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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후 민족주의계 신지식층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직접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실력양성 우선이 지배적이었다. 경제적·문화적 실력양성을 통해 약육강식의 세계사회에서 존립할 힘을 기르고 나아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개조는 실력양성을 통해 가능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교육의 보급, 풍속개량(舊習의 改革), 산업의 진흥이 중점적으로 거론되었다.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여자를 해방하여야

1920년 6월에 창간된 <신여자(新女子)>의 창간사에서 "… 무엇무엇 할 것 없이 통틀어 사회를 개조하여야겠습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家庭)을 개조하여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먼저 가정의 주인이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도 남같이 살려면,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면, 전부를 개조하려면 먼저 여자 먼저 해방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921년 7월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조선 여성은 얼마나 무지몽매하였던가. 오직 가정에서 요리하는 것과 의복 만드는 것과 논밭에서 일하는 것 외에 볼 것이 무엇 있는가. 여성의 해방은 무엇이뇨 …… 오직 각개 여성의 생활 범위를 확대시키며 그 의의를 심중(深重)히 하고 그 인생의 내용을 풍부히 하여 개성의 발휘를 충분케 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니,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일어나는 모든 운동이 여성해방운동(女性解放運動)이다"라고 하였다.

언양지역은 경남지방에서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신자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부터 산속에 숨어 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여러 공소를 형성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언양에서 활동하던 에밀 보드뱅(Emile Beaudevin) 정 신부(1927.05.25~1939.03.24.)는 "언양에서 여러 개의 학교가 문을 열었는데, 아주 조촐"했다고 하였다. 아마 문맹자 퇴치운동 차원에서 미인가 간이학교를 공소 단위에서 운영하였던 것 같다.

언양지역에 일찍이 자리 잡은 천주교와 천도교는 모두 남녀 차별을 부정하고 인간존엄성의 입장에서 평등을 중시하였다. 언양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남녀 차별적 의식이 적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수적 유생이 또한 있었다.

여성해방을 위한 야학 교육을 시작하다

여성의 지위 향상이 곧 여성해방이었으므로 이를 위해 문맹퇴치 등 계몽교육을 통한 여성의 자질향상과 생활개선을 위한 여성 조직이 필요했다. 언양지역의 여성운동은 언양여자야학회, 부인야학, 언양공보에서 여학생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3년 4월 정인섭(언양공보 3회)이 주장하여 언양에 여자야학이 개설되어 언양에 여성교육이 본격화되었다. 학생은 총 70여 명이라 언양공보 여자부 담임 김덕수와 훈도 서주식 2명이 무보수로 활동했다. 언양청년회는 부인야학을 운영했다. 1924년 1월 19일 제3회 개학식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이 수업은 김덕수 혼자 맡았다.

언양공보는 1919년 4월부터 여학생을 받아 1923년 3월 23일 첫 졸업생 9명을 배출하는 데, 언양공보 9회 졸업생이었다. 12회(1927.3.24.)부터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구분하지 않고 졸업명단을 작성하였다. 9회 졸업생 김두이(1907년생)는 언양공보 교사로 활동하다가 신고송과 결혼을 하였다.

9ㆍ10회 졸업생인 한덕복(1910년생)은 울산소녀회와 언양소년소녀동맹 상무집행위원(26.5)을, 김명진(1910년생)은 언양소년소녀동맹 집행위원을, 11회(1927.3.24.) 오덕선(1911년생)은 언양소년소녀동맹 검사위원을 하였다. 이처럼 언양공보와 여자야학, 부인야학의 졸업생이 배출됨으로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지원하고 여성의 계몽교육을 담당할 여성단체가 요구되었다.

1923년 초부터 민족운동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 힘의 배양이 절실함을 주장하면서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기본 실행 요강은,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언양공보생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다
 
