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역사와 정치의 거대한 흐름은 개인의 삶에도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아무런 잘못 없이도 시대의 격랑속에 휩쓸려 억울한 고통을 받아야 했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사연은 과거나 현재나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사랑받던 금지옥엽의 공주로 태어나, 한 많은 비구니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1474) 역시 비극적인 시대가 낳은 안타까운 희생양이었다.
 
3월 8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46회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왜 비구니가 되었나' 편을 통하여 계유정난의 역사 속에 가려진 한 여성의 비극적 삶을 조명했다.
 
경혜공주는 조선 5대 국왕 문종과 후궁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세종대왕이었다. 사실 경혜공주는 원래대로라면 공주가 될 운명은 아니었다. '공주'라는 칭호는 국왕과 정실부인인 중전에게만 쓸 수 있었고, 후궁의 딸은 옹주로 불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실이었던 순빈 봉씨와 휘빈 김씨가 물의를 일으켜 줄줄이 폐출되면서 권씨와 경혜공주의 운명도 바뀌었다. 국왕인 세종은 세 번째 며느리를 고심하다가 이미 검증된 후궁 중에서 평판이 좋고 후덕한 권씨를 세자빈으로 낙점한 것. 여기에는 후사가 급했던 세종이 이미 자녀를 낳은 경험이 있는 권씨에게 손자를 얻을 가능성도 높다고 기대한 것도 있었다.
 
문종과 권씨 사이에는 원래 딸이 한 명 더 있었지만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두 번째로 얻은 귀한 딸이 바로 경혜공주였다. 그렇게 공주의 자리에 오른 경혜공주는 왕실의 적장녀로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그리고 경혜공주가 7살이 된 1441년에는 세종의 기대 대로 권씨가 아들을 출산하기에 이른다. 그가 바로 경혜공주의 남동생이자, 조선의 6대 국왕이 되는 단종 이홍위였다.
 
하지만 단종이 태어난 기쁨도 잠시, 다음날 경혜공주와 왕실에게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닥쳐온다. 바로 모후인 권씨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 경혜공주와 단종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었다. 이는 이후에 닥쳐오게 될 조선왕실의 비극의 서막에 불과했다.
 
금지옥엽으로 자란 공주에게 닥친 비극

비록 어머니를 잃었지만 경혜공주는 6살 터울의 남동생을 잘 보살폈고, 단종도 누나를 잘 따르며 남매는 외로운 궁궐생활을 서로 의지해나갔다. 9년 후인 1450년(세종 32년), 16세가 된 경혜공주는 혼인을 올리고 남편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해주 정씨 가문의 정종(鄭悰)이었다.
 
경혜공주가 혼인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할아버지 세종이 승하한다. 그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된 문종은 이때에 이르러 정식으로 '경혜공주'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몸이 병약했고 설상가상 아버지 세종의 상을 치르면서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문종의 경혜공주에 대한 애틋한 부정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451년 문종은 도성 양덕방(지금의 서울 경복궁 인근 북촌 일대)의 인가 30여 채를 허물고 경혜공주 부부를 위한 신혼집을 지어주게 했다. 이 지역은 당시에도 고관대작과 권세가들이 기거하던 부유한 동네였고, 왕의 딸을 분가시켜주기 위하여 이들을 쫓아내고 강제 철거했다는 것이다.
 
