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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불교소년소녀단의 활동(1926)

1925년 6월 21일 오전 9시부터 울산불교소녀회에서 울산청년회관에서 전울산탁구대회를 개최하였다. 개인 참가비는 40전이었다. 8월 울산불교소년회에서 수해 참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해 구제 가극대회 개최를 준비하여 연습하였다.

울산포교당이 확장하여 1925년 12월 2일 준공식이 있었다. 이로인해 울산포교당은 울산지역의 대사회적 활동공간으로 많이 활용되었다.
 
양대응 스님은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교육 및 예술 문화활동에 기여하였다.
▲ 양대응 스님과 통도사 학춤 양대응 스님은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교육 및 예술 문화활동에 기여하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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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부처님 성도일(成道日)을 기념하기 위하여 1월 21일(음 12월 8일) 오후 7시부터 불교소년소녀단의 제등행렬이 있었다. 8시에는 울산포교당에서 포교사 양대응의 성도일(成道日, 석가모니 깨달음 얻은 날) 의의에 대한 강연과 동아일보 울산지국장 박병호의 '석가도 사람이다'란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 후 소년소녀단의 가극 공연이 있었다. 관중은 무려 2천여명이 넘었다. 가극 중 희극인 <시간이행(時間履行)>은 소년들의 분장이 극히 교묘하여 흥미가 더 끌었다.

1926년 5월 19일 석가탄신일 저녁에 불교소년회에서 가극 공연을 하였다. 6월경 포교당에서 주간에는 부인신도를 위한 법회가 있었고, 야간에는 포교사 양대응의 강화(講話)와 불교소년단의 가극이 있었다.

1926년 6월 15일 오후 4시에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소년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현 대 소년 남녀의 개성을 발휘시키는 동시에 소년 남녀에게 불교정신을 일반적으로 보급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소년회의 고문은 당시 불교학자로 <불교>지 발행인이었던 권상로였다. 조선불교소년회는 동화대회, 동요대회, 가극대회, 웅변대회, 빈민구제사업, 초파일기념행사 등을 하였다. 이러한 향사는 당시 소년운동단체의 일반적 모습이었다.

1926년 7월 20일 오후 8시 울산포교당에서 포교사 양대응의 사회로 "심오한 불교의 대진리로 사회화시키랴는 목적"으로 울산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규약을 통과한 후 임원을 선거하였다. 불교소년단보다 늦게 울산불교청년회가 조직되었다.

8월 14일 7월 칠석을 맞이하여 불교포교당 야학원 운영이 어려워 원장 양대응은 경비 마련을 위한 가극회를 개최하였다. 울산청년회관에서 불교청년회, 불교소년소녀회의 후원으로 개최하였다. 1천여 명의 관중이 모여 성황리에 공연하여 총 33원이 모금되었다.

양대응 스님(1897~1968)은 1919년 3월 13일 통도사 신평 독립 만세 사건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강원도 금강산 일대로 도피 생활을 하였다. 1920년 6월 20일 경성 각황사(현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청년회 결성을 주도했다. 1922년 3월 친일 승려 강대련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을 주도하여 징역 4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23년부터 통도사울산포교당(현 울산해남사)에 포교사로 활동했다. 1925년 교육 민중화를 실현하기 위해 울산사학회를 창립하였다. 진주포교당 포교사로 있던 1938년 비밀 항일운동결사체인 만당(卍黨) 사건으로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 구금됐다. 당시 일제의 고문으로 눈과 다리가 불편했다. 해방 후인 1945년 10월 통도사 초대 주지로 추대되어 4년간 맡았으며, 양산 보광중학교를 설립했다.

스님은 통도사 학춤의 계승자였다. 1976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전문위원으로 위임받아 사찰 학춤을 조사한 서국영(당시 부산대교수), 김천흥(당시 춘앵전 보유자)씨에 따르면 조선 고종 때 어산종장이었던 이월호스님이 시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통도사 안양암의 염불원에서 김설암스님도 어산범패를 시연할 때 통도사학춤을 추었으며 그 대를 이어 신경수, 양대응 스님이 계승했다. 일제 강점 이후 통도사학춤은 민간으로 전승되었다. 통도사에서 일한 김두식을 거쳐 김현민, 김덕명에 이어 현재는 양산사찰학춤이 백성스님에 의해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28년 5월 어린이날 행사를 마친 후, 밤에는 울산포교당에서 부모회를 열었다.
1928년 5월 16일 울산청년동맹창립대회를 울산포교당에서 열렸다.

울산포교당은 1928년 신간회울산지회 제1회 정기대회 만찬 장소로 제공되었다. 1929년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불교청년단, 불교소년단은 주간에는 봉찬법요를 하고, 야간에는 제등행렬과 음악회를 성대히 하였다.

