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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용제 중독이 의심된 이주노동자가 찍어서 보낸 컨테이너 박스 제조 현장
 유기용제 중독이 의심된 이주노동자가 찍어서 보낸 컨테이너 박스 제조 현장
ⓒ 동행이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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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베트남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진료실을 찾았다. 컨테이너 박스 제조 공장에서 도장 업무를 하던 20대 남성 노동자였다. 일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됐는데 일을 시작하고 2~3주 후부터 두통, 구토, 가슴 답답함, 피부발진, 피로감 등의 증상이 생겼다고 했다.

며칠 전부터 작업을 멈춰 가슴 답답함은 다소 나아졌으나 두통은 남아있었다. 환자는 컨테이너 박스 도장 업무를 주로 했는데 하루 9시간, 주 5일 근무를 했다. 주로 창문을 닫아 놓은 상태로 일을 했고, 집진기 등 환기 장치도 없었다고 한다. 보호구는 처음에는 지급하지 않았고 환자가 작업이 힘들다고 호소하자 2월 초부터 지급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환자가 핸드폰으로 찍어서 보여준 보호구는 유기용제를 취급하는 도장 업무에서 착용해야 하는 방독마스크가 아니라 분진 발생 작업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진마스크였다.

환자는 유기용제 급성 중독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문진과 진찰 이후 간기능 검사 등 기본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소변 크레졸(도장 작업 시 유기용제로 주로 사용되는 시너의 주성분인 톨루엔의 대사산물) 검사를 실시했다. 며칠 후 검사 결과를 확인해 보니 간기능 검사 등 기본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결과 특이 소견이 없었고 소변 크레졸도 농도 0.063(기준치 <0.8 mg/g crea.)로 정상 범위 내였다.

컨테이너 박스 만들다 유기용제 중독된 이주노동자

환자는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어서 회사에 사업장 변경을 요청했는데 회사에서는 업무 태만으로 경고하고 정직 조치했다고 한다. 환자는 동행 이주민센터의 도움을 받아 고용센터에 사업장 변경 신청을 했고, 고용센터에서 환자가 현재 상태로 현재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서류를 요청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업무적합성평가서를 작성해서 드렸다.

"우선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환자가 수행한 업무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도장 작업 시 유기용제로 주로 사용되는 시너의 주성분인 톨루엔에 급성중독되었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증상과 일치했다.

작업장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환자의 진술과 환자가 제출한 사진을 근거로 유추해 볼 때, 환자가 업무를 수행한 작업장의 환기상태는 매우 불량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환자는 업무 시작 이후 몇 개월간 보호구를 지급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야 방진마스크를 지급받았다.

방진마스크는 도장 업무로부터 작업자를 거의 보호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방진마스크에 침착된 유기용제를 지속적으로 흡입하게 됨으로써 환자의 상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 도장 작업을 하는 노동자는 방독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본원에서 실시한 기본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결과 특이 소견이 없었고 소변 크레졸 농도가 정상 범위 내로 나온 것은 환자가 작업을 중단한 지 수일이 지난 상태에서 검사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참고로 톨루엔 취급 노동자에 대한 특수건강진단의 경우 작업 당일 작업 종료 2시간 전부터 작업 종료 시점 사이에 소변을 채취하게 하는데 이는 톨루엔의 반감기가 수 시간으로 짧기 때문이다. 이런 검사 결과가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의 업무관련성을 부정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 이상을 종합해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환자가 수행한 업무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한편 유기용제 급성 중독은 작업을 중단할 경우 완전히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작업환경이 충분히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에 복귀할 경우 위와 같은 급성 중독 상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 있고 그럴 경우 회복이 불가능한 만성 중독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

톨루엔과 같은 유기용제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도장 작업은 자연환기가 충분하거나 환기 설비가 제대로 갖춰진 안전한 작업환경 하에서 이뤄져야 한다. 또한 작업자에게 방진마스크가 아닌 방독마스크를 지급해야 하고 마스크 필터도 작업량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교체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환경을 갖추기 어렵거나 적절한 보호구 지급이 어렵다면 환자가 해당 작업을 계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도장작업하던 이주노동자가 쓰던 방진마스크. 도장업무에서 노동자를 보호해줄 수 없다.
 도장작업하던 이주노동자가 쓰던 방진마스크. 도장업무에서 노동자를 보호해줄 수 없다.
ⓒ 동행이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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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 이동의 자유, 건강하게 일할 조건

며칠 전 그 이주노동자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서 연락해 보았다. 업무적합성 평가를 근거로 고용센터 직원이 사업장에 방문하여 사업장 변경이 확정되었으나 아직 변경할 사업장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또한 도움을 주었던 동행 이주민센터에서 해당 사업장에 대해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에 진정을 내고 국민신문고에 고발하여 산재예방지도과 감독관이 조만간 현장조사 예정이라고 했다.

이 노동자는 다행히 사업장 변경이 결정되었지만, 여전히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은 쉽지 않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사업장 변경 사유 관련 노동부 고시는 안전보건과 관련해 사용자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중대재해가 발생했거나 당사자가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산재를 당한 경우를 들고 있다. 3개월 미만의 휴업이 필요한 산재의 경우에는, 해당 산재 발생 후 1개월까지 안전보건상의 조치를 안 한 경우만 사업장을 옮길 수 있다.

이번 사례처럼 '질병이 되기 전의 건강 이상상태'인 이주노동자는 사업장을 변경하기 어렵다. 업무 환경 때문에 생긴 건강문제가 확실한데, 질병으로 발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전치 3개월가량의 상당한 부상을 입었어도, 사업주가 조치를 했다고 하면 사고당했던 공장에서 반드시 다시 일해야 하나?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는 사용자의 안정적인 인력 확보와 원활한 사업장 운영, 이주노동자의 장기근무 유도 필요성 등을 근거로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현행 고용허가제가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경제 발전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 놓인 이주노동자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우리를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 인권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결정이다. 합헌이라고 판단한 헌재 재판관들이 이 사업장에서 직접 일해 보고도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주노동자에게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날이 언젠가는 꼭 올 거라고 믿는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정수님은 직업환경의학전문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사업장이동, #유기용제중독,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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