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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The) 인천'을 더(More) 알아가다. 지금 발 딛고 선 도시, 살아가는 동네, 그 안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인천 곳곳에 깃든 인천 사람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이번에는 인천의 얼굴들을 만난다. 바로 나와 너, 우리의 얼굴이다.[기자말]
ⓒ 류창현 포토 디렉터
 
ⓒ 류창현 포토 디렉터
 
오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 어느 누구를 어떤 표정으로 마주하는가. 때로 슬픈 날에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앞에서도 '웃음'이란 가면을 써야 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민낯 그대로의 '진정한 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가 없다. '나의 얼굴'이지만 오롯이 마주할 수 없다.

그 얼굴에 우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살아간다. 얼굴은 곧 삶이고 인생이다. 살아온 날과 살아가는 시간이 고스란히 쌓이고 쌓여간다. 순간순간 가속도가 붙는 인생의 흐름 속에 자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느 날 거울 속에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떠오를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로 남는다. 이 순간, 인천 안에서 '진정한 나'로 묵묵히 살아가는 얼굴들과 마주한다. 다른 듯 닮은, 네가 아닌 나, 우리 모두일 수 있는 그 얼굴을.

홍성선
 
훗날 누군가의 모습일 수도 있을 그 얼굴. "쭈글쭈글하니 못생겼지? 그래도 젊어서는 내 인물이 참 고왔는데." 할머니가 수줍게 웃는다. 누구에게나 화양연화는 있다. 나이테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에 봄 처녀 같은 화색이 돈다. ? ⓒ 류창현 포토 디렉터
 
이맘때면 문득 떠오르는 추억 하나.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날, 반딱반딱 윤기 나는 노트와 새 책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밤. 문방구 앞을 서성이며 나만의 보물찾기를 하던 오후의 하굣길. 그날의 설렘은 여전히 오래된 골목에 머물러 있다.

동구 인천창영초등학교 앞에 하나뿐인 문방구.

"400원짜리 세 개에다 2400원짜리 하나면 얼마지?"
"3600원이요."


돈 계산을 주인 아닌 손님이 한다. 그새 가격을 잊었다.

"얼마라고 했지? 얼마 거슬러 주면 돼?"

인장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이날 문방구를 찾은 동산고등학교 학생들은 창영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이 집 단골이었다. 이제 어른이 될 아이들보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아들, 딸 손 붙잡고 찾아와 안부를 묻곤 한다.

홍성선(79) 할머니는 스물셋에 충청도에서 인천으로 시집왔다. 바로 이 자리다. 한 3년 있다 동네 쪽으로 학교 문이 났다. 집마다 방을 허물고 가게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문구사, 큰 문구사,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분식집 등, 대여섯 가게가 줄지어 들어섰다.

1970년대 당시 영문고 간판에는 '어린이의 단골', '대한문구사'라고 새겨 있었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만물상 같던 문방구. 오전·오후반이 끝나면 까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때가 재미있었지." 창영초등학교 학생은 지난해 기준 단 181명. 얼마 전까지 학교를 다른 동네로 옮긴다는 말로 술렁였다.

"쭈글쭈글하니 못생겼지? 나이 드니 사진이 그렇게 안 나오네. 젊어서는 내 인물이 참 고왔는데."

할머니가 수줍게 웃는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찬란하고 화려한 시절은 있었다. 나이테 같은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에 봄 처녀 같은 화색이 돈다. 저세상으로 먼저 간 남편이 남긴 화초에, 얼마 전 고운 빛 꽃봉오리가 피어올랐다.

최윤서
 
고양이를 닮은 그 얼굴. 다소 창백한 피부에 깊은 눈매, 눈동자는 풍부한 암갈색이다. 눈빛은 강렬하다. "춤으로 무언가를 꼭 이뤄낼 거예요." 이 거대한 세상을 움직일 꿈이 오밀조밀 작은 얼굴에서 움트고 있다. ⓒ 류창현 포토 디렉터
  
165cm 키에 46kg 몸무게. 가녀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이제 만으로 갓 스무 살이 된 최윤서는 거리에서 춤을 추는 댄서다. 댄서 네임은 샴(Siam). 몸이 늘씬하고 유연하며 상아색 털빛을 내는 샴고양이와 이름처럼 닮았다.

"안녕하세요. 춤추는 최윤서입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춤을 추고, 춤을 추고서야 자유로워졌다. 그는 소래, 짠 내 가득한 풍경 안에서 나고, 바다의 들숨과 날숨에 호흡을 맞추며 살아왔다. 그에게 있어 바다는 곧 자유다.

"바다는 넓고, 파랗고, 밀려드는 소리도 좋아요."

언젠가는 영종도 바닷가에서 밤부터 늦은 새벽까지 친구들과 춤을 췄다. 기분 좋게 쌀쌀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다. 그날의 공기, 온도, 습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지금도 살갗에 닿듯 생생하다. 나이가 몇인지, 어떤 집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춤추는 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잣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유, 몸짓 하나하나에 가슴이 가득 차오른다.

