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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가 이야기해 논란이 됐던 주 69시간 노동, 이를 실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약 10시간씩 7일을 일해야 한다. 여기에 출퇴근을 위해 이동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일하는 데에 사용하게 된다.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식사시간, 수면시간, 씻는 시간 등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이 없다. 정부가 말한 '주 69시간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삶을 일만 하며 살아가는 기계와 같은 삶으로 만들 것이다.

이런 노동시간 개악에 대해 많은 사람이 경악했지만, 씁쓸하게도 방송 스태프 노동자들에게는 주 60시간, 70시간 노동이 이미 익숙한 게 현실이다. 방송 스태프들은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드라마, 예능, 교양, 다큐멘터리 등을 제작하는 노동자들이다. PD나 작가에서부터 현장의 조명, 음향, 촬영을 담당하는 기술팀 스태프들, 세트장, 의상, 소품 등을 담당하는 미술팀 스태프들, 편집, 특수효과와 같이 촬영 이후 작업을 담당하는 스태프 등 하나의 방송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관여한다.

90분짜리 드라마 한 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은 얼마나 될까? 대본 작업과 같은 준비 단계부터 촬영, 편집 등을 모두 포함하면 실 방영시간 10배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드라마가 외주 제작사에서 제작되어 방송국이나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에 납품되기에 납품 마감 기간이 다가올수록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일 또한 흔하다. 실제 2018년에는 SBS 드라마 〈황후의 품격〉을 제작하는 데에 '하루 29시간 연속 촬영'이 문제 되기도 했다. 당시 하루 노동시간이 과도했을 뿐만 아니라, 10일 동안 쉬지 않고 촬영을 지속해 주 노동시간이 69시간 55분, 65시간 53분에 달해 스태프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한 바 있었다.

3시간 쪽잠 자며 일해 문제 됐던 <미남당>
 
노동인권 시민단체들이 2022년 11월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 드라마 <미남당> 근로감독 결과 발표 후 KBS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동인권 시민단체들이 2022년 11월4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KBS 드라마 <미남당> 근로감독 결과 발표 후 KBS에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희망연대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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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전까지 드라마 제작 현장에는 주 52시간 노동시간 제한조차 지켜지지 않았기에 제작사들은 극악의 일정을 밀어붙였다. 특히 드라마는 그 특성상 경기도 외곽 세트장이나 지방에서 촬영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 경우 촬영시간 외에도 하루 출퇴근 시간이 평균 3시간씩 소요된다. 2020년 이전 평균적인 드라마 촬영시간은 이동시간과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13~14시간이었다. 하루 13시간 촬영하는 날에는 새벽 6시에 집에서 나와 자정에 집에 들어가야 했다. 다음날 또 촬영이 있는 경우 집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정도로, 잠시 눈을 붙이고 나갈 시간도 되지 못한다.

심지어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장비를 세팅하는 준비시간, 촬영 이후에 장비를 철수하는 정리시간은 돈을 받는 노동시간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촬영 시작 한참 이전부터 촬영 현장을 준비하고, 이후 철수하는 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미술팀은 주 노동시간 제한을 초과해 일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촬영 이후 편집을 담당하는 종합편집실 스태프들도 마감일이 닥치면 일주일 동안 퇴근 없이 일하는 경우가 잦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사협의체를 통해 주 52시간 노동시간이 정착되었다고는 하지만, 스태프들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 2022년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문제가 되었던 KBS 드라마 <미남당>의 경우 새벽 7시에 경기도 외곽 세트장에 집합해 밤 9시에 촬영이 끝나는 일정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노동시간이 3일에서 4일 연속으로 잡히면 어떨까.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해 밤 11~12시에 집에 도착하고, 다음날 다시 새벽 5시에 나가는 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당시 스태프들은 3시간씩 쪽잠을 자고 출근해야 했으며, 제작사에서 지방 촬영장 숙소를 잡아주지 않아 잠을 한 시간이라도 더 자기 위해 사비로 숙소를 잡기도 했다. 제작사는 이렇게 살인적인 일정이 이어졌음에도 "주 52시간을 지켰으니 문제없다"란 취지로 답변했다. 이에 당시 고용노동부는 근로감독을 통해 30주 중 21주 촬영이 1주 연장 근로시간 12시간 제한을 위반했음을 확인하여 시정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드라마 촬영은 여러 노동자의 협업으로 완성되는 만큼 촬영시간 내내 모든 노동자가 긴장하고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현장이기에 과도한 노동시간은 육체적 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에도 큰 영향을 준다.  과로는 안전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촬영 현장에는 카메라, 조명, 마이크, 무대 배경과 같이 무거운 장비들이 많을 뿐더러, 야외 촬영의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위험요소가 항상 존재한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경우에도 미술 설치를 위해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일이 대다수인데, 과로는 이런 작업의 위험성을 높인다.

