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손을 지닌 인간'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서양미술사에서 '현대 조각의 아버지'로 통할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로댕은 대표작인 '생각하는 사람(1880)' 등을 통하여 주로 평범한 인간의 육체를 주제로 삼아 사실적이고 생동감넘치는 표현으로 조각의 새로운 가치를 탐구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으로 제자이자 연인, 그리고 파트너였던 카미유 클로델(1864-1943)과의 불륜 스캔들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5월 3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01회에서는 '연인 클로델을 파멸로 이끈 천재조각가 로댕' 편을 통하여 서로의 운명을 바꾼 두 예술가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를 조명했다. 현대 미술사학자인 우정아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미술의 길에 뛰어든 로댕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로댕은 1840년 11월 12일 파리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의 명성과 달리 어린 시절의 로댕은 초라했다. 눈이 나빠서 근시였던 로댕은 학업에 뒤처진 열등생 취급을 받으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로댕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의 판화집을 읽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을 계기로 미술의 길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로댕은 14세였던 1854년 무료 데생학교였던 프티드 에콜에 입학하면서 조각에 흥미를 가지게 됐다.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고 조각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 로댕은 국립미술고등학교 시험에 낙방했다. 빠듯한 집안형편 때문에 더 이상 미술공부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위하여 건축물 조각 장식일에 뛰어들었다.
 
1864년 24세의 로댕은 자신의 첫 번째 뮤즈이자 평생의 인연이 될 여성 로즈 뵈레를 만나게 된다. 대도시 파리 출신의 로댕은, 자신과는 대조적인 시골 출신으로 건강하고 순박한 뵈레에게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뵈레는 로댕이 찾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의 조건에도 부합했으며, 실제로 로댕은 그녀를 모델로 하여 '로즈 뵈레 마스크' '귀여운 여자' 등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작업을 하면서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시작하면서 뵈레는 로댕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됐다.
 
하지만 로댕은 뵈레와 결혼하지 않았고 아들을 호적에 올리지도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뵈레는 로댕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눈치를 보면 남몰래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로댕은 여성 모델들과 작업을 할때마다 은밀한 시간을 즐기며 문란한 여성 편력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뵈레는 그런 로댕을 남편이나 연인 대신 '몽 세뇨르(나의 주인님)'라는 존칭으로 부를만큼 불평등한 관계에서도 순종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로댕을 대신하여 시아버지의 병수발은 물론 가족 생계까지 책임진 것도 모두 뵈레의 몫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조각 작업에만 심취했던 로댕은 1864년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꼽히는 파리 살롱전에 '코가 일그러진 남자'를 출품했으나 당시에는 난해한 작품세계가 인정받지 못했다. 여기에 1870년 '보불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미술계도 침체되면서 로댕은 이듬해 가족을 남겨둔 채 일거리를 찾아 혼자 벨기에로 떠나야 했다.
 
조각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 로댕은 1874년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 우상이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접하고 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로댕은 '최후의 심판' '다윗상 등 미켈란젤로의 걸작을 연구하면서 자신도 인간의 생명력을 조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됐다.
 
1877년 37세의 로댕은 벨기에 군인을 모델로 한 '청동시대'를 발표하며 무명에서 스타 조각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조각계가 신체비율을 미화하고 이상화시킨 그리스 조각 스타일이 주류였다면, 로댕은 기존의 틀을 깨고 인간 본연의 신체를 조각에 녹여내며 큰 반향을 불러오게 된다. 로댕은 '청동시대'로 파리 살롱전에 13년 만에 다시 도전하여 입선까지 성공한다.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는 너무 사실적인 완성도 때문에 조각이 아닌 실제 모델에 석고를 씌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로댕은 실제로 모델에 석고를 씌워만든 석고상을 자료로 제출하여 원작과 비교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적극 변론했다. 이후 평가는 뒤집혔고 미술계에서는 '청동시대'를 향한 극찬이 쏟아지며 로댕은 일약 촉망받는 신예 조각가로 자리매김했다.
 
로댕은 명성이 높아지면서 프랑스 정부사업으로 진행된 장식미술박물관 신축의 핵심 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박물관 입구문을 맡게 된 로댕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또다른 인생작인 '지옥의 문'을 구상한다.
 
지옥에 떨어진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게 묘사는 '지옥의 문'은 개별적인 조각으로도 모두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작품은 무려 20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로댕의 사후였다. 프랑스 정부는 로댕이 생전 조각한 석고틀에 단 7개의 청동 주조만 허가하여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중 하나는 삼성문화재단에서 100억 원에 구입하여 현재는 한국 호암미술관 수장고에서 보관중이다.
 
또한 로댕이 1880년경 지옥의 문에서 최초로 조각한 것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처절한 지옥도에서 인간군상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듯한 조각상은, 이후 다양한 크기로 단독 작품으로 제작되어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까지 로댕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한번은 들어봤을만큼 다양한 패러디의 대상으로 유명해졌다.
 
'생각하는 사람'을 굳이 이렇게 어렵고 불편한 자세로 표현한 이유에 대하여, 로댕은 해당 인물이 얼굴만이 아닌 '팔과 등과 다리의 모든 근육, 움켜쥔 주먹과 발가락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우 교수는 "모든 인간사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생각하는 사람'의 모티브가 된 것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묘사된 지옥의 경계선에서 두려워하고 있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실제로 '생각하는 사람'과 포즈도 유사하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1883년 조각가로 한창 명성을 떨치던 로댕은 운명처럼 인생의 '뮤즈'인 카미유 클로델을 만나게 된다. 스승의 소개로 로댕의 문하생으로 들어온 클로델의 나이는 당시 19세, 로댕의 나이는 43세였다. 클로델은 '지옥의 문' 작업에도 조수로 참여했고 조각상의 모델로 직접 나서면서 로댕의 마음의 사로잡았다.
 
