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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새벽부터 유럽 전역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향하는 버스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9월 16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란 도덕경찰에 체포된 뒤 살해된 마흐사 아미니(22) 의문사 사건 이후 국가폭력으로 인한 사망자가 300명이 넘어가는 엄혹한 고국의 상황을 바라만 볼 수 없었던 재외 이란인들이 처음으로 대규모 유럽 연대집회를 베를린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필자도 이란인들과 함께 독일 남부도시 뮌헨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8시간의 긴 여정 끝에 베를린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전승 기념탑(Großer Stern)에 가니 벌써 집회는 시작돼 있었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정권퇴진"
 
한 여성이 도덕경찰을 비판하는 듯한 손팻말을 들고 지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베를린 이란집회에 참여한 여성들  한 여성이 도덕경찰을 비판하는 듯한 손팻말을 들고 지인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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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집회는 "여성* 생명 자유 컬렉티브 (Woman* Life Freedom Collective)"라는 단체 명의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활동가 & 의사, 하메드 에스마일리온 박사 (Dr. Hamed Esmaeilion)의 주도로 열렸다고 들었다.

에스마일리온 박사는 평범한 치과의사·작가로 지내오다가 2020년 1월 8일 이란군의 미사일이 테흐란 부근에서 우크라이나 민항기 PS752를 격추시킨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뒤 176명 사망자들의 유족을 대표하면서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 등을 위해 활동가의 삶을 살아왔다. 그는 재외 이란인들의 큰 공감을 얻으며 성공적인 반정부 집회를 다수 조직해왔다. 이번에도 10만 명 남짓의 거대한 인파를 베를린에 모아내는 역할을 해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집회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주요 구호는 "여성, 생명, 자유"였고 여성인권 단체들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이외에도 채찍에서 사형에 이르기까지 극한 탄압을 받아온 성소수자 그룹, 차별에 항의하는 쿠르드족 및 소수민족 그룹, 사회주의자들이 함께 "독재자에게 죽음을!" "정권퇴진"을 외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새로운 혁명이 시작됐다"는 슬로건에 걸맞게 경쾌한 음악에 맞춰 행진을 하기도 하고, 때때로 감성적인 이란의 노래에 따라 애절하게 흐느끼는 이들의 모습 도 엿볼 수 있었다(관련 트위터 보기).
 
이란 정부의 시리아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에의 관여를 비판하는 듯한 손팻말을 들고 있는 집회 참가자. "시리아인들, 우크라이나인들, 이란인들의 킬러"라고 씌였다.
▲ 이란 정부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시위 참가자 이란 정부의 시리아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에의 관여를 비판하는 듯한 손팻말을 들고 있는 집회 참가자. "시리아인들, 우크라이나인들, 이란인들의 킬러"라고 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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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싸움...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은 준 것은 하메드 에스마일리온 박사의 감동적인 기조연설이었다. 그의 연설은 1963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나온 마틴 루터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를 연상시켰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열망하는 이란 국민들의 애절한 심정을, 그동안 이들의 인권상황에 무심했던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절절한 연대를 요청하고 있다. 

놀랍지 않게도, 이란의 신정 독재정권은 이번 베를린 집회가 치솟는 에너지 가격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집회라며 허위정보를 방영하고 있다. 1989년 이래 이란의 최고 권력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국내 집회세력을 서방 세계의 음모로 규정하기도 했다.

쉽지 않은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꿈을 꾼다. 물론 43년간이나 지속된 독재가 구호만 외친다고 정권이 바뀔 가능성은 희박하다. 좀 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야권의 목소리를 정치 세력화하기 위한 논의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10월 12일 10대 소녀  아스라 파나히 (Asra Panahi 16세)는 친정부 집회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당시 Shahed 여고에 출동한 사복 군인들에 의한 구타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이란 정부에 의해 살해당한 16세 소녀 아스라 파나히의 사진을 든 시위 참가자 10월 12일 10대 소녀 아스라 파나히 (Asra Panahi 16세)는 친정부 집회에 참가해 노래를 부르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당시 Shahed 여고에 출동한 사복 군인들에 의한 구타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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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서 의무적인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이란히잡시위에 함께 연대했던 엘나즈 레카비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는 결국 가택 연금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시민들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
▲ "이란의 민주주의는 온다"는 손팻말을 든 참가자 최근 서울에서 의무적인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이란히잡시위에 함께 연대했던 엘나즈 레카비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는 결국 가택 연금을 당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시민들은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
ⓒ 클레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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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란 출신 영화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란의 문제에 함께 연대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 독일에 사는 것이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실제로 왕정 체제였던 50여 년 전에도 팔레비 2세가 독일을 찾았을때 독일 학생들은 이에 항의했고 나아가 68운동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필자는 한국에 거주하는 이란인들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베를린 집회 현장에 없었던 이들을 위해 하메드 에스마일리온 박사의 호소문을 한글로 번역해 전한다.