물산장려회 총회 사진 언양의 소년소녀들이 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여 일제물건 안 사기 운동으로 학생들이 일본상인으로 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사진, (동아일보, 1923.05.02.)
▲ 물산장려회 총회 사진 언양의 소년소녀들이 물산장려운동에 참가하여 일제물건 안 사기 운동으로 학생들이 일본상인으로 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사진, (동아일보, 1923.05.02.)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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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공보학생들은 1923년 4월부터 '일본상점의 물건을 사지 말자', '조선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자'고 동맹을 하여 실천을 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언양주재소에 가서 이것은 배일적 사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처하라고 항의를 하였다. 학교에서는 학생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7월 16일 하오 2시경, 일본인 상점에서 언양공보 1학년 학생이 잡기장을 사려고 하자 2학년 학생이 "다음에 사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일본인 상인 촌전(村田龍吉)이 자기 처와 함께 2학년 학생을 자기 방에 끌고 들어가 무수히 구타하였다. 또 다음날 17일 저녁 11시경 여자 야학생 3, 4명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다 촌전 상점 앞을 지나가는데 촌전의 아우와 일본인 목수가 달려들어 앞길을 막으며 방해하고, 못된 장난을 하였다. 이에 대해 학교 당국과 학부형, 지역 유지들이 분개하여 학부형 대회를 열었다.

정인섭의 형인 정인목(2회)의 경과보고가 있고 난 뒤, 학부형 최수한 등의 항의 토론이 있었고 일본인들은 무수히 사죄하였다. 촌전은 이전에도 언양 남부리 송모씨의 처를 아무 잘못도 없는데 무식한 농가 여자라고 함부로 구타하여 일주일간 치료를 받게 했다.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언양주재소에 가지고 갔으나 고소장을 받지 않아 고소를 못하게 함으로 경찰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이처럼 1923년경 일본 경찰과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대한 반발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1924년 이전에 언양부인회가 조직되어 활동 중이었다. 1924년 1월 22일부터 28일까지 언양시장에서 부인회원 5명이 실제 생활에서 다소의 이익이 있는 현대극은 볼만한 가치와 필요가 있지만, 일본인 곡마단은 하등의 이익이 없으므로 구경할 필요가 없다는 자각으로 곡마단 구경 안 하기 운동을 하였다.

일주일 동안 계속 흥행을 한 곡마단에 언양부인들은 한 사람도 구경한 일이 없었다. 지역 사람들은 부인들의 특수한 사상에 감복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인 곡마단 구경 안 하기 운동은 1923년 7월에 있었던 일본인의 언양공보학생 구타사건과 여자야학회 학생에게 못된 장난을 한 것에 대해 당시 학부형들과 학생들이 일본인 상품 불매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던 부인회의 운동이었다.

언양공보 교사 김덕수, 여성단체의 깃발을 세우다
 
언양공보 제1회 졸업생 사진 1915년 제1회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12명 중에서 7명이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오른쪽 첫째가 김덕수, 세 번째가 서주식이다.(사진, 언양초등학교)
▲ 언양공보 제1회 졸업생 사진 1915년 제1회 언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 12명 중에서 7명이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오른쪽 첫째가 김덕수, 세 번째가 서주식이다.(사진, 언양초등학교)
ⓒ 언양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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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여자청년회가 1924년 1월 창립하였다. 울산여자청년회보다 3년이나 빨랐던 것은 언양지역이 그만큼 빨리 여성인력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언양공보 교사로 언양여자 및 부인야학교사로 활동했던 김덕수가 중심이 되어 지역 유지 부인과 함께 30여 명의 회원을 모아 1924년 1월 19일 오후 7시 여자야학회에서 김덕수의 사회와 정완섭[정인섭]의 창립 취지 설명이 있었다.

초대 회장은 김덕수(金德繡), 재무는 정덕조(鄭德祚), 간사는 이순연(李順連) 정복술(鄭福述) 김영순(金英順)이었다. 정덕조(1910년생)는 상남면 거리 출신으로 상남사립 4년을 다니다가 언양공보로 전학와서 1927년 3월 12회로 졸업하였다. 그런데 정인섭의 셋째 누나 이름이 정덕조이다. 언양공보 졸업생의 나이를 감안해 보면, 정인섭의 누나가 재무를 담당한 정덕조인 듯하다.

정덕조는 정인섭의 <온돌야화>에 '우렁각시', '연이와 계모' 2편을, 정복술은 정인섭의 <온돌야화>에 '독자(獨子)의 고통', '호랑이와 난쟁이', '도깨비 방망이' 3편을 채록하여 제공한 인물이다. 이순연과 정복술, 김영순은 야학출신이거나 지역 부인일 가능성이 크다.

