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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미니 슈퍼, 모서리가 닳은 빛바랜 책장, 담벼락에 핀 벽화와 그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엔 사람 냄새, 종이 냄새 물씬 풍기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꿈 많은 책방지기와 골목을 밝히는 문화·예술인을 만났다.[기자말]
'배다리 헌책방 거리'는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한때 책방이 50여 곳에 이르러, 전국에서도 이름난 거리였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도 이 골목에서 헌책방을 했다. 그 시절 구하기 힘들었던 영어 서적, 미술 서적 등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었다. 참고서를 팔러 오는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시절은 변했지만 낡고 빛바랜 책들은 가지런히 책장을 지키고, 추억을 회상하는 손님들은 헌책방에서 자신만의 보물찾기를 한다. 최근에는 개성 있는 독립 서점, 카페와 음식점, 예술인 창작소가 골목골목 문화예술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배다리 공작소, 헬프스튜디오
 
'헬프스튜디오'의 이상준, 이성민씨와 차경욱 대표(왼쪽부터). 배다리 골목골목에서 건져 올린 추억들이 그들의 동력이자 구심점이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공구로 가득한 '헬프스튜디오' 작업 공간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작업 공간을 보여달라는 말에 책방을 지나 성큼성큼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헬프스튜디오'는 오래된 집들이 빼곡한 골목 초입에 서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하지만, 그들에겐 추억이 시루떡처럼 쌓인 우리 동네다.

"개인 작업도 하고, 크루원들과 전시 기획도 해요. 이 동네가 좋아서 배다리에서 먹고 살고 일해요." 헬프스튜디오의 차경욱(36) 대표와 이성민(37), 이상준(32)씨는 같은 동네 친구, 동생 사이로 동구 일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원도심 골목골목에서 건져 올린 추억들이 그들의 동력이자 구심점이다.

그동안 인천도시역사박물관, 인천난정평화교육원, 관동갤러리, 시아북카페 등 여러 공간에서 전시를 기획·설계했다. "인천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멋있는 도시, 다채로운 도시예요. 인천의 매력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좋겠어요."

차경욱 대표에겐 오래전부터 세운 계획이 하나 있다. 인천의 근대 건축물을 3D 스캐닝해 기록하는 일이다. "제가 한 모든 작업이 인천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해요.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인천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12(0507-1335-0483)

마음이 머무는 곳, 가온화
 
잔잔한 묵향이 맴도는 '가온화' 작업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오래된 헌책방 사이 유독 화사하게 빛나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도 예쁜 민화 공방 '가온화'. 한지처럼 새하얀 공간에는 그림이 가지런히 걸려 있고, 잔잔한 묵향이 맴돈다.

구월동 번화가 한복판에서 공방을 하던 박다애(38) 작가는 배다리의 고즈넉함에 반해 지난해 이곳으로 이사했다. 월 4회 정규반과 원데이 클래스를 운영한다. 수강생이 제법 많아 연말에 그림 전시를 열 계획이다.

"민화엔 소망이 담겨 있어요. 모란은 부귀영화, 십장생도의 복숭아는 장수 등 각각 상징하는 것들이 있죠. 정성스럽게 그려야 해요. 여러 번 색을 덧칠해야 제대로 은은한 색이 나와요." 가족, 스승, 연인... 귀한 이의 행복을 염원하는 고운 그림의 기운이 오늘 배다리에 채색된다.

인천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12(0507-1324-3348)

책방 앞 카페, 미카엘 스테인드글라스 카페
 
'미카엘 스테인드글라스 카페'의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미카엘 스테인드글라스 카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전공한 오종현(29) 작가의 작업실이자 카페다. 헌책방에서 예술 서적을 찾아 읽고 꿈을 키운 그는 책방과 마주 보는 2층에 공간을 꾸몄다. 이곳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저변을 넓히고, 배다리 사람들과 어우러져 문화예술을 꽃피우기를 소망한다.

"지금 배다리엔 많은 미술관과 예술, 공유 공간만큼이나 다채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올가을, 많은 분의 발길이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인천시 동구 금곡로 4 2층(0507-1339-1543)
 
한 지붕 네 가족,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화상점 주인들. 이은빈, 청산별곡, 장미영씨(왼쪽부터)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초록 빛깔 문과 동성한의원이라 적힌 글씨가 눈에 띄는 건물에 자리한 '문화상점 동성한의원'. 한 지붕 아래 '나비날다 책방', 제로 웨이스트 숍 '슬로슬로', 뜨개방 '실꽃', 식물가게 '뒤뜨레' 네 개 상점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책방 주인 청산별곡이 지난해 꾸민 공유 공간이다.

