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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8월 20일, 전국금속노동조합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지회장이 일본 대사관을 찾아 일본 기업인 아사히글라스의 손해배상 청구를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 병력에 가로막혔다.
 지난 2019년 8월 20일, 전국금속노동조합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차헌호 지회장이 일본 대사관을 찾아 일본 기업인 아사히글라스의 손해배상 청구를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 병력에 가로막혔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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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끼 벗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지난 1월 5일 오후 서울남부지방법원 입구. 조끼 한 벌 덧대 입었을 뿐인데 길이 막혔다. 민원실에 판결문을 발급받기 위해 방문했다고 거듭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차헌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지회장은 조끼를 입으면 '무조건 들어갈 수 없다'는 완고한 저지에 "기가 막혔다"고 했다. 조끼에는 이런 구호가 적혀 있었다.

"불법 파견 엄중 처벌"
"노조할 권리 쟁취"
"비정규직 철폐"


"노조 조끼 입어 7년째 해고, 그런데 사법부마저..."

그 사이 관리대원들이 더 투입돼 차 지회장과 동료 조합원 두 사람을 막아섰다. 차 지회장은 1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대화가 아예 안 되니 담당자를 찾았다. 그런데 (담당자도) '문제가 있으면 감사계에 민원을 넣으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렇게 30분가량 실랑이가 벌어졌다. 차 지회장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고 했다. 노조 조끼 때문에 '민원실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은 "반노동자적 시각이 그대로 담긴 행위"라고 판단했다.

사실 '조끼'는 차 지회장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게 한 단어다. 노조 조끼를 입기 전,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부당한 처우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수모는 '징벌 조끼'였다. 업무가 미숙하다는 이유로 낙인 찍히면 빨간 조끼를 입혀 구분하고 모욕을 줬다.

참다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했고, 회사는 한 달여 후 이들 전원에게 문자로 해고를 통보 했다. 그렇게 시작한 복직 투쟁만 7년. 지난 13일 노조는 항소심에서도 회사를 이겼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직고용 판결을 또 받아낸 것이다.

차 지회장은 "노조 조끼를 입어 7년째 해고 상태다"면서 "그런데 사법부마저도 (노조 조끼를) 그런 시각으로 본다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노조 조끼는 보통 의미가 아니다, 해고를 각오하고 긴 시간 견뎌가며 입은 옷이다, 당당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징벌조끼, 그땐 그냥 입었지만 이젠 싸울 겁니다" http://omn.kr/1n4z7).

결국 조끼를 입고 그 위에 가방을 둘러 맨 뒤 민원실을 방문하게 됐으나, "판결문 발급부터 법원 밖을 나설 때까지 보안대원들이 따라 다녔다"고 했다. "범죄자를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차 지회장은 그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노조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청사 방문을 과잉 제지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취지였다.

남부지법에 '직무교육' 권고한 인권위 "방문 목적 분명한데 과잉 제지"   

그리고 최근 국가인권위가 지난달 7일 의결한 결정문이 날아왔다.

"집회 시위와 관련된 복장을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청사 출입을 차단한 것은 헌법 10조가 보장하는 진정인의 행동자유권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한다."

기관장인 김용철 서울남부지방법원장 본인을 포함, 해당 관리대원을 대상으로 "청사 내 집회 및 시위 가능성이 없는 민원인을 과잉 제지 하지 않도록 직무 교육을 실시하라"는 권고다. 차 지회장의 '노조 조끼 입을 권리'가 인정된 것이다.

법원은 인권위 결정에 앞서, 당시 관리대원들의 행동은 집회 시위와 관련된 복장을 착용한 경우 청사 출입을 차단하도록 한 규정을 따른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다. 규정 위반으로 판단한 조끼 문구는 "비정규직 철폐"였다. "진정인에게 불편을 끼칠 수 있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 양해해주길 바란다"는 요청이 덧붙었다.

그러나 인권위는 이렇게 판단했다.

"법원 존엄과 질서유지 및 청사 방호를 위해 청사 내 집회 및 시위를 차단할 필요는 있으나, 진정인과 같이 법원 방문 목적이 분명하고 청사 내 집회 시위 가능성이 없거나 낮아 청사를 출입하더라도 법원의 기능과 안녕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아래는 차 지회장과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마치 우리를 범죄자처럼... 혐오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이 13일 대구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고자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해고노동자들이 13일 대구고등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고자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했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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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은 어땠나.

"경북 구미에서 올라갔으니 오후쯤이었다.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판결문 떼러왔다고. 2명이서 갔다. 재판 때문에 워낙 법원을 많이 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원실에 가는 건데도 (조끼를 벗지 않으면) 못 가게 막더라."
 