클로델을 모델로 한 '다나이드'는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소재로 하여 지옥에서 고통받는 딸의 모습을 그린 작품임에도, 정작 캐릭터는 매우 아름답게 표현됐다. 또 다른 작품 '키스'에서는 아예 두 사람의 위험한 불륜관계를 대변하듯 대놓고 관능미와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냈다. 바로 클로델을 향한 로댕의 애정어린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두 작품을 함께하며 로댕과 클로델은 24살의 나이차에도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세상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로댕은 사교행사에서 사실혼 관계의 아내 뵈레보다 클로델과 동행했다. 자연히 파리 미술계에서도 두 사람의 불륜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뵈레 역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로댕을 떠나지 못하고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로댕은 클로델과 함께하면서 또다른 역작인 '칼레의 시민'을 완성했다. 당당하고 기품있는 전통적인 영웅상과 달리, 공포와 고통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 로댕의 영웅상은, 기존 미술계의 영웅주의에 대한 개념을 뒤엎었다고 할 정도로 획기적인 평가를 받았다. 제작 당시만해도 작품을 거부한 칼레시를 비롯하여 보수적인 시각을 지닌 이들에게 많을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로댕은 1년뒤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하며 재평가를 받았다. '칼레의 시민'은 1924년 칼레 시청앞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887년 로댕과 클로델은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피하여 파리를 떠나 투렌에 머무르며 사랑과 작품 활동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클로델은 내연녀라는 꼬리표를 떼고 로댕과 더 진지한 만남을 원했다. 로댕은 클로델과 결혼을 약속하고도 여전히 뵈레와의 연락도 지속하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클로델은 로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하여 고군분투했다. 클로델은 인도의 서사시를 소재로 한 '샤쿤탈라'를 통하여 파리 살롱전에 입상하며 본인도 뛰어난 예술가임을 증명하는 듯 했다.
 
하지만 클로델은 '샤쿤탈라'를 둘러싼 표절시비와 후폭풍에 휘말리며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파리미술계에서 영향력이 컸던 로댕은 자신의 명성에 흠집이 갈까 두려워 표절시비에도 클로델을 보호하지 않고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뵈레와 헤어지고 클로델과 결혼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은 클로델은 로댕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하고 말았다. 큰 상처를 받은 클로델은 결국 로댕과 약 15년에 걸친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로댕과 완전히 결별한 클로델은 조각가로서 홀로서기 위하여 절치부심했다. 하지만 클로델의 '왈츠'는 여성 조각가가 남성 누드상을 만들어 전시하는 게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출품을 거부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이에 클로델은 개인수집가들을 위한 장식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여 '파도' '수다쟁이' 등의 수작을 꾸준히 제작해냈지만, 작품은 좀처럼 잘 팔리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곤궁한 처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절망에 빠진 클로델은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가 정신이상증세까지 보이게 된다.
 
클로델은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로댕의 사주를 받았다는 의심에 빠졌고 편집증적 망상증세로 자신의 분신같은 조각 작품들을 스스로 부수기도 했다. 1913년, 49세의 클로델은 결국 가족들에 의하여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클로델은 여러 차례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신병원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로댕은 클로델과 헤어진 이후 더욱 승승장구하며 세계적인 스타 조각가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로댕은 뵈레와의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바람기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로댕은 60대의 나이 28세의 영국 화가 그웬 존, 40세의 귀족 부인이던 클레어 드 쇼와셀, 일본인 무용수 하나코 등 나이차가 많이 나는 젊은 여성들과 문어발식 연애를 즐겼다.

거장이 되기까지
 
클로델이 병원에 수감된 지 3년만인 1916년, 76세의 로댕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로댕은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그동안 유일하게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준 로즈 뵈레에게 뒤늦은 청혼을 하고 두 사람은 53년 만에야 결혼을 통하여 법적인 부부가 됐다. 어쩌면 뵈레에게는 평생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917년 결혼식을 올리고 불과 2주만에 뵈레가 급성폐렴으로 돌연 급사하여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7일, 로댕도 병세가 악화되며 세상을 떠난다. 로댕은 사망한 이후에도 조각가의 거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영면했다.
 
반면 로댕과 달리 클로델은 30년을 정신병원에 머물며 아무런 작품 활동도 하지 못했다. 클로델은 79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사망했고, 사후에도 가족의 외면을 받으며 시신은 무연고로 처리되어 매장됐다. 한때는 함께 걸작을 완성했던 동료이자 뜨겁게 사랑했던 두 천재 조각가의 운명은 그렇게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중요한건 감동하고, 사랑하며, 희망하고, 전율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티스트가 되기전에 인간이 돼라.'

로댕이 생전에 남겼다는 어록은 몹시 의미심장하다. 로댕은 뵈레와 클로델이라는 두 뮤즈를 통하여 영감을 얻고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내며 지금까지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생활에서는 제자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파멸로 이끈 '나쁜 스승'이자, 수많은 여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나쁜 연인'이기도 했다.
 
로댕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유로운 삶을 누렸지만, 두 뮤즈는 '지옥의 문'에 묘사된 인물들처럼 로댕이 만든 지옥에서 고통받았던 건 아니었을까.
벌거벗은세계사 로댕 카미유클로델 로즈뵈레 지옥의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