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나> 포스터 이미지

영화 <나나> 포스터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접하기 참 어려운 인도네시아 영화 한편이 개봉을 맞이했다. 인도네시아 영화라면 그나마 오컬트와 고어를 접목시킨 현대적 공포 장르영화나 액션물들이 가뭄에 콩 나듯이 국내에 소개되는 게 영화제를 제외하면 대다수였다. 하지만 1만8천 개가 넘는 섬(그중 사람이 사는 게 922개)에 2억8천만이라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의 영화가 이것뿐일 리가 없다. 다양한 장르영화는 물론 순탄치 않았던 역사와 주요 섬마다 상황이 상이하긴 하지만 산적한 사회문제를 조명하는 작업들도 국내 영화제들에서 종종 접할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할 <나나>는 흔히 인도네시아 영화하면 떠올릴 법한, 적당히 할리우드 스타일에 생소한 인도네시아 지역 색을 가미한 'B급' 장르 영화들과는 궤를 전혀 달리하는 정통파 작가주의 영화라 더욱 희소성 넘치는 사례가 될 테다.
 
격동의 역사 속 희생자에 머물지 않는 여성들
 
중년여성 나나는 인도네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과거의 식민지배 종주국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치루며 연달아 겪었던 혼란과 분쟁 와중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자신과 갓난아이를 두고 남편은 실종되는 참상을 겪는다. 생명과 안전을 위해 나나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한 채 언니의 손에 이끌려 낯선 타향으로 향하는 정글 속 샛길이 영화의 시작과 함께 관객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다.
 
다행히 피신한 고장에서 나나는 대농장을 경영하는 지주 다르가와 재혼하게 된다.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는 새 남편과 함께 그녀는 안정되고 부유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십여 년의 시간이 훌쩍 흘렀다. 새로 얻은 아이들이 무려 3명이고 남편과의 금슬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나는 아이들을 돌보고 남편을 도와 농장 경영에 힘을 쏟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그런 나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낯선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비록 그녀와 나이차이는 제법 나지만 화목하던 남편에게 어느 날 수상한 편지가 도착한다. 우편배달부의 실수인지 그 편지를 남편 대신 받아보게 된 나나는 다르가에게 자신 말고도 정부가 있음을 직감한다. 남편의 외도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나나는 혼자만의 탐정 미션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상대방은 정체를 감추거나 피하기는커녕, 나나에게 선물을 보내는 등 친근하게 접근해온다. 무슨 의도일까?
 
마침내 나나는 그 여자, 이노와 대면하게 된다. 두 여자는 우리네 아침이나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속극, 속칭 '막장 드라마'들에서 흔히 선보이곤 하는 난장판과는 판이한 태도로 서로를 대한다. 본처와 정부라는 악연에 가까운 관계이지만 둘은 처음 본 순간부터 마치 가족처럼 어울리게 된다. 모르는 이들이라면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자매 관계로 보일 정도다. 이노는 나나와 다르가의 집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거나 나나가 볼일이 있을 때 그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등 자연스럽게 이 가족 사이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관계는 봉건적인 본처와 첩 같은 형태는 아니다. 재혼인 데다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다르가의 집안사람이나 이웃들에게 은근한 무시를 당해온 나나를 이노는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편을 들어준다. 이노의 태도는 연적이거나 처첩관계의 우위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여성인권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데 가까워 보인다. 어느새 나나와 이노는 의자매 같은 사이가 되어 있다.
 
그렇게 오랜만에 신선한 일상의 흥분을 누리게 된 나나에게 지난 15년 간 잊고 싶었을 법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소식이 뒤늦게 도착한다. 이제 나나에게 현재의 안정된 삶을 이어갈지, 불확실한 새로운 삶에 도전해야 할지 결정해야할 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주변에는 불길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영화 속에 함축과 은유로 그려진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단면들
 
 영화 <나나> 스틸 이미지

영화 <나나>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나나>는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절을 겪으면서도 남자들이 주도하는 정치 분쟁과 권력다툼 대신에 여성이 온전히 자유롭게 삶을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꿈꾸던 진취적이고 독립된 삶을 꿈꾸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1950-1965년,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과 수카르노 집권기, 그리고 쿠데타로 국부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 세력의 대두로 이어지는 시기다. 유형으로만 놓고 본다면 해방 이후 5.16 쿠데타까지의 과정과도 비슷한 구석이 제법 된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관찰하는 재미가 생긴다.
 
영화의 기반이 된 원작은 인도네시아 소설가 아다 임란의 소설 "내 이름은 자이스 다르가"이다. 1980년대부터 인도네시아의 저명한 국제 미술상으로 활동해온 실존인물의 일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야기를 제공한 실제 인물의 이미 고인이 된 어머니 사연을 담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 인물, 자이스 다르가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박금자의 딸 제니가 회고하는 자신의 생물학적 엄마의 사연인 것과 통하는 지점이 제법 있다. <나나>가 펼치는 이야기는 극중에서 등장하는 나나의 어린 딸 자이스가 훗날 엄마의 충격적인 결단을 이해해보려는 자전적 노력을 담아내려한 셈이다.
 
어릴 적에 엄마의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선택 때문에 정서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딸은 어른으로 성장한 후에 그 당시를 회고하며 독립적 여성의 길을 선택한 엄마를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이해를 위한 행보를 진행되는 와중에 엄마의 인생역정이 그저 개인적인 돌출이 아니라 당대 시대적 배경에 의한 상처와 치유를 위한 것임을 딸은 깨닫게 된다. 영화는 비록 당대 역사적 대격변 상황이 핵심적인 뼈대는 아니지만 주인공 주위를 떠도는 밀림의 안개 마냥 배경을 메운다.
 
