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임진왜란은 승전국 조선에게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면, 침략자 일본에게는 패했음에도 이윤이 남는 장사였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참혹한 전쟁으로 조선이 수많은 인명피해와 경제적-문화적 손실을 입어야 했던 반면, 일본은 조선에서'약탈'해간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오히려 번영의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잊혀진 임진왜란의 후일담이 남긴 씁쓸한 여운이다.
 
6월 29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 10회에서는 '임진왜란, 일본은 왜 도자기를 노렸나?'라는 주제로 한국사 히스토리 투어가 진행됐다.
 
임진왜란을 거쳐 정유재란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의 목표는 당초 조선 점령과 명나라 침공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약탈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뀐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타깃이 되어 끌려갔다. '조선일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은 생포한 조선인들을 짐승처럼 대하며 무거운 짐을 옮기게 하였고, 이용가치가 사라진 조선인은 '쓸모없는 소'라고 지칭하며 죽이고 가죽을 벗겨서 인육을 먹기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인신매매상인에 의하여 일본으로 넘어가 유럽과 동남아 일대에 국제노예로 팔렸다. 당시 조선인 노예들이 전 세계 노예 시장에 풀리면서 그 시세는 6분의 1로 내려갈 만큼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얼마나 많은 조선인 노예들이 임진왜란 당시에 끌려갔는지 정확히 집계된 기록은 없지만, 학계에서는 대략 10만에서 20만 이상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자기에 대한 열망과 환상

일본이 조선인 포로중에서 특별히 선별하여 귀하게 여긴 이들이 있었다. 바로 '기술자'들이었다. 1593년 11월 히데요시가 내린 서신에 의하면 '사로잡은 조선인 가운데 세공기술자와 바느질 잘하고 손재주가 있는 여인이 있으면 곁에 두어 일을 시키고 싶으니 보내라'고 지시한 기록이 나온다.
 
특히 히데요시가 조선의 수많은 손기술 중에서도 유독 탐을 냈던 것은 도자기 제조술이었다. 당시의 조선은 중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기 기술이 발전한 국가였다.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이도다완은 본래 조선 민가의 제기용 그릇이었다. 하지만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이도다완은 상류층의 다도용 도구로 위상이 바뀌었다. 다도, 다회로 불리우는 차 모임은 당시 일본에서는 최고위 권력층만이 할수 있는 행사였다. 그중에서 단연 상고급으로 평가받은 찻잔이 바로 조선의 이도다완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이도다완은 부와 명예의 상징이자 최고의 사치품으로 꼽혔다.심지어 한 영주는 "오사카 성을 준다고해도 이도다완과는 바꿀 수 없다"는 어록을 남겼을 만큼 일본에서 조선 자기에 대한 열망과 환상이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은 나무 그릇이나 도기를 사용했고 조선에서 흔했던 자기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 현대의 대한민국이 반도체 기술 강국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16세기에는 자기 제조술이 최첨단기술에 해당했다.
 
일본은 왜 자기를 만들지 못했을까. 첫째는 자기의 재료가 되는 고령토(장석)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두 번째는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처럼 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1300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고화력 가마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변색과 흠집을 막기 위하여 도자기의 표면에 덧씌우는 코팅 효과를 내는 유약이 없었다. 이처럼 자기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은 조선의 자기장들을 대거 납치하여 기술을 약탈하려했던 것.
 
선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하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려고 했으나 사옹원에 그릇이 없어서 취소했다는 황당한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곳곳을 약탈하여 궁궐의 그릇까지 모두 남김없이 쓸어간 데다가, 그릇을 만들던 사기장들도 대거 끌려가거나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은 조선 땅에서 약 8년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고령토까지 훔쳐갔다.
 
조선에서 약탈해간 인력과 물자가 담긴 침략선은 일본의 규슈 섬에 도착했다. 규슈는 현재 세계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로 자리잡았다. 이 당시 일본에 잡혀갔던 조선인 사기장 이삼평은 도자기가 유명한 아리타 지역의 경제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힌다.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이삼평은 한국 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기록에 따르면 김해 사람으로 임진왜란 말에 일본으로 잡혀간 인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저술된 이삼평 비문에 따르면 당초 일본에 적극적으로 자진해서 협력한 인물처럼 묘사되었지만, 한국 학자들의 문제제기와 항의로 현재는 내용이 일본이 잡혀서 강제로 협력한 것으로 내용이 일부 수정되었다.
 
몇 년 후 이삼평은 한국에서 약탈한 고령토가 바닥나자 정착지를 떠나 직접 원료를 찾아 헤매다가 아리타 지역의 이즈미산에서 다량의 장석을 찾아낸다. 놀랍게도 그 양은 약 400년간 도자기를 만들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바로 코앞에 귀중한 원료를 두고도 몰랐던 일본인들을 대신하여 조선인 사기장이 찾아준 귀중한 선물이었다. 이즈미산은 현재는 장석 채굴은 하지않지만 1980년 이후 일본의 주요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후 이즈미산 일대에 정착하여 도자기 제조에 전념하던 이삼평은 1616년에는 마침내 일본의 흙으로 만든 일본 최초의 백자를 완성해낸다. 일본 도자기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크게 기뻐한 일본의 영주들은 이삼평과 함께 아리타에 조선인들을 모아 마을을 건립하고 분업화에 따른 대규모 도자기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아리타는 세계적인 도자기 생산 원산지가 됐다.
 
