을 다양한 주체로 그리는 작품들이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더뮤지컬> 182호)라고 했던 건, 사실 그때 기자님이 예쁘게 만져주신 거예요. (웃음) 좀 다듬어주시기는 했지만, 그런 맥락에서 대답한 건 맞아요. 그리고 그때의 고민과 소망은, 네, 여전히 유효합니다.” ⓒ 우란문화재단

 
<난쟁이들>의 인어공주나 <홀연했던 사나이>의 김꽃님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배우 백은혜가 어떤 결의 연기를 해왔고, 또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알 것이다. 연기의 폭이 넓은, 잘하는 배우들은 꽤 있지만 그중에서도 백은혜의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상당하다. 특히 <베르나르다 알바>에 이어 <비: BEA> <아가사> <세인트 조앤>부터 <웨이스티드>까지, 최근 몇 년 간 무대에서 보여준 행보도 인상적이다. 작품의 결도, 분위기도 다르지만, 여성 인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품이라는 공통점도 꼽아볼 수 있다.
 
"<세인트 조앤> 기자간담회였을 거예요. 한 기자 분이 '여성 서사 작품을 지금까지 쭉 해오셨는데...'라고 질문해주셨죠.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 작품들은 아니에요. 많은 분이 오해하세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달라진 것 같다는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저한테는 기회가 더 많이 오게 된 것뿐이에요. <태일> 때만 해도, 저에 대한 선입견 같은 게 있었어요. '백은혜? 잘 못할 것 같아' '백은혜가 할 수 있겠어?'라는 이야기들이요. 저를 보여드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가 이제 많아진 거지, 제가 선택의 길을 바꾼 건 아닙니다.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을 하는데, 덤으로 제가 하고 싶었던 말도 할 수 있다? 연기자에게 최고의 기회잖아요. 이런 기회가 또 있겠어요? 작품이 저한테 왔고, 그 작품이 제가 생각하는 바와 맞닿았고, 그래서 저라는 사람을 통해서 전달된 작품이 또 누군가에게 호소력이 짙게 다가갈 수도 있고, 어떤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고…. '내 선택과 그 결과에까지 내가 가진 힘이 닿는구나' 생각해요.
 
기자 분으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목소리를 냈을 때, 내가 해석한 작품과 해석한 결과물에 그런 힘이 있구나'라고 저도 감탄 했어요. <백인당 태영>도 마찬가지죠. 태영이 하는 말들, 제가 무대에서 하는 말들은 그냥 한 인간으로서 하는 말이고, 모든 작품을 사실 그렇게 접근을 했던 거였어요."

 
그는 자신을 향한 '오해와 포장'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그렇게 대단하거나 용기있는 사람도 아니고, 거창한 생각을 하는 이도 아니다. 다만 작품 제안이 들어오면 "그 작품이 내게 하는 질문"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작품이 본인에게 던진 질문에 답할 말과 생각이 내 안에 있는지, 내 고민과 맞닿은 지점이 있는지 돌아본다. 그저 답할 목소리가 있었기에 골라온 작품들이었고, 그 걸음들이 모여 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많은 관객이 그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을 사랑하며 지켜보고 있다.
 
"사회비판적이거나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죠. 하지만 저는 늘 '그렇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 자체가 기회'라고 말해요. 이렇게 <백인당 태영>이라는 작품을 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걱정이 되는 부분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표현이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봤더니 상태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어떤 느낌들을 드러내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건 결국 보는 것과 듣는 게 굉장히 크잖아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가 표현하는 공연을 보고 나니 자꾸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점점 변하기도 하죠. 제가 어떤 작품을 할 때든 책임감을 갖는 이유예요."