지난 2017년에는 tvN 드라마 <화유기> 드라마 촬영장에서 미술팀 스태프가 3미터 이상 높이에서 조명을 설치하다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해당 스태프는 지속되는 야간 촬영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고, 당시 촬영장에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관련 기사: 하반신 마비 불러온 <화유기> 재앙... tvN 흑역사 무섭다 https://omn.kr/p4c1).

결국 현재 제작사와 방송국들이 노동시간을 늘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스태프 노동자들을 이렇게 위험한 노동 환경으로 내몰겠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심지어 스태프 대다수는 근로계약서가 아니라 업체를 통한 용역계약서를 작성하기에, 통상 이런 사고는 산업재해로 처리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잦다. 즉 회사는 손쉽게 책임을 회피하고, 그 피해는 모두 노동자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노동부의 유명무실 제안... 근거 없는 노동시간 개악 중단하라
 
2022년 12월 16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2년 12월 16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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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고용노동부에서는 주 69시간제가 실제 도입될 경우를 설명하면서 2주 동안 열심히 일하고 다음 2주는 근로시간저축계좌를 이용해 휴가를 쓰는 안을 예시로 들었으나, 단기간에 드라마 촬영을 마쳐야 하는 스태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일정이다. 많은 스태프들이 노동시간 개악으로 주 69시간 노동이 가능해질 경우 다시 하루 14시간씩 5일을 일해야 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현재에도 1주 연장 노동시간 제한은 빈번하게 어기면서 주 52시간 노동시간은 꼬박꼬박 채우고 있는 경우가 잦은 만큼, 아마 제작사는 바뀐 노동시간 제도를 유리하게 활용할 것이다.

노동조합에서는 제작사와 방송국들의 근로기준법 위반사항들을 계속해서 고발해왔으나, 사용자들이 처벌됐다는 얘긴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고용노동부는 그간 드라마 제작 현장에 세 번이나 근로감독을 나가며 법 위반사항을 여러 번 적발했지만, 모두 개선계획서 제출로 마무리되었던 걸로 안다. 당시 개선계획서를 제출했던 제작사 한 곳은 다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주 52시간을 초과하는 일정으로 드라마를 제작했고, 해당 제작사는 다시 고발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정부가 이야기하는 각종 법적 제한들이 현장에선 무력하다는 증거이다. 마치 '최저시급'이 어딘가에선 최고시급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1주 최대 노동시간 제한은 어떤 노동자들에겐 '최대' 노동시간이 아닌 '평균' 노동시간이 될 것이다.

몇 년 사이 주 69시간 노동이 52시간 노동으로 줄어들었지만, 드라마 촬영은 문제없이 진행돼왔다. 오히려 코로나 시기에 더 많은 드라마가 더 좋은 질로 제작되기도 했다. 노동시간과 결과물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정부는 근거 없는 노동시간 개악을 중단해야 한다. 스태프 노동자들은 주 69시간씩 촬영에 시달려야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을 넘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는 K-드라마. 그런 드라마가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고 안전하게 만들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스태프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모는 노동시간 개악은 멈춰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박혜리 희망연대본부 조직국장이 쓴 글입니다. 이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5,6월호 '특집' 꼭지에도 실립니다.


태그:#노동시간, #노동시간유연화, #장시간노동, #과로사, #방송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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