그와 배다리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서림 옆 7평짜리 공간에서 '나비날다 책쉼터'로 시작해, 조흥상회 건물에 마련한 '나비날다 책방', 창작 실험실 '수봉정류장' 등 다채로운 공간을 운영했다. 또 문화예술을 밖으로 끄집어내 배다리 공유지에서 야외 전시를 열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다. 배다리를 아끼는 사람들, 예술가, 생활예술인들과 '작당 모의' 하며 여기까지 왔다.

"배다리에선 집에서 슬리퍼만 신고 나와도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요. 골목마다 미술관이 있고, 책방도 여덟 곳이나 돼요. 연극 하는 창영당, 마을 사진관... 온 마을이 문화적이에요."

배다리의 삶을 전하는 그의 얼굴에 말간 웃음이 번진다. 이런 게 삶 아닐까. 문화는 우리를 다른 차원의 사색으로 이끌고, 기쁨으로 채워주며, 살아갈 힘을 준다. 그 충만한 마을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인천시 동구 서해대로513번길 9(0507-1375-3006)
 
책과 예술이 공존하는, 집현전
 
지난해 새 단장한 헌책방, 집현전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인천의 제1호 헌책방, '집현전'. 1953년 가마니를 깔고 책을 판매하던 것을 시작으로 현재의 아트 앤 북 스페이스, 집현전까지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며 헌책방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 이곳의 주인은 사진작가 이상봉(67) 대표다.

"사람들이 잠시라도 머물다 갈 수 있는 아담한 문화 공간으로 꾸미고자 했어요. 1층은 그대로 전통 책방으로, 2층은 작가들의 작업 공간, 3층 다락방은 전시관으로 지난해 새 단장했어요."
 
인천시 동구 금곡로 3-1(070-4142-0897)
 
시간과 공간, 예술을 잇다,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의 이영희 관장과 정창이 작가(왼쪽부터)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비 오는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바쁘게 달려온 시간이 잠시 느려지는 곳, 배다리. 헌책방 뒤쪽에 있는 '여인숙골목'도 천천히 늙어가고 있었다. 세월의 부침 속에서 진도여인숙, 길조여인숙, 성진여인숙도 문을 닫은 지 이미 오래.

정창이(47) 작가는 후미진 골목에 내려앉은 삶의 흔적과 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벽에 검은곰팡이가 꽃처럼 피어 있었어요. 쪽방에 누군가 놓고 간 보따리도 남아 있고." 정 작가는 상기된 표정으로 "어릴 때부터 낡고 오래된 것을 좋아했다"며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공간과 사물, 오래된 골동품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고 말했다.

어느덧 중견 작가가 된 그는 "예술가의 시선이 닿아야 할 곳은 잊혀져 가는 공간"이라며 "예술가들은 척박한 땅에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새 숨을 틔울 의무가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원도심에서 3개 공간을 살려내자.' 그의 아내 이영희(46) 잇다스페이스 관장과 오래전 한 약속도 같은 맥락이다.

꼬박 2년이 걸렸다. 어르신을 대하듯 귀하게 대접했다. 1930년, 진도여인숙이 시작된 100년 전으로 돌아가 숨어 있던 시간의 흔적을 찾아내 닦아내고 윤을 냈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이 두 번 지나고, 골목은 말끔해진 얼굴로 오랫동안 품었던 비밀을 풀어냈다.

"완공하기 한 달 전, 카페 배수로 공사를 하다 빨래터가 발견됐어요."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고맙다. 네가 나를 만나기 위해 100년을 이곳에서 기다렸구나.' 망설임 없이 터를 살리고, '빨래터 카페'란 이름을 지었다.

카페, 공원, 미술관. 오늘, '배다리 아트스테이 1930'에는 골목의 유구한 역사가 살아 있다. 수많은 사람의 애환이 서린 여인숙이었고, 마을의 빨래터였던 삶터가 시민들의 문화 쉼터로 부활했다.
 
인천시 동구 금곡로11번길 1-4 진도여인숙(0507-1322-3834)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 '여인숙 골목'의 옛 모습 ⓒ 유승현 포토 디렉터
 
* 안 보는 책 배다리에서 교환하세요!

오는 10월 16일까지 '2022년 배다리 책사랑 일일화폐 축제'가 배다리 헌책방 거리 일대에서 열린다. 책을 서점에 가져가면 1권당 1장의 5000원 상당 일일화폐로 교환(2016년 출판 도서부터 해당)해 준다. 일일화폐로 도서 구입이 가능하다. 참여 서점은 나비날다 책방, 마쉬, 시와예술, 아벨서점, 집현전, 한미서점, 모갈1호, 삼성서림 8곳이다.

취재영상 보기(https://youtu.be/at8nDETu5Fs)

 
'골목길 TMI' 취재영상 섬네일 ⓒ 굿모닝인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2년 10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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