느리고 더디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작품이 다가올 때 “그 작품이 먼저 ‘대시’를 한다고 그래야 할까요? ‘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생각과 맞는 작품을 할 거야’가 아니에요. 그랬다면 저는 한 가지 색깔의 작품밖에 할 수 없지 않았을까요? <아가사> 같은 작품도 그랬어요. 작품 안에 ‘세상은 완벽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균형을 지켜야 하지’라는 대사가 있거든요. 사람도 완벽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균형을 맞춰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이 저의 마음에 울렸어요. ‘그냥 이 한마디 때문에 했다’라고 마지막 공연 인사 때 이야기했어요.“ ⓒ 우란문화재단

 
작품의 마지막, 태영은 가위를 든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끌려간 남편 정일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 그토록 갖고 싶던 날이 잘 드는 가위, 그 가위로 결국 그가 자르는 것은 이불이 아니라 '선'이다.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를 차별한 선, 교육을 받고도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선, 여성 판사가 나오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하는 선,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이 붕괴될 거라는 선,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넘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한 선. 배우 백은혜 앞에도 그런 선들이 있었다.
 
"매체에 처음 나갔을 때 되게 충격적이었어요. 무대에서는 나이나 성별 같은 것들을 많이 무너뜨리잖아요. 그런데 매체는 제가 할 수 없는 게, 못한다고 하는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게 저한테는 충격이었고 스트레스였어요.
 
연습하고, 공연하고, 연습하고, 이렇게 두세 작품 하면 한 해가 가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시간을 살았을 뿐인데, 이제 내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웃음) 이렇게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은 없어지더라고요. 인정하게 되는 부분도 있고, '내가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거 하면 되지'라고 하니 <며느라기> 같은 좋은 작품들을 또 만났고요.

'진짜 나의 선이 뭘까'라는 고민을 좀 했을 때, 내가 진짜 깨부숴야 되는, 연기자로서 나의 선은 그냥 저의 편견이었어요. '내가 나로 설 수 없게 만드는 건 나의 생각이구나'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너무 많이 생각했고, 사람들한테 나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나'라는 생각들을 해요. 나 자신의 평가, 나 자신의 눈치,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마음 그런 것들을 잘라내면, 연기자 백은혜로 너무 자유로울 것 같아요. 남이 만들어준 건 극복할 수 있더라고요. 평생 갈 고민들이 아니었어요. "

 
세상은 분명히 변했지만, 저절로 좋아진 게 아니라 그 뒤에 이토록 싸워온 이들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작품 속 이태영 변호사가 겪어야 했던 아픔은 비단 이태영 개인만의 문제도, 이제는 완전히 종식된 과거의 유물도 아닐 것이다. 많은 관객이 이 작품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아마도 이 지점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잊지 않고 이런 목소리들을 기억해야 한다. 백은혜가 공연장(우란2경)을 나갈 관객들에게 부탁하는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분들에게도 '이분을 몰랐다'라는 마음이 있었을 거고, 이분의 노력과 헌신을 인제야 알게 됐기 때문에 그 고마움과 미안함에서부터 밀려오는 여러 마음이 있지 않겠어요? 저는 이 작품이 성공담으로 보일까 걱정했어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분이 쌓은 업적이 아니거든요. 이분이 걸어온 노력과 헌신, 그 한 걸음, 한 걸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거기에는 사랑이 있었을 거고,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단순히 그냥 위인을, 그리고 성공담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진심을 관객들도 다 알아주시지 않으셨나 해요.
 
너무 기분 좋았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제 지인이 공연을 봤는데 옆에서 같이 공연을 본 초등학생이 공연 끝나고 나서 '너무 좋았다. 학교 과제를 이걸로 할래'라는 이야기를 했대요. 그 초등학생이 학교에 가서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면 그 교실의 몇십 명은 또 이태영 선생을 알게 되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뿌듯한 거죠. '이거면 됐다' 싶었어요. 저도 이분을 몰랐기 때문에, '이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공연하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음악극 <백인당 태영> 우란문화재단 우란2경 무대에서 시작한 음악극 <백인당 태영>의 공연 사진. <백인당 태영>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선생의 일생을 그린 여성 2인극이다. 이태영 선생은 불평등한 호주제 폐지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저는 이런 질문을 주시면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해서, 이 끝~까지 가요. 그러니까 양파처럼 껍질을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벗겨서 그래서 고민이 되게 많아져요.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들을 말씀드리는 건데... 죄송해서 어떡하죠. 오늘 저 잘 이야기했나요?" ⓒ 우란문화재단

 

백인당태영 이태영 백은혜 음악극 우란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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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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