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바람이란 단어를 좋아합니다. 무언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전 아련하게 웅크리다 크게 반향을 일으키는 듯한 그 모습 말이에요. 커다란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이 저도 그렇게 살아보려고요."
지난 23일 큰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바람꽃이라 부른다는 캘리그라피 가숙진 작가를 만났다.
- 태어난 곳은 어디며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1966년 6월, 인디언 체로키족들은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이라고 했고, 퐁카족은 '더위가 시작되는 달'이라고 했다. 내가 태어나던 그해는 봄이라고 하기엔 햇살이 강했고 여름이라고 하기엔 조석으로 너무 쌀쌀했다고 한다.
나는 태안군 남면 바다가 인접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파도와 바람 소리가 친구 되어주었고, 먼발치에서도 자주 갈매기를 찾는 버릇이 생길 정도로 자연을 좋아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갈매기들은 모두 똑같은 눈빛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바다의 포말과 함께 먼바다의 푸른빛이 어쩌면 그들에게 전달되어 그리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갈매기를 바라보는 것이 심드렁해지면 갯벌의 다져진 곳을 찾아 꼭꼭 밟아가며 갯골을 눈으로 좇아가곤 했다. 그 줄기의 끝에는 늘 바다로 이어져 수평선 끝에서 없어지곤 했다. 은빛 물결이 찰랑였던 당시, 나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서서히 여물어가고 있었다."
- 말씀을 들으면서 어쩌면 시인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단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에는 몸이 약했다던데 그 당시 얘기를 해달라.
"아 맞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늘 약하게 태어난 나를 걱정하셨다. 그래도 정신력 하나는 독보적으로 강했든지 그렇게 골골대면서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악바리였다. 어쩌면 건강하지 못한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멘탈이란 두 단어가 내게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약했지만 강한 성품의 내게도 단 하나, 나를 해제시켜주는 무기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나는 참말로 문학을 사랑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국민(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담임선생님이 동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평소 바다와 갈매기, 바람 소리 등 자연을 벗 삼아 산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를 써 내려갔다. 사실 내가 쓰는 것이 시가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날 제출한 동시를 보고 선생님은 '아주 뛰어난 시적 감각을 지녔다'고 크게 칭찬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 손에 이끌려 저학년임에도 고학년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활동반에 들어가 시를 배웠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대회에 출전하여 상도 제법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과제로 제출한 기행문이 뛰어났던가 보다. 그때도 교무실 불려가 문학반 선생님의 극찬을 받았다. 나는 다시 자연스레 문학소녀로서 선생님께 방과 후 특별지도를 받았다. '넌 꼭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학창 시절, 또 다른 추억은 늘 환경미화 담당이 내 차지였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전담하다시피 했다. 내 자랑 같지만, 글씨도 그림에도 관심이 꽤 많았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학교 간판 글씨도 고무판에 새겨 붙일 정도로 글씨에 소질이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넌 나중에 간판으로 먹고살아도 되겠다'는 농담을 하셨었다. 아마도 이것이 나의 첫 캘리그라퍼로서의 소질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중학교 때까지는 이런 재주로 인해 선생님들의 주목과 타 학우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 고교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우울했던 학창 시절과 음악 DJ가 되기까지의 당시 얘기를 들려달라.
사실 내겐 고등학교 시절은 없다. 누구보다도 재능도 많고 머리도 나름 좋았지만 연이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먹고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대학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대학진학을 해야겠단 생각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자식들과 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려고 바둥거리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미래와 한 여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내 인생관이 어린 나이에 정리가 되는 시기였다.
자연스레 비혼주의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던 그 시기에는 그냥 좋아하는 문학 서적과 방에 틀어박혀 줄곧 음악을 들으며 습작만 해댔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때 유난히 팝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고3 시절부터 음악다방에서 1일 DJ를 하면서 내 젊음의 아픔을 달래곤 했다.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나는 4년 동안 음악다방과 음악감상실의 뮤직박스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선정해서 들려주고, 음악에 얽힌 사연과 내용, 그리고 그동안에 읽었던 책 속 이야기들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었다. 많은 분이 아주 좋아해 주셨다. 특히 대중 속에서 나를 발견했던 이 시기를 난 아직도 제일 사랑한다."
- 그렇게 좋아했던 일을 무슨 연유로 그만뒀으며, 건설인이 되기까지가 몹시 궁금하다.
"녹록지 못한 DJ 생활도 막을 내려야 했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가 원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은 후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 9월 7일, 당시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다. 자신의 일부를 내게 나누어 주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할 수도 없었다. 내게는 사랑하는 엄마가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걸 정리하고 혼자 계신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낙향을 했다. 그때 내 나이 겨우 25살이었다. 아쉬울 것도, 서러운 것도 없었다.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남면으로 돌아온 나는 지인의 소개로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그곳 생활 23년. 내 젊음의 노트 절반은 건설이었다.
건설 관련 자격증을 땄고, 경력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경영관리 부장이란 직책도 생겼고 퇴직 당시엔 등기부등본상 사내이사란 직함도 얻었다. 나름 유능한 건설인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한 인정도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이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지금도 나는 방수기능사와 토목기술자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여성이다."
- 캘리그라피 작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언제부터 배우게 됐나?
