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보내준 차와 편지는 도착하였네. (...) 금년들어 병으로 체증이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茶餠(떡차) 덕분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다산 정약용이 1830년 3월 15일 강진에 사는 이시헌에게 차를 청하면서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강진 유배에서 벗어나 남양주에 머물고 있던 다산이 세 번 쪄서 세 번 말리는 제다법인 삼증삼쇄(三蒸三曬)를 주문한 것이다.
이한영의 고손녀에게 이어진 차 만드는 기술
다산의 제자가 된 이시헌은 당초 약속대로 해마다 차를 만들어 스승 정약용에게 보냈다. 약속은 다산이 죽은 뒤에도 후손들에 이어져 100년 동안 계속됐다. 이시헌과 다산은 월출산 옥판봉 아래 백운동정원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
"다산에게 차는 그냥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약이었어요. 한약재 만드는 방식을 응용해서 만든 떡차를 주로 마셨습니다. 다산의 차에 대한 지식이 강진에서 제다기술로 실용화된 거죠." 지난 1월 27일 만난 이현정(51) 강진 이한영차문화원 원장의 말이다.
이시헌은 다산에게서 차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이시헌은 이흠에게, 이흠은 이한영에게 차 제조법을 전수했다. 이한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선보였다. 강진 백운동과 월출산의 옥판봉을 버무려 지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땅에서 수확해 만든 차에 우리 상표를 붙인 것이다.
이한영의 대를 잇고 있는 사람이 이현정 원장이다. 이 원장은 이한영의 고손녀이다. 그의 말이 계속된다.
"다산에 의해 완성된 차 만드는 기술은 다신계를 통해 강진에서 지속됐습니다. 다신계는 찻잎 채취와 제다의 공동생산, 차밭 관리와 제다법의 표준화로 우리 근현대 차산업의 단초를 마련한 거죠. 다신계 결성 이후 강진에서 차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차산업이 시작된 것이고요. 다신계의 전통이 강진에서 지속된 것입니다."
기업이 가진 '백운옥판차' 상표... 3년만에 되찾아
이현정 원장은 당초 차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어려서부터 차를 자주 접했을 뿐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위해 도회지로 나가 살면서 차를 가까이 하는 생활도 멀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13년 동안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일했다.
"교사로 있을 때였어요. 지인의 소개로 강진녹차를 접했죠. 강진에 다산으로부터 전해지는 차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줄기가 제 고조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묘한 흥분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 원장은 차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하고 싶었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강진 백운옥판차 고찰'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내친김에 박사과정도 밟았다. '한국 전통 제다법에 대한 융복합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한편으로는 큰기업이 갖고 있던 '백운옥판차' 상표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집안 대대로 전해진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월산차' 상표가 굴지의 기업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법정 다툼과 기업과의 타협을 통해 3년 만에 상표권을 모두 되찾았다.
2018년엔 아예 태 자리 월출산 자락으로 돌아왔다. 농업회사법인 (주)이한영생가를 설립했다.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월산차' 브랜드를 활용한 상품을 디자인했다. 백운옥판차는 덖음차를, 금릉월산차와 월산차는 발효차와 떡차를 포장하는 상표인이다. 차를 만들고,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했다. 차를 이용한 문화관광 상품도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다산의 차 재배 기술과 제다법이 고스란히 담긴 백운옥판차는 상업화된 최초의 상표입니다. 백운옥판차는 스승과의 약속을 100년 넘게 지켜온 신뢰, 우리 전통의 선비정신,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공유하고 있어요. 미래 문화산업의 원천이죠. 소중하게 가꿔 나갈 생각입니다."
이 원장은 월출산 자락에서 얻은 찻잎을 가공해 만든 차로 지역의 문화산업을 이끌고, 나아가 관광산업으로까지 발전시키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이 원장이 오늘도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