오늘은 '제물포 르네상스'의 꿈이 빛나는 인천 내항 앞바다가 그의 무대다. 10m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고 열린 바닷길, 인천의 새로운 미래가 그 바다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인생이란 무대에 '댄서 샴'으로 당당하게 오를 거예요.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반드시 이뤄낼 거예요."

그 삶의 좌표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다.

살다 보면 젊은 날의 나는 잊어버린다. 언제부터인가 꿈에 한계선을 긋고, 타협하고, 단념해 버리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하나 청춘들은 이 거대한 세상 앞에서, 자신의 꿈을 내려놓지 않는다. 순수와 열정의 시절을 지나, 살면서 때로 실패하고 무너지며 다짐을 놓지는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 꿈은 언제든 다시 꾸고, 또 이룰 수 있으니.

최에릭, 최마리안나
 
우리와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그 얼굴. 누군가는 태어난 나라에서도, 찾아온 어버이의 땅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아야만 한다. 마음속에 자신만의 지도를 그리고, 그리움을 간직한 채. ⓒ 류창현 포토 디렉터
  
최에릭(69)은 고려인 3세다. 22년 전, 돈을 벌기 위해서 아내와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왔다. 그에게 허락된 업은 우리가 힘들다고 기피해 온 일이 대부분이었다. 식당 허드렛일, 쓰레기 처리, 공사장 일용직을 전전했다. 충북 음성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왼손이 빨려 들어가 손가락 한 마디를 잃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한평생을 하루처럼 그리워하던 고향 땅은, 그에게 따듯하지만은 않았다.

2017년에 인천으로 왔다. 큰딸 최마리안나(45)와 둘째 딸 최나제지다(43), 막내아들 최예프게니(35), 온 가족이 연수구 함박마을에 모여 살았다. 1년 후 타지키스탄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 일을 하던 큰딸 최마리안나가 CIS 선교비전센터를 열었다. 처음엔 어린이들을 돌보는 작은 선교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초중고 190명 학생을 품은 '글로리아상호문화대안학교'로 성장했다.

"우리 아이들은 집과 친구들을 남겨둔 채, 부모를 따라서 이 땅으로 왔어요.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꿈을 키우고,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야죠."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멀고 먼 길을 떠돌며 백년 나그네로 살아온 고려인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곳이라고 여겼던 어버이의 고향 땅이지만, 다시 돌아온 한국도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지평선이 아득히 펼쳐진 광활한 대지가, 바다와 같은 호수가 문득 그립기도 하다. 그런데도 결코 떠날 수 없다.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 땅에서 살 겁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고향은 그런 존재다.

오지은, 다비드
 
파란 눈, 흰 피부의 얼굴을 한 인천 사람. "나는 ‘이상한’ 사람이에요." 색다르고 특별하고 재미있는 ‘이상한’ 사람. 토박이인 아내보다 인천을 더 잘 알고, 그 못지않게 인천을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 ⓒ 류창현 포토 디렉터
 
"봉주르(bonjour)"보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자연스럽다. 파란 눈, 흰 피부의 다비드(David)는 자신을 '인천 사람' 아니 '연수 사람'이라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아내의 나라에 머물러 살고 있다. 어느덧 50대, 인생의 절반을 살았다.

그 전 삶의 반은 프랑스에서, 반은 중국에서 보냈으니 한국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긴 시간 집을 떠나야만 했던 아내를 위해, 두 아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그 자신을 위해.

17년 전, 인천으로 올 때 다섯 살이던 큰아들은 지금 군대에 있다. 이제 막 혹한기 훈련을 마쳤다며 부부가 싱긋이 웃는다. 인천중앙초등학교 옆 담 너머 1층 집, 준비물을 잊었거나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이 '엄마~' 하고 부르곤 했다.

동네 아이들의 아지트였던 집은 이웃들이 놀이방으로 오해할 만큼 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았다. 남들은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고 산다는 아파트였다. 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도 받았지만, 다른 게 사실이니 뭐, 어떠한가. 두 아들은 '양키', '치즈'라고 불릴 때면 씨익 웃고는 치즈가 그려진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돌아보면 행복하게 잘 살았다. 일상을 흔드는 미세한 파장조차 없이, 하루하루가 꽤 괜찮았다. 좋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예요."
"살다 보면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반드시 와요. 하지만 다 지나가죠. 곁에 '사람'만 있다면."


서로를 '완벽한 팀'이라고 이르는 부부는 살면서 가장 먼저 두는 삶의 가치도 한마음이다.

가끔은 프랑스 남부 지방의 완벽한 기온이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첫눈에 반한 모습 그대로 '웃는 얼굴'의 아내가 있다. 그 미소가 고향에 비추던 봄날의 햇살 같다.

봄이 무르익으면 아내 손을 잡고 공원에서 페탕크(petanque, 프랑스 남부에서 기원한 구기 스포츠)를 한판 벌여야겠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이웃과 봄날의 소풍을 즐겨야겠다.
 
글 정경숙 본지 편집위원│사진 류창현 포토 디렉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3년 3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굿모닝인천, #더인천,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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