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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맹랑한 젊은 여성들이 좋다. 기존의 질서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당돌함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여성의 조건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부터 하루의 에세이를 매일 구독이라는 형식으로 독자층을 일구어낸 당차고 똑똑한 여성 이슬아 작가도 좋아하는 맹랑한 여성 중 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집필 노동자로 말하는 이슬아는 꾸준하게 쓰는 작가라는 말에 걸맞게 많은 책을 출간했다. 그런 그가 이번엔 소설을 출간했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소설을 끝낸 독후감은, 다큐를 왜 극영화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아함이었다.
 
책 <가녀장의 시대>
 책 <가녀장의 시대>
ⓒ 이야기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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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그의 삶을 반영한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이미 그가 써온 책에 알려온 익숙한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이 지점이 이 책을 굿이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그렇다면 소설이 어떤 형식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는데(이 질문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도 하고 있다), 필자가 과문한 탓에 다룰 수 있는 논점은 아니지만, 글을 쓴 사람이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라 할 수는 있겠다.

채워야 비울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글쓰기 롤모델로 소설가 박완서를 불러낸다. 박완서를 좋아하고 박완서 같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박완서는 잘 알려진 대로 마흔이 넘어 글쓰기를 시작해 타개할 때까지 왕성하게 집필한 소설가다. 그는 한국 전쟁이 남긴 상처를 부여잡고 전쟁이 할퀸 야만과 고통을 끝끝내 쓰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경험을 완전히 탈각한 글을 쓰기는 쉽지 않겠지만, 경험을 굳이 글로 쓰는 이유는 그래야만, 글로 쏟아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완서는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발원한 서사를 소설화했지만, 그의 소설이 개인사를 넘어 한국 사회를 조밀히 들여다보는 렌즈가 되게 한 데엔, 그가 개인의 경험을 통해 시대적 부정의와 고통을 조망했기 때문이다. 많은 등장인물 역시 그의 삶에서 끌어다 썼지만, 소설 속 나의 엄마를 읽던 독자가 자신의 엄마에서 이윽고 그 시대의 엄마로 이입하게 하는 탁월함은 개인의 경험을 인류사의 한 부분으로 통찰해 냈기 때문이다.

그는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는 게 지금까지 오래 글을 쓸 수 있게 하는 거 같아요. 경험이 누적돼서 그것이 속에서 웅성거려야 해요, 지금 내 나이가 예순다섯인데 어떤 때는 한 500년은 산 것 같아요"(<박완서의 말> 중에서)라고 말했다. 많이 쓰는 것보다 오래 쓰려면 글 항아리를 채워야 한다. 채워야 비워낼 수 있는 건 자명한 이치다. 새로 나온 책이 독자에게 전에 읽을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면 작가의 글 항아리가 비어있다는 뜻이다. 글을 써 먹고 사는 이에게 채울 동안의 궁핍을 어쩔 테냐고 재우친다면, 대답은 궁색하지만 말이다.

가녀장이 가부장과 손절하려면

이슬아의 첫 소설 <가녀장의 시대>는 이슬아를 내세운 가녀장이다. 가녀장이란 짐작하다시피 가부장을 비튼 말일 텐데 재미있는 용어다. 가부장의 대척점에 '가모장'을 세우기는 하지만 지금껏 가녀장은 없었다. 미성년 여자 가장을 젠더화해 부르는 '소녀 가장'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미성년 여자 청소년을 동정하거나 소녀에게만 가족 돌봄을 효심으로 강요하는 어찌 보면 간악하게 주조된 성 불평등한 용어다. 미성년 남자 청소년을 소년 가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여튼 <가녀장의 시대>의 가녀장은 소설 속에서도 이슬아다. 이슬아의 이력이 그렇듯이 그는 드물게 집필 노동으로 성공해 '모부(母父)'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스스로를 '가녀장'이라 칭한다. 가장의 권능은 가부장이던 가녀장이던 꽤나 강력하기 마련이라, 이 집은 가녀장의 말로 굴러간다. '모부'는 부양하는 가족이자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직원이기도 한데,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집과 직장을 혼재시킨다.

'모부'이자 직원인 가족들은 꽤나 일과 가정을 잘 분리하는 듯 보이지만, 엄마 복희에겐 애매한 구석이 많다. 가족이자 직장 동료 그리고 직장 상사인 남편과 딸의 삼시 세끼를 해결해 주는 노동은 일과 가정이 전혀 분리되지 않은 채 주부의 노동을 착취할 위험이 있다.

물론 가녀장은 복희를 가혹히 착취하지 않으며, 갸륵하게도 조리노동의 고됨과 중함을 잘 알고 있다. 그의 말처럼 그는 "복희의 살림 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남편과 딸의 삼시 세끼를 제공하는 것이 엄마의 직장 업무이기도 한 것은 일과 가정을 교묘히 양립시켜 복희의 일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며, 주부의 살림 노동에 대가를 산정하는 주체가 가장이어야 하는가는 다른 논점을 낳는다.

지금은 성인인 딸애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빠가 엄마 월급 주는 거지?"는 말로 나를 기함시킨 적이 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아이의 관점에서 엄마가 아빠의 돈을 받는 고용인이라는 생각이 아이 말의 배경일 텐데, 나는 이 말에 굉장히 충격받았다. 어떤 이는 무슨 아이가 한 말을 가지고 그러느냐, 아이가 뭘 알겠느냐 하겠지만, 내 입장에선 오히려 아이가 한 말이라 더 타격받았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내 노동이 밖에서 돈 벌어오는 아빠의 노동에 비해 부차적일 뿐 아니라, 가부장의 권능에 종속되어 보였다는 사실이 그렇게 아플 수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가부장이 아닌 가녀장으로 가사 노동의 중함을 소중히 여긴다 해도, 그 가치를 가장에게 돈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은 께름하다. 게다 이 가녀장의 집엔 가사의 분담이 잘 구획된 듯 보이지만, 일회성으로 정해진 다른 가사노동에 비해 엄마의 삼시세끼 제공은 턱없이 빈번하며, 메뉴 선정부터 장보기까지 신경써야 할 구석이 훨씬 많다.

복희의 음식 솜씨를 가족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 그가 조리노동에 분장된 이유고 그의 조리 노동이 비교적 비싼 값으로 보상받는 이유지만, 그럴수록 복희는 부엌에서 영원히 헤어 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녀장의 집에서 가장 이상한 점은 가녀장은 어떤 가사 분담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비용을 넉넉히 쳐준다고 상쇄될 수 있는 모순이 아니며, 가부장을 해체해야할 21세기 가녀장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복희의 아침은 특별한 믹스커피로 시작된다. 뜨거운 물 반 컵에 믹스커피 한 스틱을 풀고(여기까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에 위스키 반 컵을 투척한다. 이른 아침부터 위스키 반 컵 넣은 믹스커피라니... 맛도 맛이지만 몸이 어떤 상태가 되나 궁금해 한번 해봤다. 아침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저녁에 했다.

별 맛은 아니었지만 몸은 반응했다. 전신이 스르륵 풀렸다. 빈속에 위스키가 제공한 이완은 하루 동안 누적된 가사 노동의 피로를 멀리 보내주었다. 그런데 복희에게 아침의 이완은 왜 필요했을까. 고단한 하루가 될 몸을 애도하는 혼자만의 의식이었을까? 가녀장의 집에서도 가사노동은 고달팠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게인 블로그 게시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은이), 이야기장수(2022)


태그:#<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가사노동 수당, #집필 노동,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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