1650년~1757년 동안 아리타에서 생산되어 세계에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의 숫자는 약 120여만 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도자기 판매수입이 아리타 재정수입의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심지어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은 도자기의 나라"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고. 우리로서는 뭔가 복잡한 감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유학'"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자기제조술이 급성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아리타 도자기 축제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일본 최고의 도자기 축제로 꼽힌다.
 
일본의 타쿠카고문서에 따르면 '아리타에서 최상의 흙을 발견하였으므로 주거를 옮겨 도자기를 만들고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사가번의 제일가는 사업이 되었는 바 이는 이삼평의 공훈'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삼평을 '도조', 즉 도자기의 신으로 인정한다고. 아리타에 위치한 도잔 신사에는 한복을 입은 이삼평의 동상이 세워져 그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매년 5월마다 이삼평의 공을 기리는 도조제가 개최되고 있다.
 
하지만 이삼평과 달리 일본에서 괴로운 삶을 살아야했던 조선인 사기장들이 훨씬 많았다. 일본의 영주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 격인 조선인 사기장들이 외부로 도망가거나 기술을 유출하지못하도록 한 마을에 모아서 통제했다. 조선인들은 열악한 처우와 감시속에 굶주림, 병마와 싸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했다.
 
'서유잡기'에 따르면 "오늘에 있어 벌써 200년이나 지났고 말마저 이 나라 사람과 다름없이 사용하고 있다. 어쩐지 고향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지금이라도 귀국이 허용된다면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라는 기록을 통하여 당시 조선인들의 애통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조선인 사기장들은 최고의 자기를 만들겠는 조건으로 일본 영주로부터 신을 섬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명절마다 민족의 상징인 단군에 제사를 지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일본의 비밀스러운 도자기 마을로 꼽히는 오카와치야마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타지에서 사리져간 880여 명의 조선인 사기장들의 비석이 한데 모여 탑을 이루고 있다. 원래 마을 곳곳에 방치되어 있던 비석들은 한 사기장의 사연을 듣고 안타깝게 여긴 한 스님이 1938년에 묘비를 한 곳에 모아 지금의 탑으로 만들었다고. 결국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타향에 잠들어야 했던 사기장의 한이 느껴지는 탑의 모습은 뭉클한 여운을 자아낸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 기술과 기술자만이 아니라 책까지 약탈해갔다. 전국시대라는 오랜 내전으로 각종 기록과 서적이 대거 소실된 일본은 이마저도 조선에서 훔쳐가며 보충하려고 했던 것. 궁궐과 양반집을 아울러 조선에게 약탈해간 책의 규모는 10만여 권 이상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에서부터 유학, 불교, 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문맹이 많았던 일본군이 귀한 책들을 선별하여 약탈할 수 있었던 데는 비교적 높은 학식을 지녔던 일본 승려들의 도움이 컸다. 한편으로 일본의 문화재 약탈이 그만큼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진행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일본은 책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들도 대거 납치해갔다. 선비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은 일본군에 생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본은 강항의 옷차림을 보고 그가 관직에 있는 인물임을 눈치채고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았다. 일본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선비 포로를 귀하게 여겼다.
 
처음에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강항은 막상 일본에 도착하자 180도 태도를 바꿔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일본의 역사와 지리 등을 공부했다. 이는 기왕 포로로 잡힌 이상 훗날을 기약하여 일본의 약점과 비밀을 파악하자는 강항의 큰 그림이었다.
 
훗날 강항이 고국으로 돌아와 집필한 '간양록'에는 일본의 역사와 풍속, 지리, 기후, 일본인의 성향, 고위층들의 성격과 대립관계, 일본군의 군사전력과 대처방안 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일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조선은 강항 덕분에 제대로 된 일본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일본에 가는 사신에게 간양록는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됐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은 간양록을 금서로 지정하여 불태우기도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그 내용을 극도로 경계했음을 보여준다.
 
강항이 일본에 남긴 영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항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글을 팔아 조선으로 귀국할 비용을 확보했다. 일본에서 강항의 글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였다. 일본의 성리학자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의 글에 감명받아 제자를 되기를 청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강항과 후지와라는 함께 일본 최초의 유학 교과서 사서오경 왜훈본을 완성하고, 이후로 일본에서도 유학이 민간에 개방되며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후지와라는 근세 일본 유학의 시조로 꼽히며, 그 스승인 강항은 일본 유학(주자학)의 아버지로 칭송받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특히 문화 부분의 발전은 엄청났다. 조선에서 약탈해온 활자와 서적의 유입으로 문화 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출판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일본의 교육기관 데라코야가 설립됐다. 또한 양질의 도자기 제조기술과 인력을 확보하며 세계의 도자기 시장을 장악했다. 이밖에도 조선 기술의 유입으로 각종 제조술이 발전했다.
 
1624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동사록에 따르면 '시장에는 물화가 산처럼 쌓였고 살림집에는 곡식이 널려있으니 일본 백성의 부유함과 풍성함이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저술하고 있다. 임진왜란의 전범국인 일본이 전쟁 이후 오히려 번영을 누린 반면, 조선은 평화를 잃고 수많은 인력과 문화의 손실, 기술의 정체라는 후유증까지 겪어야 했다는 후일담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조선의 문화를 훔쳐간 '문화전쟁'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한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을 '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유학'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 유학의 비용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

전쟁이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얼마나 많은 손실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한 국가에 있어서 기술과 문화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아픈 대가를 치른 끝에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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