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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김상진>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긴 김상진 열사의 육성 양심 선언문. 그는 1975년 4월 서울대에서 이 글을 낭독하고 할복했다.
 <1975 김상진>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에 담긴 김상진 열사의 육성 양심 선언문. 그는 1975년 4월 서울대에서 이 글을 낭독하고 할복했다.
ⓒ 1975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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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김상진(26).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인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고 문익환 목사가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외쳤던 이름 중 한 명이다. 김상진 열사는 1980년대 이전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한 서울대 농과대 학생이었다.

그는 1975년 4월 학원 자율화와 언론 자유 문제로 연 학내 집회에서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라고 외치며 할복 자결을 시도했다. 긴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두 차례 수술에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 날 숨졌다.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중략)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중략)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후략)"

그는 이날 '양심 선언문'과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규탄했다. 동료 학우들에게는 유신독재를 상대로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해" 싸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공포의 병영국가"를 만든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책임을 물으며 결단을 요구했다.

사태 확산을 우려한 유신정권은 사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열사의 시신을 강제적으로 화장하고, 보도 금지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김상진 열사의 외침은 이후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불씨가 됐다.

서울대는 한 달 뒤인 5월 1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열사 추도식을 열었고, 이는 긴급조치 9호 철폐를 외치는 시위로 이어졌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목소리가 더 크게 확산하게 된 것이다. 김상진 열사는 20여 년 뒤인 2000년대 초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거쳐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을 받았다.
 
<1975 김상진>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
 <1975 김상진>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
ⓒ 1975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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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서울대 농대 후배인 안병권(79학번) 감독의 손으로 완성됐고, 부산에서 특별시사회를 연다. 부산 지역 등에 있는 서울대 농대 동문들과 민주항쟁 단체가 영화 상영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번 시사회는 서울대 관악캠퍼스, 광주, 전주에 이어 네 번째다.

상영 날짜와 장소는 3월 10일 오후 6시 30분 부산영화체험박물관 다목적영상홀이다. 이 행사는 (사)김상진기념사업회,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가 공동 주최하며 이야기농업연구소가 주관한다. 관람료는 받지 않는다.

안병권 감독은 부마항쟁이 발발한 부산에서 김상진 열사의 다큐 시사회를 여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안 감독은 "열사의 삶과 투쟁이 70년대를 끝내는 도화선이 됐고, 유신독재의 종말을 고한 부마항쟁으로 연결됐다"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기 민주화운동을 다룬 드문 다큐 영화란 점도 부각했다.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민주주의 운동 흐름은 1987, 1991을 통해 여러 번 다뤄졌지만, 박정희 유신독재가 판을 치던 1970년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본 스토리는 많지 않았다"라며 "시대와 맞서 싸운 열사와 함께 그 영향을 받고 사회발전에 헌신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라고 말했다.

부산 시사회가 끝나면 이 영화의 다음 일정은 김상진 열사 48주기가 돌아오는 4월, 경기도 수원이다. 자세한 내용은 <안병권TV>를 참조하면 된다.

태그:#1975 김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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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보성 기자입니다. kimbsv1@gmail.com/ kimbsv1@ohmynews.com 제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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