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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고갯길을 계절마다 걸으며 수려한 자연이 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찾아 이야기합니다. [기자말]
백두대간의 운봉고원으로 이어진 계곡에 입춘 절기가 지나자 버들강아지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백두대간이 지리산 주능선으로 힘찬 진입을 앞두고 운봉고원에서 평원을 펼치며 잠시 숨을 고른다. 백두대간 산줄기는 운봉고원의 남쪽으로는 여원치(477m)를 북쪽으로는 팔량치(513m)를 고갯길로 열어놓았다.
 
버들강아지. 입춘 절기가 지나자 계곡에 버들강아지가 기지개를 켠다.
 버들강아지. 입춘 절기가 지나자 계곡에 버들강아지가 기지개를 켠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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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량치는 함양군 함양읍에서 운봉고원(남원시 인월면)으로 올라오며 경남과 전북의 경계가 되고, 여원치는 남원시 이백면에서 운봉고원(남원시 운봉읍)으로 올라오며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가 된다. 함양군(咸陽郡)은 본래 속함군(速含郡)인데 신라 경덕왕(咸陽郡) 때에 천령군(天嶺郡)으로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 함양군이 되었다.

백두대간으로 오르는 하늘 고개라는 의미의 천령군은 참으로 아름다운 지명이었다고 생각된다. 천령군의 속현이던 운봉고원의 운봉현(雲峰縣)은 고려시대 왕건에 의해 남원에 편입되었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가 이어지는 여원치와 팔량치 사이의 운봉고원은 고려말 황산전투의 역사적 현장으로 의미가 크다.
 
팔량치. 팔량치는 함양군 함양읍에서 운봉고원(남원시 인월면)으로 올라오며 경남과 전북의 경계가 된다.
 팔량치. 팔량치는 함양군 함양읍에서 운봉고원(남원시 인월면)으로 올라오며 경남과 전북의 경계가 된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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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족의 전술을 활용한 황산전투의 고려군

1380년 8월에 왜구는 500척의 병선으로 금강 하구 진포를 침략했다. 이 진포전투에서 고려군은 100척 병선의 화포 공격으로 왜구의 전함을 대부분 불태웠다. 전력의 대다수를 상실한 왜구는 금강을 따라 내륙으로 이동하였다. 고려의 역참과 조운 제도로 구축된 도로와 교통망을 타고 내륙에 활동하던 다른 왜구들과 세력을 합쳤다.

왜구는 추풍령을 넘어 함양의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을 물리치고 백두대간의 운봉고원을 넘어 남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원산성 전투에서 고려군에 패하여 왜구는 다시 운봉고원으로 돌아와 황산에 주둔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 등을 중심으로 증원군(增援軍)을 파견하였다.

이성계 장군의 주력부대인 가별초는 고려인 몽골인과 여진인 등으로 구성된 기병 부대였다. 이 가별초는 몽골군, 여진족, 홍건적과 왜구 등과 싸워 승리를 계속한 전투력이 출중한 군대였다. 가별초는 동북면 지역의 이성계 장군 가문에서 약 200년의 이어온 전투 부대로 충성심 강하고 실전 경험이 많았다. 가별초 부대는 대라(大螺)를 불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대라 소리는 아군에게는 든든한 승리의 희망이었다.

예로부터 여진족이나 몽골족 등 초원지대 유목민족은 매사냥과 몰이사냥에 능숙했다. 몰이사냥 방식은 전쟁에서 효과적인 전술로 활용되었다. 말을 타고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포위망에 갇힌 사냥감을 천천히 사냥의 지휘자가 있는 방향으로 유도했다. 여진족과 전투가 많았던 동북면의 고려군은 이 몰이사냥을 적용한 전술에 익숙하였다.

역사는 고려말 1380년 9월의 황산대첩을 '이성계 장군이 남원에서 출발하여 여원재를 넘어 운봉 황산으로 진군하여 정산에 올라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용맹한 군사들이 서로 호응하며 왜구를 공격하여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을 모두 무찔렀다'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황산. 황산 지형은 마주 보고 달려온 산줄기의 좁은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험준한 지형이 있다.
 황산. 황산 지형은 마주 보고 달려온 산줄기의 좁은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험준한 지형이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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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이상훈, 2012, <군사 연구>)에 의하면 1380년 8월의 진포전투, 사근내역전투, 남원성전투와 9월의 황산전투는 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근내역 전투에서 왜구는 추격을 계속하는 고려군 부대를 물리치고 남원 방면으로 진로를 모색했지만, 고려군의 반격과 압박에 다시 운봉고원의 인월 방면으로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진포전투에서부터 고려군이 왜구를 계속 압박하여 왜구를 지리산 구역으로 몰아넣고, 남원산성을 방어막으로 왜구가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게 백두대간의 산악지역인 인월역 인근에 가둬버린 셈이었다. 그리고 이성계 장군이 참여한 증원군이 도착하여 황산전투가 전개되었으니 고려군의 전략은 성공적인 포위 섬멸 작전이었다.

