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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달성공원. 전체 면적 3만9천여 평 가운데 토성 부분은 2만여 평에 이른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달성공원. 전체 면적 3만9천여 평 가운데 토성 부분은 2만여 평에 이른다.
ⓒ 대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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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1596(선조 29)년 설치한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인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1969년 8월에 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대구 인구가 100만이 되지 않을 때, 변변한 공원 하나 없었던 시절이라 달성공원은 이내 대구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이 되었다.

1969년에 문 연 달성공원, 온 시민의 사랑을 받다

이듬해인 1970년 5월에 동물원이 문을 열면서 달성공원의 이름값은 더 높아졌다. 아이들은 달성공원 가족 소풍을 손꼽아 기다렸고, 아버지는 도시락을 싸고 가족들을 인솔해서 공원을 찾곤 했다. 키 225cm로 '달성공원 마스코트', '거인 수문장' 등 숱한 애칭으로 불리며 공원 정문을 지킨 키다리 아저씨도 달성공원의 한 부분이었다.

2016년 퇴직 후 지역 사람들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을 찾았었다. 워낙 오랜 세월이 흐른지라, 키다리 수문장은 당연히 없고, 입장료도 없어졌다. 나는 공원 남쪽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와 석주 이상룡 구국 기념비를 둘러보았고 이내 공원을 떠났었다. 
 
이상화 시비. 시 '나의 침실로'(전 12연) 중에서 11연을 새겼다. 내가 본 시비 중 가장 아름다운 시비다.
 이상화 시비. 시 "나의 침실로"(전 12연) 중에서 11연을 새겼다. 내가 본 시비 중 가장 아름다운 시비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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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에 상화 시비가 있다는 사실도 나는 김소운의 <목근통신(木槿通信)>을 읽으며 알게 됐다. 여차한 명승지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사람 구경을 하고 가는 게 고작이다. 정작 달성공원을 다녀왔지만, 상화 시비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돌아본 이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교통으로 다시 달성공원을 찾다

달성공원을 다시 찾아 제대로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올해 들면서다. 지난 9일, 아침에 기차로 대구에 와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달성공원 앞에 내렸다. 마침 점심 때라, 부근의 오래 묵은 한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었다. 수십 년 역사를 지닌 맛집이라고 했지만, 1만 원짜리 식사로는 조금 모자라지 않나 싶었다.

정오를 넘긴 시각, 나는 정문을 통과했다. 지상의 구조물이나 시설보다 나는 공원을 빙 두른 달성(達城)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4m 높이의 토성(土城)인 달성은 공원을 감싸면서 1.3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대략 서너 차례쯤 공원을 찾았지만, 그 토성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다.

신라 때 달구화현(達句火縣)이라 불린 대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 비로소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달성의 옛 이름은 이 달구화(達句火) 달불성(達弗城)에서 유래한 것으로 달성은 경주의 월성(月城)처럼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토성이다.
 
정문에서 바라본 공원 전경. 공원엔 둘레길뿐 아니라 안쪽에도 오래된 나무가 아주 많다.
 정문에서 바라본 공원 전경. 공원엔 둘레길뿐 아니라 안쪽에도 오래된 나무가 아주 많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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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은 청동기시대 이래, 지방의 중심세력이었던 집단이 그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으로 추정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패총貝塚) 유적이 있고 목책(木柵)의 흔적도 있다고 한다.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가운데서 가장 이르게 나타난 형식인 셈이다.

고려 공양왕 2(1390)년과 조선 선조 29(1596)년에 달성에 석축을 더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자리(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로 옮겨가기(1601) 전까지 감영을 두기도 했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고종 광무 9년(1905)에 공원으로 만들어졌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원 안에 대구신사가 세워지기도 했다. 

토성 둘레길을 도는 것으로 달성공원 답사를 시작했다. 토성길은 공작사 뒤쪽에서부터 향토역사관까지인데, 놀랍게도 이 길의 이름은 따로 붙이지 않은 듯했다. 몇 걸음만 걸으면 대구문화재자료 3호 관풍루(觀風樓)다.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1601년(선조 34)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누각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관풍루는 '감사가 누상(樓上)에서 세속을 살핀다(觀風世俗)'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와 그 옆에 서 있는 팽나무 고목
 경상감영의 정문인 관풍루와 그 옆에 서 있는 팽나무 고목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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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남서쪽에 포정문(布政門)을 세우고 그 위에 만든 문루가 관풍루다. 1906년 당시 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철거할 때 건물만 옮겼다가 1917년 달성공원 입구로 이전한 것이다. 처마 아래 편액은 '관풍루'지만, 누각의 편액은 '영남포정사(布政司)'다.

손을 덜 댄, 거칠지만 편안한 흙길

누각 옆에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고 있는 듯했다. 가지에 빽빽하게 달린 연록 빛 나뭇잎들은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을 냈다. 나무의 짙은 그늘에선 중년 남녀 몇 명이 담소하고 있었다.

