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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리굴비 먹었는데 맛있더라. 언제 먹으러 갈까?"

얼마 전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전날 늦게 들어온 남편이 전날 저녁 식사가 맛있었다며 이렇게 제안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이제 생선도 전혀 안 먹고 싶어. 살아 있을 때 모습을 연상시키는 건 아예 못 먹겠어."

그러자 남편은 이렇게 물었다.

"생선은 몸에 좋은데 왜?"

나는 다시 설명했다.

"비건은 건강을 위해서 동물을 안 먹는 게 아니야.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고 싶어서지."

그러자 이런 말이 돌아왔다.

"아니 그럼 식물은 왜 먹어? 식물도 생명이잖아."

더 이상 논쟁을 이어가면 아침부터 얼굴을 붉힐 것만 같아 입을 닫았다. 이날 내내 내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비건 지향으로 살기 시작하면서 식사 자리는 내게 종종 불편한 자리가 되곤 한다. 당연한 듯 식탁에 올라와 있는 붉은 고기와 생선 회들이 역겹게 느껴지곤 하지만, 나는 다른 이들이 불편해할까 굳이 비건 지향인임을 밝히지 않는다. 대신 티 나지 않게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먹는다. 그러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음을 들킨 날엔 이런 말들을 듣게 된다.

"아이고, 이 맛있는 걸 안 먹다니. 무슨 재미로 살아요?"
"나이가 있을수록 단백질을 많이 먹어야 하는데 어쩌려고 그래요?"

 
가깝거나 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일들이 쌓여가면서 어떻게 하면 논비건들(비건이 아닌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나의 신념을 표현하고 지켜갈 수 있을지가 큰 고민거리였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20일 발행된 멜라니 조이의 책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원제: beyond beliefs)를 만났다. '신념을 넘어 서로에게 연결되고 싶은 비건-논비건을 위한 관계 심리학'이라는 부제는 '이런 고민을 나만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안도감을 주었고 나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멜라니 조이 지음, 강경이 옮김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심심, 2022)
 멜라니 조이 지음, 강경이 옮김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심심, 2022)
ⓒ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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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아닌 '관계'를 바라보기
 
사회 심리학자이자 비건운동가인 멜라니 조이는 비건들이 논비건들과 만날 때 '차이'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관계 맺기가 힘들다고 지적한다. 즉, 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 그 차이 때문에 지레 관계가 힘들 것이라 가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이는 관계는 '차이'가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안정감을 느끼는지, 갈등 상황에서 회복할 탄력성을 갖는지에 달려 있다며 '차이'가 아니라 '관계' 자체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조이는 많은 사람들이 '차이'는 부족함과 단절을 뜻하며, 잘 지내려면 서로 비슷해야 한다는 오해를 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차이를 '부족함'으로 인식할 때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깎아내리게 된다. 또한, 차이가 있으면 '단절'된다는 오해는 차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들을 하게 하고 대체로 이런 시도들 때문에 관계는 진짜 단절된다. 잘 지내려면 서로 비슷해야 한다는 생각 역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마음을 열 기회를 놓치게 한다. 조이는 '차이'는 실제로 대부분의 관계에서 이롭고 서로를 알아가며 보완할 기회를 준다며 이렇게 단언한다.
 
대부분의 차이는 이롭다. 차이는 개인의 성장을 격려한다. (81쪽)

나는 마음이 뜨끔했다. 다양성 존중을 그토록 중요한 가치로 여기면서도 나 역시 신념의 차이는 관계에 해가 된다 믿어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친밀한 사이에서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는 더 위험하다 느꼈고, 때문에 남편의 말에 나는 더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육식주의의 시스템을 이해하기
 
이어서 조이는 인류가 오랫동안 '육식주의' 시스템 안에 있었고, 지금도 육식주의 프레임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그는 육식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육식주의(carnism)는 특정 동물을 먹도록 사람들을 길들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념이자 이념이다.(...) 너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신념의 체계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 육식주의는 비거니즘의 반대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거니즘과 달리 정의되지 않는다. (136쪽)
 