황산전투에 참여한 고려군의 총병력은 2만 명으로 추정한다. 사근내역 전투 병력이 약 1만 명이고, 이성계 장군의 가별초를 포함한 증원군이 약 1만 명이다. 황산전투에서 왜군의 병력은 1만 명 이하일 것이다. 황산전투에 참여한 이성계 장군의 정예병은 약 1600명일 것이며 이 가별초 병력이 황산전투의 핵심 활동을 한 것으로 본다.

운봉고원에 평지가 많은데 황산 지형은 마주 보고 달려온 산줄기의 좁은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험준한 지형이 있다. 고려군이나 왜구의 주력 부대는 기병이었는데 험준한 이 지역이 활발한 전투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 2만 명의 고려군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여 왜구를 황산 지역으로 몰아붙이고 이성계 장군과 가별초가 중심에서 활약하여 크게 승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산전투에서 살아남은 왜구 70명만이 지리산 방면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황산에서 폭 좁은 하천 건너편의 마주하는 산줄기는 바래봉과 세걸산으로 이어져 만복대의 백두대간으로 연결된다. 이 산줄기를 타고 소수의 왜구가 도망갔다면 고려군이 쉽게 추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1380년 9월의 황산전투는 고려말 왜구의 준동을 잠재우는 계기가 되었다. 권문세족이 지배하는 고려의 정계에서 주변부 동북면 출신의 이성계 장군은 황산전투 이후에는 고려의 새로운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백성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성산 흥부마을 입구. 팔령치 고갯마루 옆에 흥부전의 배경으로 흥부의 출생지인 인월면 성산 흥부마을이 있다.
 성산 흥부마을 입구. 팔령치 고갯마루 옆에 흥부전의 배경으로 흥부의 출생지인 인월면 성산 흥부마을이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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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전투가 전개될 무렵 정도전(1342-1398)은 유배 이후 복직을 기다리며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정도전의 '三峯集'(삼봉집)에 실려 있는 오언율시'避寇(피구, 도적을 피하다)'는 한시를 해석하며 고려 백성들의 참담한 정경과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상상해 보았다.

避寇難吾土 攜家走異鄕 피구난오토 휴가주이향
荊榛行目蔽 桑梓耿難望 형진행목폐 상재경난망
世險憐兒少 家貧仗友良 세험련아소 가빈장우량
乾坤空自闊 獨立興蒼茫 건곤공자활 독립흥창망

 
왜구가 우리 사는 땅을 어지럽히니 벗어나고자, 가솔을 이끌고 낯선 마을로 달아났네.
가시나무와 잡목이 앞길을 가로막으니, 고향이 눈에 어리나 바랄 수 없네.
세상이 위태로우니 아이들 어려서 가엾고, 가솔이 곤궁하니 벗이 어질어 의지하네.
하늘땅이 헛것인 양 스스로 거칠어, 홀로 서니 차갑고 아득함만 일렁이네.


1383년에 정도전은 고려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기대를 받으며 떠오르는 영웅인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 장군의 막사로 찾아가서 참모가 된다.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의 지원을 받으며 고려 정계에 복귀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기반을 닦아나간다.

팔량치 고개에서 출발하는 흥부대박길

황산전투가 전개되었던 황산을 운봉고원 북쪽 연비지맥의 연비산(鳶飛山, 843m)이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연비산 아래에 있는 팔령치 고갯마루 옆에 흥부전의 배경으로 흥부의 출생지(出生地)인 인월면 성산 흥부마을이 있다. 멀지 않은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의 발복지(發福地)이다. 흥부전의 배경지로 인월면과 아영면의 두 흥부 마을을 연결하는 '흥부대박길'이 2020년에 조성되었다.
 
흥부전 고난의 길. 인월면 성산마을에는 흥부 가족 조형물이 있다.
 흥부전 고난의 길. 인월면 성산마을에는 흥부 가족 조형물이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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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의 내용을 상징하여 '고난길, 희망길과 고진감래길'로 3개 구간 14km의 길이다. 3개 구간은 인월면 성산리부터 인월면 자래리까지 4.65㎞, 이어서 아영면 갈계리까지 3.25㎞, 이어서 아영면 성리까지 6.10㎞의 의미 있는 길이다.

인월면 성산마을에는 흥부 출생지 비석, 흥부 가족 조형물, 박첨지네 텃밭과 서당터가 있다. 아영면 성리마을에는 흥부생가, 박꽃공원, 박춘보의 묘와 흥부소공원이 흥부대박길의 정체성을 튼실하게 하고 있다.
 
흥부전 고진감래의 길.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의 발복지이다.
 흥부전 고진감래의 길.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의 발복지이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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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고개로 오르는 운봉고원에는 이성계 장군과 황산전투의 전해오는 이야기와 설화가 많으며 지명에도 적잖이 반영되어 있다. 길을 걸으며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고 들으면 과거의 역사와 문화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계절마다 무성할 것이다. 입춘이 지나면서 매서웠던 겨울과 달리 바람결에도 온정이 느껴지고 걸음걸이가 가벼워진다.

덧붙이는 글 | 앞으로 천천히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의 지리산 자락으로 발길을 넓혀가려고 합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에도 올라보며 이야기를 찾을 계획입니다. 지리산의 야생화도 만나고 싶습니다.


주요 지리정보

태그:#운봉고원 팔령치, #성산 흥부마을, #성리 흥부마을, #흥부대박길, #함양 천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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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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