신하들은 반대하며 '사람들의 원망을 살 수 있으니 명을 거두라달라' 청했지만, 문종은 거주자들 대부분이 일반 백성이 아닌 고관들이라 얼마든지 다른 집에 가서 살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문종의 이러한 결정은 당대 기준으로도 파격에 가까웠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대중적으로 유약한 이미지와 달리 문종의 왕권이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경혜공주는 문종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으로 행복한 신혼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행복도 잠시, 1453년 경혜공주에게 또다른 가슴 아픈 순간이 찾아온다. 아버지 문종이 건강이 악화되며 끝내 세상을 떠난 것. 문종의 적장자이자 경혜공주의 동생인 단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경혜공주의 나이 18세, 단종은 12세였다. 남매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조부모를 모두 잃고 둘만 남겨지는 상황에 처했다. 남매는 문종의 사망 이후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하지만 1453년 10월 10일, 남매의 일생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비극이 벌어진다. 단종 즉위 1년 만에 경혜공주와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한 것. 수양대군은 고명대신인 김종서-황보인 등을 척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13살이 된 단종은 누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수양대군에게 쿠데타 소식을 전해 들어야 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일파가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하며 조정을 장악하기 위하여 왕의 명패를 요구했다. 힘이 없었던 단종은 무력하게 벌벌 떨며 "삼촌,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수양대군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문종의 사랑이 담긴 신혼집이 남매에게는 비극의 무대로 전락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한 차례 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궁궐에는 이제 경혜공주 남매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 일파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긴 경혜공주 남매는 숨을 죽인채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 1455년 6월, 이번엔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이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정종은 단종의 또다른 숙부인 금성대군과 가까운 사이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적이자 근왕파였던 동생 금성대군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단종의 매형으로 잠재적인 위협세력이 될 수 있는 정종까지 미리 제거하려 했던 것.
 
치밀하게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해간 수양대군은 결국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2년 만에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조선 7대 국왕 세조였다. 부모의 이른 죽음에서 남편의 유배, 동생의 폐위를 모두 지켜봐야 했던 경혜공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세조, 경혜공주 부부의 재산까지 몰수

경혜공주는 와병을 호소하며 세조에게 소식을 알려서 남편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세조는 민심을 고려하여 경혜공주에게 약과 어의를 보내고 정종을 잠시 유배에서 풀어주는 듯했지만, 경혜공주가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다시 정종을 유배보낸다.

이에 경혜공주는 죄인이 아니었음에도 남편을 따라 함께 험난한 유배길에 오를 것을 자청한다. 이후로도 경혜공주 부부는 수차례나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난 일을 반복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금슬 좋게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1456년 부부의 소박한 행복마저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복위운동을 시도했던 사육신의 역쿠데타가 발각되며 실패로 돌아간 것.
 
그리고 그 불똥은 상왕으로 밀려나있던 단종과 유배지에 있던 경혜공주 부부에게까지 옮겨갔다. 당시 정종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한 증거는 없었지만 세조 측의 진짜 목적은 자신을 위협할 만한 세력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을 미리 차단하는 데 있었다는 게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세조는 경혜공주 부부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비까지 쫓아냈다. 금지옥엽의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는 공주로서의 고귀한 삶을 모두 내려놓고 집안일 등 온갖 궃은 일을 직접 해결해야만 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457년 사육신 사건에 연루된 동생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간 데 이어, 그해 10월 21일에는 끝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으며 운명을 달리했다. 이로써 경혜공주의 유일한 남은 혈육이던 동생마저 세상을 떠난 것.
 
세조는 조카 단종을 제거한 뒤에도 경혜공주 부부를 향한 감시와 핍박을 멈추지 않았다. 유배지 인근의 담을 높이 쌓고 자물쇠를 밖에서 잠궈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부부는 집안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야 했다.

불안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부부에게 그나마 한 가닥 위안이 된 것은 첫 아이인 정미수의 출생이었다. 혼인과 동시에 세종과 문종의 연이은 삼년상, 계유정난과 유배 등의 비극에 휘말려서 자녀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던 부부에게는 9년 만에 찾아온 선물같은 아이였다.
 
1461년, 세 가족의 소박한 행복마저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불교를 믿었던 정종이 외부인과 접촉 금지령을 어기고 유배지에서 승려들과 교류하다가 발각된 것. 세조는 이를 빌미로 정종을 역모죄로 체포하여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그런데 정종은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께 죄를 받았으니 어찌 아픔이 있으리오"라며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오랜 세월 세조의 탄압에 시달리며 지친 정종이 더 이상의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경혜공주는 유배지에서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어야 했다.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경혜공주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마음껏 추스를 시간도 없었다.
 
