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군다> 포스터 이미지

영화 <군다>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군다>를 보았다. 영화제목과 동명의 돼지 '군다'와 그가 사는 노르웨이 시골 농장 동물들의 이야기다. 국내에서 관련 작품을 떠올린다면 황윤 감독의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쉽게 떠올릴 법하다. <군다>는 그 문제의식과 동일한 선상에서 출발해 다른 방법론으로, 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나아간다. <잡식가족의 딜레마>에서 인간을 제거하고 해설을 쳐낸 자리에 오직 돼지 가족만 남긴다면 <군다>가 된다.
 
전작 <아쿠아렐라>에서 '물'과 '얼음'의 역동적 움직임을 실제보다 4배 느린 프레임으로 촬영해 놀라운 영상미를 선보였던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은 자신의 어릴 적 기억에서 비롯된 신작을 준비한다. 친하게 지내던 돼지가 어느 날 저녁 만찬으로 요리되어 올라와 있더라는 것이다. 아마 어린 소년에게 평생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체험일 테다. 그 원 체험에서 출발한 감독의 신작은 노르웨이 시골농장으로 향한다. 제작진은 그곳에서 마치 운명이 점지한 듯 첫날 바로 '군다'를 만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다.
 
동물의 눈높이를 구현한 사려 깊은 카메라의 매력
 
영화의 주인공은 '군다'란 이름의 어미 돼지와 자식들로 이뤄진 모계 가족, 그리고 군다 가족의 옆집 이웃격인 닭과 소들이다. 이 농장은 우리가 지나가다 목격하곤 하는 기업화된 공장제 축산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야생의 자유로운 상태는 아니지만 별다른 통제 없이 들판을 활보하는 존재들 곁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목장'하면 흔히 연상하는 공장제 축산업 모델보다는 좀 더 전통적인 방목 형태에 가까운 사육방식이다. 초장부터 이 동물들은 '가축'이란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관객들의 안일한 감각을 허물어뜨린다.
 
<군다>에서 관객들이 내레이션도 자막해설도 배경음악도 아무리 찾아봐야 헛일이다. 이 영화에는 그런 전형적인 요소들은 배제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빤히 다 안다고 생각했던 존재들, '고기'라 불리는 동물들의 전혀 색다른 모습들이 펼쳐지는 90여분의 흑백 화면은 당혹해할 관객들에게 지루하거나 식상할 틈도 주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은 군다와 그녀의 새로운 자손들이다. 군다의 사생활은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듯 상당부분 보장된다. 카메라는 군다의 보금자리인 축사 안으로 잘 들어가지 않는다. 화면에 비춰지는 직사각형 입구 속 칠흑 같은 어둠은 군다 가족의 요새처럼 묘사된다. 거기에서 벌어지는 출산부터 육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군다는 젖을 먹이고 새끼들을 숲으로 인솔해 소풍을 떠나고 막간을 이용해 진흙 목욕을 즐기기도 한다.
 
전작들에서도 다종다양한 촬영 테크닉을 선보여온 감독의 장기는 <군다>에서도 역시나 유감없이 발휘된다. 의도적으로 필터 처리된 흑백 화면은 돼지 가족에게 고전 흑백영화 프레임 속 주인공들의 질감을 부여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천편일률적으로 스테레오화된 기존 가축에 대한 이미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돼지들을 응시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 정면 각도로 관객을 응시하는 듯 처리된 돼지들의 시선은 사람의 눈과 닮은 돼지의 특징을 유감없이 각인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시작은 출산 직후의 귀여운 새끼들의 등장이다. 관객은 대번에 화면 속으로 빨려간다. 하지만 두 자릿수는 족히 넘어 보이는 새끼들은 자신들의 생명줄, 엄마돼지의 젖꼭지를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투쟁에 곧바로 돌입한다. 귀엽게 보이다가도 순간순간 섬뜩한 느낌이 스며온다. 하지만 군다는 인간들의 값싼 동정심에 철퇴를 내리듯 단호하다. 새끼 중 늦게 태어나 지푸라기 속에서 자력으로 나오지 못하는 개체가 있다. 군다가 다가가 짚을 헤치고 끄집어낸다. 관객들은 흐뭇한 해후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그렇게 군다는 인간 위주의 잣대와 시선을 배격하며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화면에 펼쳐 보인다. 새끼들 중 다쳐서 거동이 시원찮거나 장애물에 가로막혀 끙끙 앓을 때에도 군다는 단호하다. 철저히 종의 번식이란 목적에 충실한 셈이다. 하지만 군다는 결코 모진 엄마는 아니다. 무심한 듯 보여도 늘 그 진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 세심하게 구해내고 보살핀다. 갓 태어난 직후 마치 인간 아기를 연상케 하는 군다의 자손들이 보이는 귀여움과, 깊고 그윽한 눈의 군다는 흑백의 정갈한 화면 속에서 가족 풍경화를 보는 것처럼 시종일관 화면 중심에 우뚝 서 있다.
 