"붓을 잡은 건 20대 때다. 직장을 다니며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어린아이들도 간간이 가르치며 서예 공모전에서 상도 받았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한국화 정명호 선생님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다. 2012년 40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퇴직을 하면서 뒤늦게 그림과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는 (캘리그라피)제2의 인생 서막을 열어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참 좋은 그림 선생님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공유했다. 정말 이끌어 주시는 대로 뒤따라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수묵 캘리그라피 작가가 되어 있었다.
스승님의 도움으로 인사동 경인미술관과 서산시 문화회관에서 두 차례 개인전도 열었다. 이어서 캘리그라피를 배우러 다시 서울로 왕복하며 수년째 배움을 더했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두 스승님인 한국화 정명호 선생님과 캘리를 배웠던 김정호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씀 올리고 싶다."
-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현재 하는 일은?
"덕분에 캘리그라피 공모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과 함께 최고의 영예 대상을 수상했고, 국전에선 4년 연속 입상을 했다.
현재는 4개 지역의 지역주민자치센터와 한서대학교 예술관에서 캘리그라피를 지도하고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20년 성연면 김종길 면장님께서 '성연면 거주 출생신고를 하러 오는 아가들에게 출생 축하선물과 캘리액자를 선물하고 싶다'며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지금은 매주 목요일 성연 캘리동아리반과 함께 액자와 엽서를 만들어 주고 있다. 벌써 400여 명의 아가에게 선물한 듯하다. 출생 액자에는 이름과 태어난 날짜, 시간, 분까지 기록되어 있다. "아기가 커서 독립할 때 그 액자를 물려 주고자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너무 뜻깊다. 함께 동참하게 되어 나 또한 행복하다."
- 출산장려정책 '도담도담 성연' 출생 축하 액자 재능기부를 한다는 건?
"비혼인 나는 출산으로 애국을 할 수가 없으니, 마음으로나마 대리 출산한 것으로 나라에 애국을 하게 된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액자를 만들어 주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낮아 걱정인데 이만큼 좋은 일이 어디 또 있을까.
나는 사실 재능기부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강의하는 곳이나 어느 기관 단체에서 내 글씨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언제나 마다하지 않고 써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딜 가든 내 글씨가 보여 흐뭇하다.
그런데 이게 또한 재능기부이자 봉사라고 들으니 못할 리가 없다. 운산면에 가면 모든 상가에 내가 써준 슬로건이 붙어 있다. 갈 때마다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온다. 그 밖에도 의회 사무실, 성연면사무소, 마을회관 현판에도 내 글씨가 걸려있다. 어쩌면 서산 전역이 마음의 고향이다. 이젠 중독이 된 듯하다(웃음). 나는 앞으로도 나를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봉사를 하고 싶다.
그 덕분에 2019년 김동찬 운산면장님께 감사패를 받았고, 2020년에는 맹정호 서산시장님으로부터 표창패, 2021년에는 양승조 충남도지사님으로부터 표창, 2022년 올핸 성일종 국회의원 표창을 4년 연속 받는 영광을 안았다. 역시 더욱 열심히 봉사하라는 의미로 주는 상이니만큼 봉사로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 늦깎이 대학생으로 학업을 이어가시던데?
늘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캘리그라피는 실기 위주로 가르치지만,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 가르치면 더욱 양질의 강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근에는 캘리그라피가 시각디자인과에 교과목으로 채택이 되면서 전공으로 인정이 됐다.
뒤늦은 나이지만 2018년 서울디지털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사이버대학이라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공부했다. 한 학기를 제외하곤 전액 장학금을 받아 다행히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공부를 했다. 하다 보니 그림 공부도 하고 싶어 회화과를 복수전공으로, 또 부전공으로는 문예창작과를 공부해 8학기 동안 디자인 학사, 미술 학사, 문예창작 전공으로 3개 과목의 학위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올핸 다시 한서대학교 국제융합디자인전문대학원 문화예술융합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전공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늦었다 생각하지 않고 4학기 또 열심히 활동하면서 공부하다 보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보지 않을까 싶다. 늘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가."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먼저 캘리그라피를 지도하는 사람으로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캘리그라피 작가로서는 좋은 작품 많이 해서 지치고 힘든 이때, 많은 분께 마음의 위안을 줄 수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게 꿈이다. 작가는 전시회를 여는 게 희망 아니겠나. 코로나로 수업이 잠시 중단된 지난해에는 당진에 있는 '갤러리늘꿈'에서 초대 개인전을 준비해 주셨다. 다행히도 6월 11일부터 7월1일까지 개인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바쁜 일정으로 힘들 긴 하지만 내게 주어진 기회는 꼭 열심히 해내고 싶다.
그동안 기존 수묵캘리그라피 작품과 최근 매료된 고기와에 아크릴로 작업한 들꽃, 도판에 아크릴로 작업한 캘리그라피의 합을 홀로서기 하는 마음으로 초연하게 표현하고 싶어 간간이 작업을 했다. 곧 전시를 통해 나를 세상으로 내보내겠다."
가숙진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내 최종 목표는 개인 갤러리를 여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 성향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모아 놓고 나를 응원하고 좋아해 주시는 분들과 함께 언제나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같이 나누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