우선 이 영화의 도입부부터 정치적인 배경을 감추지 않는다. 1950년 전후의 젊은 나나는 독립전쟁 전후의 유혈을 피하려 안간힘을 써 탈출하는 중이다. 가혹한 수탈로 일관하며 여러 섬으로 갈라진 인도네시아를 분리주의 정책으로 통제하던 네덜란드 식민정부와의 독립투쟁은 결코 평화로울 수 없었다. 전쟁 와중에 유혈이 늘어갔고 자연스럽게 과격화 일로를 걷게 된다. 나나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은 격동의 시기에 애꿎은 피해자들의 수난을 은유하는 절차다.
 
그리고 15년이 지나 또다시 나나의 주위에는 대격변이 시작된다.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이던 수카르노를 밀어내고 권력을 장악하는 수하르토가 등장하는 과정이 마을 이웃들이 밤이면 모여서 숨죽이며 청취하는 라디오 방송으로 중계된다. 앞날이 어떻게 될까 조심스레 시국을 논하는 마을 주민들의 겁에 질린 대화와 이웃의 고발로 끌려간 주민들 소식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마치 한국전쟁 전후 극단적 좌우 이념대립의 혼란상을 보는 듯하다. 실제 내용도 딱 그대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발하는 일이 극중 주민들의 대화에서 수시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영화 속 젊을 적과 중년이 된 나나가 혼돈의 시대상과 대면하는 형태가 상이한 것도 관찰해볼 지점이다. 젊을 적에 별다른 기득권을 갖고 있지 못했던 나나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었다. 그런 처지 때문에 당시 나나가 몸소 겪었던 폭력과 학살은 상징적인 장면으로 처리가 될지언정 시각적으로 직접 구현되어 관객에게 비춰진다. 반면에 이제 지역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대농장의 안주인이 된 중년의 나나가 직면한 쿠데타와 내전상황은 주민들의 숨죽인 수다로만 언급된다. 상류층이 된 나나에게 격동의 시국은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 비교적 안전한 상황이 된 셈이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도 비교적 그랬었다.
 
극중에서 주로 이웃들의 밀고로 진위여부가 모호한 가운데 공산당원을 색출하는 탄압이 음험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시기가 바로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과 후속작인 <침묵의 시선> 작품 배경이 되는 인도네시아 공산당 대학살의 시절이다. 비동맹외교와 3세계 맹주를 내세우던 수카르노 정권 하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벌이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그 당시 세계에서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당원이 많은 공산당이었지만 수하르토의 대학살 이후 정당 자체가 소멸해버린다. 수카르노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 등 서방세계는 학살에 침묵하며 수하르토의 독재와 학살을 외면하는 가운데 백만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당한다. <나나>에서는 구체적 학살 대신에 은유될 뿐이지만 험악한 공기는 만만치 않다.
 
역사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응원하다
 
 영화 <나나> 스틸 이미지

영화 <나나>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하지만 <나나>는 본격 사회비판 영화로 방향을 잡지는 않는다. 역사에 대한 고발보다는 당대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적절히 활용하는 여성주의 드라마로 진로를 택했다. 그리고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전달을 넘어 주인공의 사적 결단과 인생 행보를 지극히 세심하게 그려낸 작가주의 지향의 작업 성격을 분명히 한다. 일일이 배경설명에 목을 매지 않으면서도 정갈하게 정돈된 풍경과 구도, 소품 장치 등을 치밀하게 배치해놓은 덕분에 격동의 인도네시아 현대사 치부를 상기시키면서도 즉자적인 분노와 대립에 기울어지지 않으려 방향타를 조정해놓는다.
 
그 대신에 영화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에 굴하거나 종속되지 않으려는 한 기품 넘치는 여성의 모험을 그려내려 도전한다. 그런 암울한 시절에 남자가 가진 조건에 억매이지 않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일일이 이해를 구하면서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꿈꾸던 나나와 그런 그녀를 응원하고 망설임을 풀어주는 이노의 우정은 이념 대립이라는 허울 아래 감춰진 권력과 이익에 눈먼 남자들의 세계와는 정확히 대척점에 자리한다.
 
영화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종용받아야 하는 나나의 내적 심리묘사를 은유하는 장치로 유독 (마치 정물화의 배경 마냥) 교차하는 골목길이 여러 차례 등장해 이목을 끈다. 그 길의 끝에서 나나를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관객은 호기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세밀히 준비된 소품과 인테리어들은 마치 바로 앞에서 툭 튀어나오듯 작동하며 (1960년대 인도네시아 실생활 풍속을 재현해) 작품의 리얼리티 고증을 채워준다. 그렇게 극단의 역사와 이를 헤쳐나간 앞 세대의 시련을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낸다. 확고한 기획 아래 초지일관 감독의 뚝심이 구현되는 예술적 시도의 결실이다.
 
작품정보

나나 Before, Now & Then (Nana)
2022|인도네시아|드라마
2022.12.15. 개봉|103분|15세 관람가
감독 카밀라 안디니
출연 해피 살마(나나 역), 라우라 바수키(이노 역)
수입 및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조연상(라우라 바수키)
2022 15회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 최우수작품상
2022 40회 브뤼셀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2022 페스티벌 필름 인도네시아 최우수 작품상 등 5개 부문 수상
 
나나 카밀라 안디니 감독 해피 살마 라우라 바수키 인도네시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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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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