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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운조루 모습.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99칸으로 지은 품자형의 양반가옥으로 '타인능해'라는 쌀독을 두어 나눔정신의 귀감이 되는 곳이다.
 구례 운조루 모습. 조선 영조 때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99칸으로 지은 품자형의 양반가옥으로 '타인능해'라는 쌀독을 두어 나눔정신의 귀감이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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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년전 원시인들은 강가에서 움집을 짓고 살거나 동굴속에서 살았다. 강가의 돌을 이용해 석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돌그물추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강은 인류 역사와 문명의 발달과 함께했다. 강은 농사짓는 데 필요한 수로가 되고 교통의 발달을 가져왔다. 옛날 나라의 도읍지를 정할 때에도 반드시 큰 강이 흐르는 곳을 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통과 문명이 발달한 강 주변에는 문화가 발달하고 주민의 박수를 받으며 선진문화를 이끌어갈 크고 작은 선각자들이 살았다. 호남의 젖줄인 섬진강 주변도 마찬가지다. 순창에는 김정호보다 약 100년 앞서 백두대간의 개념을 정립한 신경준이 살았다. 곡성에는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을 기리는 '덕양서원'이 있다. 구례·하동에도 선진문화를 전파하고 공익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있었다.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왕건이 위기에 처하자 왕건의 갑옷을 빌려입고 전사해 왕건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에 있는 덕양서원으로 고려 개국공신인 신숭겸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왕건이 위기에 처하자 왕건의 갑옷을 빌려입고 전사해 왕건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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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음독 자결한 매천 황현

지리산 자락인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672번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37호로 지정된 매천사가 있다. 매천사는 조선말 대학자이자 시인인 '매천' 황현을 배향한 사우다.
    
조선 말기의 대표적 시인이자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선생의 위패를 모신 매천사 모습.
 조선 말기의 대표적 시인이자 애국지사인 매천 황현선생의 위패를 모신 매천사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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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지역 최초의 신교육 문화 발상지인 호양학교 모습. 1908년 황현 일행이 세웠으며 이 학교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기초를 세웠고 우국과 애국충절의 근간이 되었다.
 구례 지역 최초의 신교육 문화 발상지인 호양학교 모습. 1908년 황현 일행이 세웠으며 이 학교를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기초를 세웠고 우국과 애국충절의 근간이 되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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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서석 마을에서 태어난 황현은 32세 때인 1886년 12월 8일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해 '구안실'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쓰다 47세 때인 1901년 11월 29일 광의면 월곡으로 이사했다. 1907년 신학문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호양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시문에 능해 고종 22년(1885년)에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시국이 혼란하고 관리들이 부패한 것을 개탄해 관직에 나갈 뜻을 접고 향리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분통해하며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황현의 저서 <매천야록>은 1995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행되었으며 1962년에 정부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나눔정신의 귀감이 된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요즈음 뉴스를 보면 눈곱만큼의 이익을 위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소식이 들려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구례에 가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운조루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에는 중요 민속자료 8호인 '운조루'가 있다. 운조루는 조선후기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1776년에 세운 99칸 (현존 73칸) 가옥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운조루'는 운조루 고택의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의 이름이다. 이는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이라는 뜻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집터가 '금환락지(金環落地)' 형세로 남한 3대 길지 중 하나로 알려졌다. '금환락지'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곳이다.
    
구례 '운조루' 대문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적힌 쌀 뒤주가 있다. 이는 모든 이들에게 쌀 뒤주가 열려있다는 뜻으로 곤궁한 이들 누구나 쌀을 퍼가도록 한 자선 쌀 뒤주 통이랄 수 있다.
 구례 '운조루' 대문간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적힌 쌀 뒤주가 있다. 이는 모든 이들에게 쌀 뒤주가 열려있다는 뜻으로 곤궁한 이들 누구나 쌀을 퍼가도록 한 자선 쌀 뒤주 통이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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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 대문간 앞에는 커다란 통나무 쌀 뒤주 아래에 손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고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붙어있다. 이는 '필요한 사람 누구라도 문을 열고 쌀을 가져갈 수 있다'라는 뜻이다.

굶주린 사람 누구에게든지 쌀 뒤주를 연 운조루는 빨치산투쟁과 6.25전쟁의 치열한 이념전쟁에도 양 진영에서 피해를 입히지 않아 살아남았다.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토지> 배경이 된 하동 '최참판댁'을 가다

화개장터를 떠나 섬진강 하류로 10여 km 내려가면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이 나온다. 저 멀리 섬진강 자락이 보이고 최참판댁에서 내려다 보면 만석꾼 두 명 정도는 나옴직한 평야가 있다.

<토지>의 배경이 왜 하필 하동 평사리일까? 하동은 역사적 민족적 상처를 안은 민족의 영산 지리산과 국토의 혈맥인 섬진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일제치하에서 성장한 박경리는 전쟁과 산업화 시대를 체험하면서 인간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 모습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인 최참판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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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 앞에 펼쳐진 평사리 들판과 함께 저멀리 섬진강이 보인다.
 최참판댁 앞에 펼쳐진 평사리 들판과 함께 저멀리 섬진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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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뭇 생명에 대한 존엄과 평등, 사랑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작품속에 드러냈다. 다음은 그녀가 <토지>를 집필하게 된 배경에 대해 말한 것으로 박경리 문학관에 기록된 내용이다. <토지>는 6.25사변 이전부터 박경리의 외할머니가 어린 그녀에게 들려줬던 얘기를 소설로 썼다.
 
"외갓집 거제도 어느 곳에 끝도 없는 넓은 땅에 누렇게 익은 벼가 그냥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까지 거둘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미 호열자가 그들을 죽음으로 데려갔지요. 외가에 사람들이 다 죽고 딸 하나가 남아 집을 지켰다고 해요. 나중에 어떤 사내가 나타나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객줏집에서 설거지하는 그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본 마을 사람이 있었대요. 이 얘기가 후에 어떤 선명한 빛깔로 다가왔지요. 삶과 생명을 나타내는 벼의 노란색과 호열자가 번져오는 죽음의 핏빛이 젊은 시절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호열자는 콜레라를 말한다. 박경리 소설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 약 50년간이며 공간적으로는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만주 일대와 남으로는 일본 동경 등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근대화 과정에서 한중일의 관계를 서사 내에 끌어들이고 있다.
  
박경리 문학관 뜰 앞에 서있는 박경리 동상 모습
 박경리 문학관 뜰 앞에 서있는 박경리 동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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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육필원고와 성경책이 보인다.
 박경리 육필원고와 성경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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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은 거의 600여 명에 달하며 이들은 평사리를 중심으로 3세대에 걸쳐 확대된 관계를 통해 그려진다. 박경리 문학관에 적힌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라는 글귀를 보고 숙연해졌다. 다음은 그녀가 <토지>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매진했는가를 보여주는 글귀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채 <토지> 원고를 썼다"

한국서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을 기리는 사당 '영모제'

섬진강 종점인 광양 태인동에 가면 김여익을 기리는 사당인 '영모제'가 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기도 했던 김여익은 광양 태인도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해 식문화 발전에 일조했다.
 
광양 태인동에 있는 '영모제' 모습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을 기리는 사당이다.
 광양 태인동에 있는 '영모제' 모습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김양식에 성공한 김여익을 기리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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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를 '김'이라 부른 것은 김여익이 태인도에서 김양식법을 창안하여 생산품을 하동장에 내다 팔 때 태인도 김가(金家)가 기른 것이다'는 뜻으로 김이라 불렀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곡성투데이,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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