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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배델 묘비 앞에서 필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배델 묘비 앞에서 필자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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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잠든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베델은 영국 언론인으로서 구한말 일제 침략과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했다. 필자가 이날 베델의 묘지를 갑자기 방문한 것은 그의 동상 건립 소식을 전하고 내 고향 '보물'과의 특별한 인연을 되새기려는 취지이다.

경천사지10층석탑 무단반출을 고발한 언론인 배델
 
경천사지 10층석탑
 경천사지 10층석탑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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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일제강점기 빼앗긴 우리 고향의 경천사지10층석탑(국보 제86호)을 되찾는데 앞장선 외국인 독립운동가이다. 문화재 약탈에 대한 문제 제기와 국내송환 주장 등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경천사탑은 아직도 우리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

경천사탑은 본래 미수복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터에 있던 고려시대 불탑이다. 불탑의 화려함의 극치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은 이 아름다운 탑에 눈독을 들이고 1907년 일본으로 무단반출했는데, 베델은 국외에 그 부당성을 폭로하고 국내송환을 주장했다.

결국 일본은 비등한 국제여론에 밀려 1918년 석탑을 한국에 반환했다. 이처럼 베델은 개풍군 실향민의 정체성인 경천사탑을 우리 품에 안기도록 힘써 개풍군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이북도민회와 개풍군지 등 기록을 보더라도 일제시대 이전부터 개풍군민들은 경천사탑으로 소풍을 떠나거나 이곳에서 각종 행사를 개최했다. 고향을 이야기할 때 늘 떠올리는 곳도 경천사탑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경천사탑이 1960년 경복궁에 전시됐을 때 가장 먼저 반기고 탑을 얼싸안고 눈물 흘린 것도 개풍군민들이었다. 그 감회는 마치 헤어진 이산가족을 만나 기뻐하는 심정이었다.

이후 군민회의 각종 실향민행사와 애향모임도 경천사탑 주변에서 할 정도로 개풍군민들의 애정은 깊었다.

경천사탑이 2005년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때도 개풍군민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고향 보물이 '국박'에 전시되다니 이는 미수복 개풍군의 위상과 자부심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베델 동상 고국 영국에 세워진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현지시각 4일 (현지시각) 런던 한식당에서 토마스 오웬 베델 손자 내외 2명을 만나 위문하고 2022년 우정사업본부에서 발행한 베델 기념우표집을 전달하고 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이 현지시각 4일 (현지시각) 런던 한식당에서 토마스 오웬 베델 손자 내외 2명을 만나 위문하고 2022년 우정사업본부에서 발행한 베델 기념우표집을 전달하고 있다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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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의 동상이 그의 고국에 건립된다는 소식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정부는 <한영수교 140주년>을 맞아 베델의 동상 건립을 그의 고향인 브리스틀에 추진하고 있다. 브리스틀시에 건립의사를 전하는 동시에 베델의 손자 등 후손을 찾고 생가 표지판을 설치하는 등 세부 작업이 진행 중이다.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취재 차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신문 대한제국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베델은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의 야욕을 고발하고 억눌린 한국인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으로서 민족지도자들을 신문사 주간으로 영입해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 <코리아데일리> 뉴스를 통해서도 일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등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대해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 논설에 깊이 고무된 베델이 이를 찬양하는 기사를 대한매일신보에 싣고 호외까지 발행하며 일본을 규탄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일본은 한국을 옹호하는 베델을 탄압하고 영국에 그의 추방을 요구하는 등 소송을 걸자 배델은 여러 번 재판을 받고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을 상하이에서 살기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서울로 왔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얻은 병으로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

경천사십층석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앙로비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개풍군 실향민들은 설과 추석 등 명절 때 석탑을 찾아 향수를 달래고 있다. 경천사탑을 고향의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천사탑은 개풍군민들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는 것처럼 귀향의 숙제를 안고 있다. 경천사탑 본래 위치가 미수복개풍군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문화재 공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자 순리이다.

베델은 개풍군민에게 할아버지 조상

사후 114년만에 영국 고향에 베델 동상 건립이 추진된다니 개풍군민인 나도 두 손 들어 환영하는 바이다. 경천사탑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할 때 베델은 우리와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개풍군민에게 할아버지 조상이 되는 셈이다.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동상이 영국에 건립되는 것은 처음이라 한다. 기회가 된다면 개풍군민들은 베델의 후손들과도 교류하고 동상건립에 작지만 뜻을 보태고 싶은 심정이다.

1950년 정부는 베델의 공훈을 인정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10년 장지연이 쓴 베델의 묘비에는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동포를 구하기를 바란다"는 베델의 유언이 새겨져 있다. 그의 유지대로 대한민국은 그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배델, #대한매일신보, #영국언론인, #경천사지10층석탑, #개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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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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