언양공보와 여자야학, 부인야학의 교사로, 언양여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한 김덕수는 결혼한 여성으로 언양지역 여성운동의 선구자였다. 과업의 부담감 때문인지 그는 1924년 무렵 교사직을 그만둔 것 같다. 그의 이름이 조선총독부 직원록에서 교사 행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양공보 교사로 야학교사를 하였던 서주식은 1914년 4월부터 1931년 4월까지 근무하였다.

언양불교소녀회가 1924년 9월[4월]에 창립하였다. 1925년 8월에 언양소녀회가 창립하였다. 언양소녀회가 언양여자청년회와 부인회의 영향을 받아 1925년 8월 전후로 만들어졌고, 중남면에는 1924년 하반기에 중남소녀회가 창립되었다. 여성운동이 언양지역에 활성화됨으로 가정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여성해방운동이 일어났다. 1924년 8월 7일 언양소년회와 언양청년회 주최로 현상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참가자는 언양지역의 소년·소녀들이었다.

1등은 "참다운 가정교육의 맛을 보여주시오"로 신말찬(신고송), 2등은 "소년부터"로 하창윤과 "광명의 길"로 신근수, 3등은 "여자도 사람이다"의 정복순과 "무엇보다 배워야 하겠다"의 김경택, "여자의 해방" 김두이였다. 웅변의 주제를 보면 소년들은 가정교육, 계몽을 주제로 소년들이 하였다면, 소녀들은 여성의 교육과 해방을 주장함으로 여성의 인권을 강조하였다.

언양소년소녀들 문화운동에 눈을 뜨다
 
언양공보 9회 졸업생 언양공보는 1923년 3월 제9회 졸업부터 여학생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첫 줄 좌측 첫 번째 김덕수 선생님, 우측에서 두 번째 서주식 선생님.(사진 언양초등학교 제공)
▲ 언양공보 9회 졸업생 언양공보는 1923년 3월 제9회 졸업부터 여학생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첫 줄 좌측 첫 번째 김덕수 선생님, 우측에서 두 번째 서주식 선생님.(사진 언양초등학교 제공)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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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공보는 4년제에서 6년제 바뀌어 언양공보 9회는 1923년 3월에, 10회는 1925년 3월 23일 졸업하여 1924년 3월 졸업생이 없다. 연설에 참가한 사람은 대부분 6년제 졸업생으로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은 언양공보 출신으로 지역 소년단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신고송(1907년생, 6ㆍ10회)은 언양소년단 임원으로 활동하며 소년단의 가극단과 조기회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고, <어린이> 잡지에 동요와 소년단 소식을 투고하였다. 당시 신고송은 모친 밑에서 어렵게 생활하였다. 동네금융조합 급사로 한 달에 10원을 받았다. 멀리 북해도로 돈을 벌러 떠났던 형은 소식도 없었다.

언양공보 9ㆍ10회 출신으로 하창윤(1909년생)은 언양소년회 임원이었고, 신근수(1907년생, 8ㆍ10회)는 중남면 평리출신으로 중남소년단원으로 활동한 듯하다. 김경택(1908년생)은 언양공보 8회 졸업생이다. 정복순(1907년생, 정안나)은 부친이 정택하로 정인섭의 여동생이다. 1921년 3월 언양공보를 졸업했다고 하나 학적부에는 없다. '언양의 성녀'로 불린 그녀는 1946년 언양 남부리에 소화유치원을 세워 운영하다가 1948년 사망하였다. 9회 김두이(1907년생)는 진주사범을 나와 언양공보 교사로 재직 중인 1930년 4월 9일 신말찬(신고송)과 결혼을 하였다.

1925년 1월 2일 중남소녀회는 몇 달 전에 창립되어 여러가지 재미있는 사업을 경영하였는데, 중남사립보통학교에서 소녀들의 노래발표와 조선일보 언양지국장 곽해진(郭海鎭) 외 3명의 '부인문제'와 '소년문제'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언양소녀회 창립 1주년 기념식이 1926년 8월 22일 열렸다. 기념식을 하고 여흥으로 동화무도회를 열었다.

그런데 언양여자청년회와 언양부인회가 창립을 하였지만, 소녀회와 달리 본격적인 활동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1924년 이후 여성운동 1세대 지도자인 한덕수의 부재 때문인 듯하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언양소년운동#울산소년운동#김덕수#신고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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