- 다른 경우와 달리 강하게 제지 받았다고.


"(행정 문제로 왔다고 해도) 사람을 보강해 못 들어가게 막았다. 30분을 붙잡았다. 대화가 아예 안 되니 담당자를 찾았다. 그런데 (그 담당자도) 문제가 있으면 감사계에 민원을 넣으라고 하더라. 마치 우리를 범죄자처럼... 혐오하는 시각이 느껴졌다. 싸움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 잘못도 안 했다. 이를 악물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렇게 생각했나.

"단순한 사안이 아니라고 봤다. 반노동자적 시각이 (그 행위에) 그대로 담겼다. 재판을 받을 때도 느껴진다. 노동조합이 뭐만 하면 굉장히 사회의 질서를 뒤흔드는 범죄를 저지를 것처럼... 인권감수성이 높아야 마땅한 사법부가 노동자를 대할 때 이런 데, 다른 데는 오죽하겠나. 사법부 밖도 다르진 않다. 국회도 예전에는 노조 조끼를 입으면 일단 안 된다고 하고, 말싸움하고... 그래도 (국회는) 들어가긴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못 들어가게 막으니까, 문제제기를 한 거다."

- 제지 끝에 어떻게 됐나.

"조끼를 입고 들어갔지만, 가방을 둘러매고 들어 간 거라 결국 가린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이 계속 따라다니더라. 판결문 뗄 때까지 들어오니. 범죄자 따라다니는 것도 아니고... (법원 밖을) 나갈 때까지 따라 나왔다."

- 인권위 결정 후 법원 측에서 입장이 전달된 것이 있나.

"없다. 결정문에 대한 남부지법의 입장을 꼭 확인하고 싶다. 받아들일 의향은 있는지. 누군가 잘못하면 사법부가 처벌하지 않나. 피해를 회복하라고도 명령하고. 반성을 안 하면 굉장히 엄하게 처벌하고. (이 건은) 사법부가 당사자인데. 인권위 권고는 (시행) 안 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이 결정까지도 의미 있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법원의) 입장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바뀌지 않겠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7일 차헌호 아사히글라시 비정규직지회장이 낸 진정에 내린 결정 내용.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달 7일 차헌호 아사히글라시 비정규직지회장이 낸 진정에 내린 결정 내용.
ⓒ 결정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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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히글라스 하청노동자로 투쟁할 당시 회사 측의 징벌조끼를 고발하기도 했다. 이후 노조 조끼를 입고 노조를 만든 지 한 달여 만에 전원 해고됐는데. 이 조끼들은 '노조 하는 사람' 입장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입는 노조조끼는 살짝 다른 점이 있다.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한다는 건...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조가입률이) 0.7% (정규직 노조가입률은 13.1%) 뿐인데. 내 현장에 노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비정규직들이 많다. 우리는 노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가 됐는데... (노조활동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내 권리를 위해 입은 조끼, 흉기 아니다"

- 왜 소중한가.

"(노조 활동 하겠다며) 노조 조끼를 입어 7년째 해고 상태다. 헌법으로 보장된 활동인데, 회사에서 쫓겼났다. 그런데 사법부마저도 (노조 조끼를)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두 번 죽이는 거다. 조끼를 입는 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가. 해고를 각오하고 긴 시간을 견디며 입은 옷이다.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내 권리를 위해 내가 목소리 낼 수 있다는 거 아닌가. 보통 의미가 아닌 거지. 우리는 단결해서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데 (무조건) 벗으라고 하니... 흉기도 아닌데."

- 결정 소식을 주변 노조와 동료들에게 전하니 어떤 반응이었나.

"(다른 노조의 조합원들도) 그런 일들을 많이 당하는 것 같다. 수시로 벗으라는 소리를 들었나 보더라. 대체로 현장에서 싸우며 소리치는 걸로 끝나고, 명확하게 정리가 안 되니... 여러 명이서 따지는 식으로 했던 것 같다. (이번 결정으로) 헌법 10조에 나와 있는 행복추구권에 의해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라는 걸 알게 됐다. 주변 변호사도 결정문을 전달 해달라고 하더라(웃음)."

차 지회장은 인권위 결정 사실을 알린 뒤, 다른 노조 조합원들의 공유 요청이 쏟아졌다고 했다. 주변 조합원들의 축하 인사 속에는 "꼭 (법원의) 사과를 받으시라"는 당부도 있었다.

서울남부지법은 인권위 결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오마이뉴스>의 질문에 "아직 (결정문을) 검토 중"이라고 전해왔다.

태그:#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조, #노조할권리, #서울남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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