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최초의 여성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 클래식계의 스타답게 그녀는 인터뷰와 줄리어드 특강, 새 음반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예전에 함께 일했던 젊은 지휘자 '크리스타(실비아 플로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타르. 그녀는 크리스타의 구직을 방해하는 메일을 보냈던 자기 행적을 떠올리며 메일을 지우는 등 증거를 없애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 번 불붙은 불안함은 쉽게 가시지 않고, 가족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타르의 커리어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겨냥하다

관객은 여러 관점에서 예술을 즐긴다. 보이고 들리는 작품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현실의 맥락 안에서 작품을 이해하기도 한다. 작가의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방법이다. 한 작품으로부터 작가의 경험이나 사상, 의도 등을 찾아내는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정신과 의사였던 니콜라이 달에게 헌정되었다. 첫 교향곡이 실패한 후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던 라흐마니노프를 그가 치료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사는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이 평온해졌다가 이내 벅차오르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처럼 예술 작품을 작가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다 보면 한 가지 딜레마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바로 작가의 도덕성이다. '예술 작품이 작가의 세계관을 표현한다면, 예술은 어디까지 허용될까?' '작가의 도덕성과 예술의 가치를 별개로 볼 수는 없는 걸까?'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작가와 작품은 자유로울 수 없다. 아동 성범죄자인 로만 폴란스키가 세자르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을 때, 성매수 전과가 있는 한 중년 배우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할 때, 마약 범죄 전과가 있는 가수가 음원을 휩쓸었을 때. 그때마다 이들의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고 소비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을 맡은 < TAR 타르 >는 이 논쟁의 한복판을 겨냥하는 영화다. 토드 필드 감독은 사생활이 폭로된 여성 마에스트로, 리디아 타르의 추락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음악가로서 타르의 성취와, 지위, 예술적 견해를 차분히 보여준 후 그녀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추악한 모습을 하나씩 들춰 보인다. 이를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캔슬 컬처(cancel culture)'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유명인 혹은 공인이 논쟁이 될 만한 언행을 했을 때, 그의 지위나 직업을 박탈하려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할 기회를 준다.
 
당당한 마에스트로, 리디아 타르(TAR)의 예술

우선 < TAR 타르 >는 리디아 타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가능한 세밀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정보량이 굉장히 많은 초반부의 대담 장면은 그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5번째로 EGOT을 달성한 사람이라는 설명, 레너드 번스타인의 제자라던가 하는 등 실존하는 인물, 시상식, 사건 등이 난무한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따로 있다. 타르의 예술관이다. 그녀는 확고하다. 그녀에게 음악은 단지 악보에 적힌 기호를 살려내는 방식의 문제다. 그렇기에 무대 위의 시간이 시작될 때, 시간을 어떻게 통제할지가 가장 중요하다. 이어지는 대담도 다르지 않다. 여성으로서 일궈낸 업적이 대단하다며 '마에스트라'라고 불려야 되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여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자기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그러면서도 청중을 웃길 수 있는 위트도 잃지 않는다. 그 덕분에 타르는 강단 있는 예술가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셀럽처럼 보인다.

타르의 예술관은 줄리어드 음대 특강 장면에서 더 자세히 드러난다. 타르는 한 학생을 타깃으로 여러 질문을 하며 작곡가의 개인적인 성향과 음악 작품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한 퀴어 학생이 바흐의 성적 지향이나 여러 논란 때문에 그의 음악을 듣지도 않고 연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자 그녀는 다소 거친 말을 섞어 가며 자기 예술관을 설파한다. 그녀에게 음악은, 그리고 예술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음악은 지휘자나 작곡가, 연주가의 사상, 성 정체성이나 인종과는 관계가 없다. 악보에는 작가가 의도한 음악적 성취만이 적혀 있으며, 그 아름다움을 정해진 시간 안에 온전히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앞선 인터뷰 장면과 함께 놓고 보면 타르는 개인의 도덕적 문제나 정치적 견해에 예술이 영향받을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타르는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학생이 강의실을 나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그녀의 예술관에 고의적으로 도전하며, 그녀의 몰락을 유도한다.

쥐(RAT)처럼 숨어 있던 그녀의 이중성

타르의 몰락은 대외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이중성이 드러나며 시작된다. 깨어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악몽처럼 숨어 있던 타르의 오점은 가족, 직장인, 스승, 세 가지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선 타르는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저버린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콘서트마스터인 바이올리니스트 '샤론(니나 호스)'과 함께 딸을 양육하는 타르. 초반부만 해도 타르는 가족을 아끼는 부모이자 배우자였다. 학교가 끝난 딸을 데리러 가고, 학교에서 딸을 괴롭히는 학생에게 당장 그만두라고 섬뜩한 경고를 남긴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에 새롭게 합류한 '올가(소피 카우어)'를 만나고, 연심을 품으면서 타르는 점차 가족으로부터 멀어진다. 배우자이자, 조력자이고, 동승자인 샤론을 존중하지 않는 일도 잦아진다. 그녀는 오케스트라 운영에 대한 샤론의 조언을 무시한다. 자기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샤론이 제지하는데도 난폭 운전을 한다. 심지어 샤론 몰래 올가와 시간을 보내기까지 한다.
  
