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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보다 민족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함세웅 신부
 종교보다 민족을 우선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함세웅 신부
ⓒ 함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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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지도부가 함세웅을 동부이촌동 성당으로 보낸 데는 의도가 있었다. 고위 공무원과 군장성,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그래서 보수성이 짙은 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가서 '자중'하거나 '엿이나 먹으라'는 심보가 작용했을 터이다. 

거기 뭐 군인들도 많았고 공직자도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동조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한강성당에서 저는 앞장서지는 않았어요. 주로 김승훈 신부님 계시는 동대문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많이 했고요. 한강성당에서도 미사 등 행사를 두세 번 했어요. 그때 한강성당 신자들 중에는, 경찰 백차만 봐도 도망가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구속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할 때는 외부에서 온 분들이 더 많았어요. 아파트 사람들은 좀 연약해 겁이 많았고, 또 성당이 워낙 조그맣기 때문에 2백, 3백 명이면 꽉 찼어요 

요즘에 와서야 들은 이야긴데, 저보다는 사목위원들이 더 고통을 받았더라고요. 형사들이 사목위원들 직장을 찾아가서 세무사찰한다고 위협했고, 함 신부에게 동조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대요. 그분들께 큰 마음의 빚이 있음을 깨닫고 보속의 기도를 올립니다. (주석 2)

유신말기 천주교 안에서도 중앙정보부와 유착된 세력이 있었다. 그래서 행사나 인사에 개입하고, 공작하여 함세웅과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에 각종 불이익을 행사하였다. 출감 미사에서 토로했던 '우리 가운데 유다'의 현재진행형이었다. 

1978년 2월에 한강성당에 부임해서 84년 9월까지 7년 동안 잘 지냈습니다. 제가 동부이촌동으로 갈 때 중앙정보부는 너무 좋아했어요. 저놈이 저기 가서 몇 달 안 되어 쫓겨날 거라고 했어요. 거긴 다 공무원촌이고 군인들 많이 사는 데니까. 또 정보부원들이 공작을 해요. 저도 이걸 어떡하나 조심하는데 저와 가까운 친구 신부가 조언해주는 거예요. 

거기 가서 인권은 이야기하되, 부자 동네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말은 안 하면 좋겠다고요. 아침미사 때에는 꼭, 짧게 5분에서 10분 사이에 성경 말씀으로 강론을 했어요. 성경 말씀을 갖고 강론하면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매일 성경 말씀 1독서와 복음 말씀 갖고 주일도 그렇게 강론하면서 지냈어요. (주석 3) 

'불안한 안전'의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유신체제가 말기에 이르면서 동일방직사건, 도시산업선교회사건, 함평고구마사건,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에 이어 안동 농민 오원춘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농협에서 알선한 감자씨를 심었으나 싹도 나지 않는 바람에 감자농사를 망치게 된 오원춘이 이를 사회에 고발하자 중정 요원들이 납치하여 고문한 사실이 안동교구 사제단 등에 의해 폭로되었다. 


주석
2> <함세웅의 시대증언>, 184쪽. 
3> 앞의 책, 17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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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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