[연설문]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번 집회를 주도한 하메드 에스마일리온 박사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가 2020년 1월 이란군의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민항기 PS752를 격추시킨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후 유족을 대표하며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등을 위한 활동가로의 삶을 살아왔다.
 이번 집회를 주도한 하메드 에스마일리온 박사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가 2020년 1월 이란군의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민항기 PS752를 격추시킨 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후 유족을 대표하며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등을 위한 활동가로의 삶을 살아왔다.
ⓒ Dr. Hamed Esmaeilion 인스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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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에서는 아무도 3분간의 엉터리 재판 후에 처형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 시인은 족쇄를 차지도 않으며 아무도 감히 소수자들을 박해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무도 감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노동자를 투옥하거나 고문해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 교사와 영화인들, 시민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은 감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는 아무도 민간 항공기에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저널리스트를 납치할 마음이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의 꿈에서는 수천의 평화로운 거리 시위대들에게 총기로 무차별 난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 아이들은 암흑기의 이데올로기를 학교에서 주입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는 아무도 소녀들의 교실에 최루탄을 쏘지 않습니다. 아무도 아이들을 지붕 위로 던지지도 않고 바닥에 머리를 박살내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그들의 머리를 향해 뒤에서 총알을 발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꿈에서는 자유의 돌풍이 여성의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갑니다. 주변 나라들도 평화롭게 공존합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전쟁과 파괴의 불에 타지 않습니다. 아무도 푸틴이 우크라이나인을 죽일 수 있도록 무기를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꿈에서 이란인이라는 사실은 슬픔이 아니라 자부심과 기쁨 그 자체입니다.
내 친구들이여. 내가 말하는 꿈에는 거리에 흐르는 피의 강들이 없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고 이란이 이슬람 공화국의 족쇄에서 벗어날 때만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됩니다. 우리의 꿈은 (이란의 최고 권력자) 알리 하메네이를 지탱하는 기둥인 부패, 반인륜적 범죄, 공포의 제국의 붕괴를 예고합니다.

우리는, 이란에서 포위공격을 받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자유 세계의 지도자들의 눈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범죄 국가와 협상을 중단하십시오. 이들은 이란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사들을 귀하의 나라에서 추방하고, 정의와 인권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보여주십시오.
▲푸틴의 측근에게 가하는 것처럼 그들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그들이 빈곤, 박해,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란 국민들로부터 강탈한 재물을 몰수하십시오.

아무도 당신에게 간섭하거나 전쟁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당신에게 이란 국민을 제재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이슬람 공화국의 지도자들, 수행원들, 로비스트들에게 표적 제재를 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란 국민의 요구를 대신 전합니다. 즉 당신이 역사의 올바른 쪽에 서서, 용감한 여성, 소녀, 학생, 노동자, 소수자, 슬픔에 잠긴 희생자들의 부모를 드디어 믿고, 용감한 이란의 젊은이들이 이끌고 있는 이 혁명을 인정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이슬람 공화국에 보내주십시오.  

(이 혁명이) 중동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고 진취적이라는 것에 마음의 문을 열고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란 국민의 의지와 이란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존중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우리 이란 국민은 이슬람 공화국 정권의 희생자이며, 우리의 압제자들을 (유화 정책으로) 달래고 협력한 이들을 결코 잊지 않고 용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체인지닷오알지 관련 청원 바로 가기 : https://www.change.org/p/g7-leaders-expel-iran-s-diplomats-demand-that-political-prisoners-be-freed

태그:#여성생명자유 , #PS752, #하메드에스마일리온, #엘나즈레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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