휴먼 다큐멘터리의 모성애 묘사와 군다의 가족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방법론과 시선은 무척이나 닮았다. 하지만 인위적 연출보다는 철저히 카메라를 숨겨두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성실히 기록한 데 가깝다. 무엇보다 인간 위주의 감성 자극 의도가 없다. 그저 관객이 자신들의 기준으로 해석하는 과정이 동반될 뿐이다. 즉 해석은 관객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
 
이웃집 동물들의 풍경, 생명의 위대함과 협동의 아름다움
 
 영화 <군다> 스틸 이미지

영화 <군다>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다음에는 이웃 닭들이 등장할 차례다. '마당냥'이 아니라 '마당계' 타입인 군다의 이웃들은 퍼덕퍼덕 거리며 기세 좋게 야산 곳곳을 쏴 다니는 중이다. 특이하게도 카메라에 비친 그들의 풍경은 <주라기 공원>을 보는 느낌과 닮았다. 마치 닭을 포함한 조류들이 현생동물 중 공룡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생물학적 계통성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다. 화면 속에 등장하는 개별 닭 하나하나의 개성과 위압감이 주라기 공원의 티라노사우루스 마냥 당당하고 선명하다. 굳게 다문 부리와 뻣뻣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영토를 순시하듯 당당하고 위엄 있게 이른 아침의 전원을 순시한다. 카메라는 공들여 닭의 뒷다리를 클로즈업한다. 그 프레임 속에서 닭의 발톱은 공룡의 발톱 날이 선 것 마냥 이채로운 풍경으로 조명된다.
 
그렇게 우리에겐 그저 예비 치킨으로만 치부되던 수탉들의 당당한 자태에 경외감을 느낄 즈음 영화는 색다른 반전으로 선회한다. 문득 등장하는 외발 닭의 자립생활 분투기가 관객들의 호기심 속에 잔향 불을 남긴다. 굳게 부리를 다문 채 날개짓을 점프처럼 활용해가며 외발 닭은 뒤뚱뒤뚱 한쪽 발로 껑충거리면서도 장애물을 통과해 이곳저곳을 누빈다. 그런 닭의 사투는 인간 장애인의 인생역정과 대체 다른 게 뭐냐는 듯 그려진다.
 
그 다음 이웃은 한 무리의 소들이다. 한 덩치 하는 소들이 축사 문이 개방되자 우르르 몰려나오는 풍경은 압도적인 위용으로 다가온다. 미국 서부의 들소 떼가 보여줄 법한 박력을 사육되는 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니, 퍽 인상적인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우당탕탕 뛰어놀던 소들은 하나둘 지쳐 쉼을 시작한다. 파리나 다른 벌레들이 잔뜩 들러붙은 상황에 묵묵히 시달리면서도 견뎌내는 소들의 인내가 산업노동자들의 강인함을 묘사하던 영상들과 겹쳐져 보이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색다른 발견의 놀라움을 안겨준다. 날벌레들은 집요하게 소들에게 달라붙는다. 스피커를 통해 관객에게 전이될 지긋지긋한 왱왱 소리와 소의 귀와 콧구멍 주변에 잔뜩 붙어 있는 이미지 테러에 눈살을 찌푸리고 싶어질 때 쯤, 우리가 소를 객체로만 치부하고 넘길 때는 볼 수 없던 광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소들은 두 마리씩 짝을 짓기 시작한다. 서로 반대방향으로다. 대체 저들은 뭘 하려는 걸까? 자세히 보니 그들이 유일하게 날벌레를 쫓을 수 있는 수단, 꼬리로 각자의 머리를 쳐대기 시작한다. 경험적 지혜에서 우러나온 동물의 협동 앞에서 경외감과 함께 우리 자신의 옹졸함을 반성하게 만드는 성찰의 순간이다.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등장, 현실을 감추지 않는 영화
 
 영화 <군다> 스틸 이미지

영화 <군다>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그런 궤적을 지나 다시 카메라는 군다 식구로 향한다. 새끼들이 꽤 자랐지만 아직도 어미돼지에게 칭얼대는 '돈'초딩 시절이 한창이다.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자 새끼들은 신기한 듯 축사 입구로 나와 빗물 맛을 본다. 저렇게 성장하는 구나 흐뭇하고 안일하게 지켜볼 때 즈음, 그들에게 예정된 운명이 잔혹한 신을 흉내 낸 인간들에 의해 일어난다. (이 영화에서 화면 밖에서 항상 존재하는 카메라를 제외하면 인간의 개입은 이 순간이 유일하다) 눈 깜짝할 순간이다. 두 자리 수의 새끼돼지들이 우글대던 축사는 어느새 텅 비어 있다. 군다는 사방을 헤매며 구슬픈 소리를 낸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카메라는 비정하게도 얼마 전까지 새끼들이 매달리던 군다의 젖꼭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인두겁을 쓴 자라면 누구나 측은지심이 드는 순간, 우리는 그런 깊은 슬픔이 <군다>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규명하기 시작해야 할 차례다. 그 슬프고 원통해 보이는 군다의 두 눈, 인간을 닮은 그 눈동자를 보면서 돼지는 그저 가축일 뿐이라고, 극단적으로는 고깃덩어리로만 치부하던 이들은 어떤 변명을 준비할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떤 주장도 공식적으로 펼치는 적이 없다. 하지만 의도적 개입 대신 최대한 대상에 근접한 카메라의 성실함만으로 이 영화는 감독이 어릴 적 품었던 상처와 의문을 관객에게 가공할만한 싱크로로 전이시킨다.
 
<군다>는 그저 그동안 제대로 조명된 적이 드문 의외적 존재들, 작은 전통적 방식의 목장 동물들을 촬영해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색다른 영화를 찾던 이들에게 주제의 울림을 충분히 선사한다. 테크닉과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가 입증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결국 기술은 생각과 마음을 전하는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기억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인권운동과 비거니즘에 활발하게 기여하는 배우 호아킨 피닉스가 총괄 프로듀서로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군다>를 보고나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게 될 테다.
군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호아킨 피닉스 다큐멘터리 동물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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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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