한편,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로서 타르는 독선적이다. 팬데믹 이후 필하모닉의 새로운 음반 녹음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타인의, 다른 의견을 수용할 줄 모른다. 부지휘자를 마음대로 해고하는 게 대표적이다. 또 부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되자, 타르는 자기 비서이자 젊은 지휘자인 '프란체스카(노에미 메를랑)'에게 채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희망을 흘린다. 하지만 정작 프란체스카가 지원서를 내자 타르는 주변의 추천도 무시한 채 그녀를 뽑지 않았다. 이에 프란체스카는 사표를 낸 뒤 잠적해 버린다. 또 스승으로서도 타르는 낙제다. 재능 있는 지휘자로 일전에 타르 밑에서 일했던 크리스타. 타르는 크리스타가 자기를 떠나자, 그녀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메일을 다른 오케스트라 관계자에게 보내 그녀의 취업을 막는다.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 지친 크리스타가 자살을 택하자 불똥이 튈까 우려해 증거물인 메일을 급하게 삭제하는 비겁한 모습까지도 보인다.

타르의 이중성은 크리스타의 부모가 딸의 죽음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줄리어드 특강 영상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유색인종 퀴어 학생에게 폭언을 하였으며 그 학생이 분노하여 수업 중간에 퇴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 영상으로 인해 크리스타의 자살과 연계된 타르의 혐의가 더욱 크게 공론화된다. 그녀의 뉴욕 북토크 현장에서 규탄 시위가 열릴 정도로. 결국 그녀는 필하모닉 지휘자 자리에서 쫓겨나다. 현재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지속되는 과거 때문에 그녀는 순식간에 몰락해 버린다. 마치 마치 음악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한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만날 수 있다는 타르의 인터뷰처럼.

예술(ART)은 어떻게 소비되어야 하는가

흥미롭게도 < TAR 타르 >는 권위적이고 성공지향적이면서도 트라우마와 나약함을 숨기는 타르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되, 그녀를 단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의도적으로 타르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거나, 추상적인 꿈 장면으로 대신해 버리면서 관객의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한 회색지대를 펼쳐 놓는다. 영화의 모든 사건을 오직 타르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삼자가 보기에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행동들도 그녀의 눈을 통하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 사건의 더 내밀한 맥락과 상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줄리어드 강의 동영상이 유포된 게 대표적이다. 강의 중 타르의 언행은 분명 권위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폭로 영상 자체는 편집되고 조작된 것이 분명하다. 영화는 이러한 회색지대 속에서 관객에게 타르를 판단해 보라고 부추기는 듯하다.

< TAR 타르 >의 태도는 주인공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타르를 소개하고, 개인적인 추문으로 인해 그녀의 경력이 무너지는 과정은 근래 뜨거운 이슈인 '캔슬 컬처'의 딜레마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캔슬 컬처가 현실을 과도하게 단순화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만 인식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이는 영화가 비행기에서 반쯤 엎드려 있는 타르를 직접 비추는 대신, 타르를 찍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비추면서 시작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세상을 일관된 질서로 손쉽게 인식하려는 편향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작가나 제작자가 물의를 일으키면, 그들의 작품을 부정해 버리는 게 가장 간단한 판결이므로.

이는 < TAR 타르 >가 의도적으로 회색지대를 만들어 낸 이유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이 스스로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려 한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문제를, 그간 너무 쉽게 단정 지었던 것은 아닌지. 편견과 흑백 세계관 속에서, 예술 작품의 의미와 메시지를 가볍게 취소해 버린 것은 아닌지. < TAR 타르 >는 타르의 음악이, 그녀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여전히 예술적 가치와 의미를 지닐지 고민하게 만든다.

질문을 질문으로만 남겨두었더라면

마지막 장면 때문에 < TAR 타르 >의 의도는 퇴색된다. 자기가 공연과 연주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타르. 그녀는 이제 필리핀의 작은 마을에서 영화 장면이 나오는 스크린에 맞춰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자기 예술관과는 정반대인, 비루한 오케스트라를 맡아서. 그런데 타르의 얼굴은 예상과 달리 생기 넘친다. 그 모든 사건과 추문에도 불구하고, 그저 음악을 느끼고 음악에 동화되면 그만이라는 듯 보인다.

이 결말은 마치 < TAR 타르 >가 캔슬컬처에 대해 토론하기보다는 성급히 답을 내놓는 것처럼 느껴진다. 타르가 몰락한 여러 이유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예술에 대한 작가의 순수성만이 중요하고, 타르의 몰락은 그녀의 예술이 침해받은 결과라고 영화는 결론을 내린 듯하다. 타르 본인의 악행, 오케스트라와 재단을 둘러싼 권력 다툼, 놀라울 만큼 빠른 캔슬 컬처 등의 다양한 이슈가 제대로 조명될 기회는 너무 쉽게 포기한다. 손님들의 지명을 받기 위해 부동자세로 대기하는 여성 마사지사를 보면서 자기 행동이 추악했다는 사실을 타르가 깨닫는 장면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의 결론에 힘을 보태기 위한 편의적인 전개라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화의 끝에는 케이트 블란쳇만 남는다. 자신감 넘치는 마에스트로가 추락하면서 내적으로 붕괴되는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자기중심을 잃은 상황에서도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스스로를 더 뜨거운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인물상을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했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양자경 대신 여우주연상을 받았더라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을 정도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 TAR 타르 >의 성급한 선택이 끝내 아쉬운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와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TAR 타르 케이트 블란쳇 캔슬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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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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