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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를 필사하며 읽고 또 읽는 사이 딱딱했던 마음이 국수처럼 부드럽고 가늘어졌다
▲ 백석시집 필사노트 <국수>를 필사하며 읽고 또 읽는 사이 딱딱했던 마음이 국수처럼 부드럽고 가늘어졌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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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살림살이를 정리하며 남편이 가져온 물건을 보니 책이 많았다. 학교 다닐 때 학생민중운동을 한 경험을 들었던 터라 그와 관련된 책이 있음은 이해했으나 눈에 띈 건 시집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백 여권이 넘는 시집에, 밑줄 그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처럼 시를 읽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여고생치고 시 한 두편 외우지 않으면 공부가 아닌 줄 알고 교과서에 나온 시들을 암기하고 필사했던 때가 생각났다. 겉보기에 너무도 상반된 두 사람이 만나 사는데, 이렇게 숨어있는 비결이 있었던 거구나 하며 속내를 말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늘 책을 가지고 다닌다. 뇌졸중으로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어도 늘 책을 읽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기억력도 특별해서 읽은 부분을 어찌 그리 다 암기하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남편의 따뜻한 감성과 정서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시를 읽고 나에게 전해주는 일에는 언제나 정성스러웠다. 삶의 기준치를 이성적 판단에 주로 의존하고 철저히 감성을 외면하고 살아온 내게 남편이 들려주는 시 구절들은 서서히 내 맘에 따뜻함을 주었다.

책방을 준비하면서 무슨 분야의 책을 비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단 작은 책방에 많은 책을 놓을 수 없어서 시집과 에세이를 놓았다. 비치된 책들을 보고 방문객들은 내 나이를 가늠할 수 있겠다고 했다. 책방 주인의 주름살이 나무의 나이테와 같으니 엇비슷한 사람들이 같은 주름 무늬로서 책방을 만들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백석 시를 만났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시집을 비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도 알아야 하고 시인의 작품도 읽어서 추천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 나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작년에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던 '시화필사엽서나눔' 덕분에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일년 동안 필사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남편에게 고백했다.

"천천히 하나하나씩 알아가면 되지, 뭘 서두르는가. 당신은 목표가 뚜렷하고 실천이 좋으니 알고 싶은 시인 한 사람씩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운영하소. 어떤 시인이 가장 좋은가."

"'가장 좋은'이란 표현을 붙이면 말 못하지. 시인들의 시집에 있는 글 하나가 전체를 울리면 그 시인이 좋아지는데 어떻게 한 사람만 골라. 당신이 먼저 추천해줘봐요."


백석이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도 여러 번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려주었다. 나타샤가 바로 같이 사는 우리 각시라고 치켜세우며 문자로 목소리로 전해줬다. 그때는 남편의 말을 그냥 내 일상 아래로 밀쳐 놓았다. '바쁜데 또 시타령이네' 하며.

그런데, 책방을 오신 분들의 연령대가 나를 상회하는 경우가 많은 날엔 꼭 백석 시인의 시집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두 명이면 그러려니 했는데 그 수가 늘었다. 다른 유명 시인들이 엮은 시집 속에 백석의 시는 있지만 단독으로 된 시집이 없어서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일부러 시집 전문 책방이라고 찾아주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시집이 부족했다.

내가 너무 내가 사는 시대에만 매몰돼 있었구나. 현재의 시인들이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졌던가. 안도현 시인은 백석을 좋아하고 김용택 시인은 이용악 시인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책방의 시집 비치를 다시 시작해야겠다 싶어서 여고시절부터 좋아했던 시인들을 떠올렸다.

윤동주, 백석, 이상,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 정지용, 고은, 안도현, 나태주, 김용택, 황동규, 이문재, 류시화, 김현승, 이해인, 정현종, 함민복, 정호승, 장석주, 천양희, 문정희, 박노해, 도종환, 이준관, 신달자, 정채봉 등...

며칠 전 모 출판사에서 올해가 백석탄생 110주기를 맞아 백석의 시, 소설, 수필을 한테 묶은 <백석정본>을 받았다. 요즘 백석 시를 필사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쓰인 낱말의 뜻을 몰라서 일일이 검색하는 일이었는데, 정본을 보니 자세히 나와 있어서 백석의 시와 시간을 보내느라 책방에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한번 뭔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려는 내 감정의 날이 다시 서고 있어,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정도다.

어젯밤에는 백석의 시 '국수'를 읽다가 국수가락보다 더 여리고 섬세한 시인의 표현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릴뻔했다. 글 한 줄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전해지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가슴이 콩콩 뛰어 말도 다 표현 못 하는 내가 서글펐다. 기껏해야 책방을 도와주는 문우들에게 퀴즈를 낼 뿐이었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똑순이 책방지기 효영샘은 그림책 <시인아저씨 국수드세요> 의 커버를 사진으로 올려서 답을 했다. '역시 책방 <봄날의 산책>의 보배로구나'라고 속으로 칭찬했다.
 
마을어머니 한 분과 산책하며 마을사람들의 주소를 확인했다
▲ 말랭이마을 꽃잔디가 하도 예쁘다고 사진을 찍어주시네 마을어머니 한 분과 산책하며 마을사람들의 주소를 확인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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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마을 책방 입주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은 마을 어른들의 집을 일일이 확인하자고 통장 일을 하시는 어머니와 산책을 했다.

꽃잔디가 예쁘다고 우리 작가님도 한방 찍어주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사진도 찍었다. 돌아와서 책방 앞에 화분도 내놓고 음악 한 곡 틀어놓고 차 한잔 하고 있자니, 어젯밤 쓰다만 백석의 시집과 류시화의 시집이 눈에 보였다.

'당신은 꿈꾸는대로 이루어지네'라고 말한 남편이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 이 아름다운 월명산의 풍경을 나 혼자 다 차지하는 것이 미안했다. 당신은 어떤 때 시상이 떠오르냐 라는 질문에 길을 가도 풍경이 보이고 글을 봐도 풍경이 보이니 시를 위한 시상이란게 특별한 것은 아니란다. 좀 더 듣고 있으면 길 따라 살면서 시를 지은 김삿갓 얘기에 빠져 오늘 잡혀져 있는 일정을 빼앗길까봐 나중에 다시 얘기해주라며 다독였다.

<봄날의 책방> 계단에서 며칠 제비꽃이 시름거렸는데 그나마 누가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 민들레 씨앗들이 둥근 집을 만들어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말랭이는 실바람만 불어도 꽃들이 요동치니 곧 떠날 민들레 씨앗에게 시간 날 때마다 좋은 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먼 여행길이 외롭지 않게 <봄날의 산책>의 모니카도 기억해달라고.

태그:#백석, #책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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