27세 승려가 된 경혜공주

당시 세간에는 세조가 대역죄인의 가족이 된 경혜공주를 고귀한 공주에서 비천한 노비 신분으로 강등시켰다는 소문도 돌았다. 또한 한 야사에는 수령이 경혜공주에게 허드렛일을 할 것을 지시하자 공주가 돌연 관아 수령의 자리에 앉더니 "나는 공주다. 비록 죄를 지어 이곳에 왔지만 어찌감히 수령 따위가 일을 시키려고 하느냐"며 꾸짖었다고 한다. 그 위엄에 눌린 수령은 끝내 경혜공주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못했다고 한다.(1648년 윤근수의 '월정집')

다만 이는 실록의 공식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다. 여러 기록을 교차검증했을 때 경혜공주가 관노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구체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단지 이는 당시에도 세간의 민심이 경혜공주의 안타까운 처지를 동정하고 세조의 냉혹함에는 비판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된다.
 
시간이 흘러 세조는 경혜공주 모자를 돌연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불러들인다. 경혜공주에게는 평생의 원수인 세조와 무려 7년 만의 재회였다. 본심이야 어찌됐든 경혜공주로서는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피맺힌 한을 가슴에 묻고서 세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종실록>에는 뜻밖에도 '세조가 경혜공주를 만나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겨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있다. 평생에 걸친 세조의 잔혹무도한 행적이나, 그간 경혜공주에게 했던 짓들을 감안하면 진정성에 의심이 가는 기록이다. 하지만 당시 세조 입장에서 보면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데다, 더 이상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경혜공주를 보고서 설사 작은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세조는 경혜공주를 '선왕 문종의 딸'로 인정하여 공주의 직위와 재산을 회복시키고, 그 자식들도 아버지 정종의 죄와 더이상 연루시키지 말 것을 지시한다. 당시 임신중이던 경혜공주는 세조의 경제적 지원 속에 둘째 딸을 한양에서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경혜공주는 이제부터라도 자식들과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보냈을까? 놀랍게도 경혜공주는 출산 이후 돌연 자녀들을 남기고 정업원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녀의 나이 27세에 불과했다. 복권된 공주로서의 혜택과 권리도 모두 포기했다.

심지어 목숨같이 지키려 했던 자식들을 의탁한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세조의 아내인 숙모 정희왕후였다. 철천지원수의 집안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마지막 희망을 맡겨야만 했던 경혜공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경혜공주가 자신의 속내를 직접 밝힌 적은 없기에 우리는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상상과 추론만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자식들을 위하여 겉으로는 복수를 포기하고 세조와의 악연을 끊어내야 했지만, 그럼에도 남편과 동생을 죽인 원수를 인정하고 그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던 현실은, 경혜공주에게는 참기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경혜공주 입장에서 정희왕후는 비록 원수 세조의 아내이기는 하지만 경혜공주와 직접적인 원한은 없는 데다, '왕비'라는 위치는 현실적으로도 훗날 만일의 외풍으로부터 공주의 자녀들을 믿고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지였다. 정희왕후 역시 경혜공주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기꺼이 자녀들을 돌봐주기로 약속했다. 공주는 그렇게 모든 원한과 슬픔을 내려놓고 불가에 귀의하여 동생과 남편의 명복을 빌어주는 기도에만 전념했다.
 
1468년 경혜공주에게 평생의 악연이던 세조가 52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과 불면증, 피부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았다고 전한다. 세간에서는 그가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죄책감과 업보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경혜공주에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5년 뒤 경혜공주도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불과 39세였다. 공주의 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있으며 그 옆에는 남편 정종의 가묘도 작게나마 함께 세워져 있다.

다행히 경혜공주 부부의 아들인 정미수는, 성종 즉위 이후 관직에 올라 승승장구하니 생전 자녀들의 평안을 바랐던 공주의 마지막 바람만큼은 결국 이뤄질 수 있었다. 경혜공주의 기구한 삶은, 비극적인 시대의 풍랑 속에 휩쓸리며 잊혀지기 쉬운 개인들의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고 역사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벌거벗은한국사 경헤공주 세조 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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