울산지역의 사회운동 공간은 통도사울산포교당과 울산청년회관이었다. 울산포교당을 종교적인 편협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당시 포교사들이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어린이날에 각종 구호를 적은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행진을 하였다.
▲ 1927년 어린이날 깃발 행진 사진 어린이날에 각종 구호를 적은 깃발을 휘날리며 거리행진을 하였다.
ⓒ 동아일보(192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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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을 경영한 소년단, 유곡리 선일소년일단과 대현소년단

울산면 유곡리 선일소년일단(鮮一小年一團)의 경영사업으로 1925년 겨울부터 유지 조임준 등의 원조로 노동야학회를 창설하여 무산아동 교육을 하였다. 야학회 감독자인 조기홍(曹基洪)과 무보수로 교수에 노력하던 김대룡(金大龍), 김대하(金大河), 이규룡(李圭龍) 등이 1926년 7월 24일 오후 8시에 남녀 학부형회까지 개최했다. 첫째 농촌청년 지식개발을 목적하여 유곡야학회(裕谷夜學會) 내에 남녀 2부를 나누고, 둘째 지금까지의 회관인 유곡리 동사(洞舍) 신축에 대해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신설된 여자야학부는 현재 경성 이화고보(梨花高普) 재학 중인 조봉선(曹鳳善), 조은진(曹殷辰)과 박금필(朴今必) 여사가 담임 교수하게 되었다. 남자부 교사는 그대로 남자부 김대룡, 김대하, 이규룡이 하기로 하였다. 교실 확장 찬조금으로 조임준 50원, 박도홍(朴度洪) 16원, 조임지(曹任之) 김용대(金龍大) 각 10원, 오만이(吳萬伊) 김용학(金龍學) 각 5원, 조귀동(曹貴同) 이용규(李容圭) 권상백(權尙伯) 임학진(林學鎭) 박기수(朴基洙) 각 3원, 김은도(金根道) 조일준(曹日俊) 박영의(朴英毅) 윤산상(尹珊祥) 각 2원, 김재만(金在萬) 임응조(林應祚) 박인수(朴仁洙) 민완이(閔完伊) 최일생(崔日生) 김정수(金正洙) 박재원(朴載元) 오용호(吳龍浩) 김갑룡(金甲龍) 강두성(姜斗星) 각 1원으로 총합계 137원 20전이었다.

선일소년일단(鮮一小年一團) 노동야학회 감독 조기홍曹基洪)은 일제강점기 울산청년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울산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1923년 10월에 울산청년회와 울산고등강습회학우회에서 주최한 울산시민 대운동회에서 조기홍이 5원을 기부하였다. 1926년 7월 울산유곡동회 감독인 조기홍이 유곡노동야학의 남녀 2부로 신설 운영하였다. 1927년 11월 이규명과 함께 울산수리조합 반대지주대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신간회 울산지회의 임시대회에서 회관 신축을 위한 건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2월 제1회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0년 폭풍우로 파손된 울산청년동맹회관 수리를 위해 10원을 기부하였다.

1931년 11월 울산유치원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매월 9원, 이규명은 2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1931년 동아일보에서 지방주요 문제 타개를 위한 울산 좌담회에 금융조합부 이사 오흥호, 지역유지 박병호, 상은은행 차석 황종혁, 수리조합장 이현보, 치과의원장 이규명, 면협의원 김활천과 신문사 지국 임용길, 홍경석, 김만수 등과 함께 8월 20일 전등요금 인하 문제, 수리조합 문제, 면 소재지 이전 문제를 주제로 좌담을 하였다. 이 이후에 그에 관한 동정은 신문에 알려지지 않았다.

조기홍은 일제강점기 만주로 가 돈을 벌어 해방 후 귀국해서는 현 성남동 국민은행 자리에 큰 한옥을 지어 살았다. 조씨는 스스로 테니스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장남 진오는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였고 '조빼낑'으로 불린 조진구와 동생 조진욱은 울산을 대표하는 축구 선수로 활약했기 때문에 스포츠 집안으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의 딸 조화자는 처녀시절 양사초등학교와 강남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나중에 울산수리조합장이 된 이종원과 결혼 후 1950년대 말 중구 성남동에 백초다방 운영하며 정치인이 자주 모여 여론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새마을 부녀회, 녹색회 회장, 대한적십자 경남지부의 여성특별자문위원장, 울산시 초대 여성협의회 회장 등의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대현면(현 울산 남구) 용연리에 있는 대현소년회는 1926년 3월 이양득, 박영만, 박용 등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그들은 무산노동아동의 교육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였으나 장소가 없어 곤란을 겪다가 용연리 유지 김진문의 사랑채를 빌려 1927년 음력 18일부터 개학할 예정이었다. 남녀아동 30여명이 서적 등을 무료로 주고, 강사도 무보수로 할 예정이라 지역유지들은 청년보다 소년들의 교육열을 매우 칭찬하였다.

대현면 여천리 대현소년단에서도 노동야학을 운영했다. 지역 청년 박창수, 박곤수, 박근영 3명은 노동야학을 위해 모집한 기부금 5백원과 노동청년의 많은 부역으로 야학회관을 건축하고 노동자를 교양하여 성적이 우량하였다. 대현소년단에서는 여자야학을 1926년 봄부터 신설하여 운영하였다.

그런데 마을의 70세 한학자인 박경복이 일반 가정을 순방하여 여자교육의 불필요와 풍기문란 등의 구설을 유포하여 일반 학부형으로 하여금 그 딸을 취학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노인의 아들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금융조합에 근무하고 있다. 이와같이 일부지역에서는 여자교육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가진 구시대적 인물들이 있었다.

당시 소년단은 보통학교 출신들이 농한기와 방학을 이용하여 야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야학은 가장 기본적으로 조선어와 산술을 가르쳤다. 소년단과 야학의 결합은 지역의 문맹율을 낮추는 역할을 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병길 작가는 지역사연구가로 울산민예총 감사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실립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 #울산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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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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