오래된 누각 아래, 고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토성 둘레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숲을 품고 있는 길인가를 나는 단박에 깨달았다. 거기서 1.3km 이어진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연신 탄성을 질러 댈 수밖에 없었다.
 
달성을 국가에 헌납한 서침을 기리고자 서침나무라 부르는 회화나무. 쉬는 이들은 역시 노인이다.
 달성을 국가에 헌납한 서침을 기리고자 서침나무라 부르는 회화나무. 쉬는 이들은 역시 노인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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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공원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는 대체로 고욤나무·느릅나무·말채나무·팽나무·쉬나무·오동나무·회화나무·왕버들 등이다. 그러나 그걸 일일이 판별할 만한 눈이 내겐 없다. 대신, 이른바 '관리의 손길이 덜 미친' 거친 만큼 자연에 더 가까운 흙길 좌우에 펼쳐진 숲이 연출하는 풍경 앞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이다.

전체 공원 면적 129,700㎡(39,234평) 가운데 토성은 66,116㎡(20,000평)로 과반에 이른다. 단순히 둘레길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지만, 평균 높이 4m의 길 좌우의 면적이 만만찮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좌우에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어진 나무들이 이루는 연록 빛 숲은 공원의 나머지 풍경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 흔한 데크 구조물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이다. '야자수 매트'도 물론 없다. 길은 제대로 고르지 않아 거칠고, 오르막도 거친 자연석을 쌓아 계단을 만들었다. 길가에는 심심찮게 큼직한 돌들이 눈에 띈다. 인공의 구조물이라면 군데군데 놓인 벤치와 시멘트로 만든 쓰레기통 정도다.
 
둘레길 좌우에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어진 나무들이 이루는 연록 빛 숲은 공원의 나머지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둘레길 좌우에 제멋대로 휘어지고 꺾어진 나무들이 이루는 연록 빛 숲은 공원의 나머지 풍경을 압도하고 있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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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둘레길. 별로 다듬지 않은 흙길에 군데군데 빨간 칠을 한 벤치가 놓여 있다.
 토성 둘레길. 별로 다듬지 않은 흙길에 군데군데 빨간 칠을 한 벤치가 놓여 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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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길을 걷는 이들은 대체로 중년 이상 노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축들은 운동 삼아 걷는 이들이었다.
 토성길을 걷는 이들은 대체로 중년 이상 노년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축들은 운동 삼아 걷는 이들이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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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는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러운 장식을 한 빨간 색인데 묘하게도 그게 전체 풍경을 흩트리지는 않는다. 거기 앉아서 쉬는 늙수그레한 중년과 노년의 남녀들도 마찬가지다. 거칠지만, 좌우의 숲에서 뿜어내는 신선한 대기 속에 연록의 풍경은 잘 녹아 있는 것이다.

공원 내부만 바라보는 시민들에겐 숨겨진 토성 둘레길

두어 군데 공원에서 토성길로 오르는 길도 매끄럽게 정돈하지 않기는 매일반이다. 거친 질감의 돌을 쌓은 계단길이거나, 별다른 구조물을 쓰지 않은 흙길인 까닭이다. 노인들이 걷기엔 다소 험하긴 했지만 나는 그 길이 썩 마음에 들었다.

토성길로 다니는 사람은 대체로 중년이나 노년이다. 체육복 차림으로 걷기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은 공원 이웃에 사는 걸까. 토성길을 걷는 이들 가운데, 우연히 이 길을 발견한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숨어 있는 이 숲길을 나는 40여 년 만에 마침내 처음 오른 것이다.
 
공원에서 둘레길로 오르는 통로. 돌로 거칠게 쌓아놓은 길이다.
 공원에서 둘레길로 오르는 통로. 돌로 거칠게 쌓아놓은 길이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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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 둘레길. 오르막에 돌로 쌓은 계단이 있는 거친 길이지만, 손이 덜 탄 이 길이 오히려 좋았다.
 토성 둘레길. 오르막에 돌로 쌓은 계단이 있는 거친 길이지만, 손이 덜 탄 이 길이 오히려 좋았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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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걷는 것은 잎사귀들이 걸러주어서 연록 빛으로 바뀐 햇살을 온몸에 받는 일이기도 했다.
 숲길을 걷는 것은 잎사귀들이 걸러주어서 연록 빛으로 바뀐 햇살을 온몸에 받는 일이기도 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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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댔다. 내 눈이 확인한 숲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의 눈으로 담았고, 망막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풍경을 카메라 파인더 안에서 붙잡고 싶어서였다. 돌아가서는 컴퓨터 폴더에 보관한 숲길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숲길을 되짚어 다시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난해 가을, 진주성 둘레길을 둘러보면서 진주 시민이 부럽다는 여행기를 썼다. 정작 진주 시민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잘 알지 못할 거라고 너스레를 떨면서.(관련 기사 : 그냥 한번 와 봤는데…진주 시민들이 진심 부럽습니다)

나는 달성공원의 토성 둘레길도 진주성의 그것에 못지않다는 걸 깨달으며, 단풍이 고운 늦가을에 이 숲길을 다시 찾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달성공원, #토성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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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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