이 구절을 새기자 '육식주의'가 '가부장제'와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온 가부장제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그 개인의 잘못이나 무지로 돌릴 수 없듯 '육식주의'도 마찬가지 아닐까. 너무나 당연해 명명하는 것조차 생소하게 느껴지는 '육식주의' 세상에서 육식과 동물 소비의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비건들이 육식주의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인지하고, 자신들도 한때 육식주의를 따랐음을 기억할 때, 논비건들과 진심으로 존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오랫동안 내 마음을 비춰보았다. 그러자 나 역시 육식주의 프레임을 종종 잊고 논비건들을 개인적으로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마음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논비건들이 내게 건네왔던 말들이 그토록 '비난'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비건지향을 실천하면서 식사 자리가 불편한 일이 잦아졌다. 비빔밥도 계란과 소고기 볶음이 들어간 고추장 때문에 편하게 먹기가 힘들다.
 비건지향을 실천하면서 식사 자리가 불편한 일이 잦아졌다. 비빔밥도 계란과 소고기 볶음이 들어간 고추장 때문에 편하게 먹기가 힘들다.
ⓒ und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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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이 우선, 그 다음이 변화
 
나아가 조이는 좋은 관계는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수용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비건의 입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차이를 받아들이면 친밀한 사람이 비건이 되지 않더라도, 안전과 교감을 느낄 만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수용받지 않을 때 저항을 한다. 따라서 차이를 진심으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비거니즘에 마음을 열게 도와줄 수 있다. 나아가 차이를 존중해야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럴 때 함께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
 
조이는 이런 수용이 전제될 때 논비건도 비건 연대자로서 비건과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비건 연대자'란 비건은 아니지만, 비건들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 봐주고, 그 실천을 응원하고, 채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라도 환경과 동물을 위한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비건 연대자'라는 말을 마음에 담아보니 남편에게도 좀 더 마음이 열렸다. 돌아보면 남편은 다른 식사 자리에서 고기를 안 먹는 나의 입장을 대변해주기도 했고, 함께 동물성 제품 소비를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나의 '비건 연대자'였던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바로 다음 날. 아이 학교의 독서회 모임에서 간단한 식사 자리가 있었다. 식당에 모인 학부모들은 찜닭으로 메뉴를 통일하려 했다. 나는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조금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떡볶이 먹을게요. 제가 고기를 안 먹어서요."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분이 내게 물었다.

"어머나 비건이세요? 와, 대단하세요."

나의 비건지향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그 분은 잠시 후 차를 주문하다 이렇게 말했다.

"빨대 빼고 주세요. 저는 이런 거라도 실천할래요."

비록 그분이 비건은 아니었지만 나는 든든한 지지자를 얻은 듯한 기분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분은 찜닭을 맛있게 먹었고, 나는 떡볶이를 먹었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분명 연결될 수 있었다.
  
사람은 '신념'을 넘어서는 존재다. 비건과 논비건도 얼마든지 서로를 존중하며 연대할 수 있다.
 사람은 "신념"을 넘어서는 존재다. 비건과 논비건도 얼마든지 서로를 존중하며 연대할 수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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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connected, too?'
(당신도 연결되어 있나요?)


비건들 사이에 '당신도 비건이니?'라고 묻는 질문이다. 사실 비거니즘의 핵심은 함께 사는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비건들은 논비건들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관계의 예의를 함께 지킬 때,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맥락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신념의 차이를 넘어 연결될 수 있다.

비단 비건-논비건 뿐만이 아닐 것이다. 멜라니 조이의 다음 문장을 기억한다면 그 어떤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념 이상의 존재다. 그리고 관계는 이상을 공유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토대로 한다. (206-207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나의 친애하는 비건 친구들에게 - 신념을 넘어 서로에게 연결되고 싶은 비건-논비건을 위한 관계 심리학

멜라니 조이 (지은이), 강경이 (옮긴이), 심심(2022)


태그:#비건, #비거니즘, #생명존중, #나의 친애하는 비건친구들에게, #멜라니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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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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