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역대급 대선입니다.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20대 대선과 한국정치를 읽습니다. 어떤 후보와 정당이 나의 일상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할 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지 다각도로 모색해 봅니다.[편집자말]
고루하고 순진한 방식으로 접근하다가는 이번에도 미역국 드시게 될 겁니다. 선생님의 공약, 정책…. 예, 뭐 다 좋습니다, 근데요! 하루하루 끼니 걱정에 뼈 부셔져라 일하는 인간들한테는요, 그런 거 다 똥 싸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립니다.

선거 지략가를 자처하는(실은 이북 출신 약방 운영자인) 서창대(이선균)가 야당 정치인 김운범(설경구)을 향해 호소하는 필승 지론이다. 앞선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던 김운범을 가까스로 처음 알현한 자리에서 이 정체모를 남자는 왜 독설 아닌 독설을 퍼부었을까. 

20대 대선을 코 앞둔 시점에 선보인 변성현 감독의 영화 <킹메이커> 속 도입부. 선거를 "돕고 싶다" 간청하는 서창대를 돌려보내려는 간부들 사이로 김운범은 서창대가 앞서 보낸 절절한 편지를 떠올린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대화에 나선다.

"이쪽 피 한 장을 얻는 비용으로 저쪽 피 열장을 날려 버리겠다는 자본가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라거나 "똥 묻은 놈들하고 싸워 이기려면 똥 안 묻을 수가 없는 겁니다"라며 김운범을 설득하는 서창대. 그의 자신만만한 현실론에 "정치는 장사가 아니요", "정치는 표를 버는 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되는 법이요"라며 원칙을 강조하는 김운범.

나름 논리가, 기 싸움이 팽팽하다. 아예 이 첫 만남에 서사 전체를 지배하며 대립하는 둘의 세계관과 철학을 제시하는 감독의 의도 자체가 자신만만하다. 마치 랩 배틀처럼 김운범과 서창대가 주고받는 대사 또한 맛깔난다.

관객들은 서창대에 편에 서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세상 바뀌는 꼬라지 좀 보고 싶다고요"라고 호소하는 서창대가 김운범보단 우리들 범인(凡人)에 더 가깝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잘 알려진 대로 실존 인물을 극화한 <킹메이커> 속 김운범은 고 김대중 대통령, 서창대는 한때 주요 참모였던 엄창록이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중시했던 정치인 김대중에게 있어 엄창록이란 참모는 1971년 대선 직전까지 그 상인의 현실감각을 보완해주는 완충제였다. 도입부를 더 볼까.

서창대는 "이기셔야 그 대의를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도발하며 자신을 어필하고, 김운범은 "어떻게 이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왜 이겨야 하는지가 중요한 법"이라며 점잖게 응수한다. 대의고 나발이고, '박정희 독재'만 바꿀 수 있다면 갖은 수단을 동원해 선거에 이겨야 한다는 서창대와 그럼에도 정의를 지키고 대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김운범이 맞서는 형국.
 
옛날에 그리스 살던 아리스토텔레스란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소이다. 정의가 바로 사회의 질서다. (김운범)

플라톤은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했었죠.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입니다.(서창대)

상대적으로 짧지 않은 이 도입부 장면을 이리 길게 묘사한 건 <킹메이커>가 서사 전체에 드리운 주제의식이 함축돼 있기 때문이다. 즉, 주된 서사는 이 떠오르는 정치인과 그의 신념을 알아 본 참모가 이뤄가는 애정과 갈등의 변주곡이고, 그에 담긴 주제는 고대 그리스 정치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단과 목적, 실용과 정의, 현실과 대의의 대립 구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을 '빛과 그림자'로 비유한 것은 고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이 도입부의 배경인 1961년 강원도 인제를 시작으로 둘의 사이가 갈라지는 1971년 7대 대선 선거일 직전까지에 집중하는 <킹메이커>는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한다.

20대 대선 유권자일지 모를 관객에게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냐고. 괴물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 기꺼이 괴물이 될 수 있느냐고, 아니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역대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김대중의 길을 택하겠느냐고 말이다.

<킹메이커>는 그렇게 고 김대중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중심에 놓고 사유하는 현대 정치사 다시 읽기요,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넌지시 던지는 일종의 정치관 테스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실화를 기본 뼈대로 허구를 적절히 섞은 <킹메이커> 속 서창대가 보여주는 '상인의 현실 감각'은 어떤 수준인가.

서창대의 상인감각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김운범을 위해 모인 게 아니라 우리가 김운범이란 무기를 들고, 저 개 잡놈의 새끼들하고 한판 뜰려고 모인 겁니다, 아닙니까? (...). 제일 싫어하는 말이, 졌지만 잘 싸웠다 입니다!

맞다. 요즘 말로 '졌잘싸'. 금품 살포 등 '박정희 공화당'의 갖가지 부정선거로 인해 힘이 빠진 신민당 김운범 사무실 운동원들을 들었다놨다하는 명연설로 일거에 분위기를 반전시킨 서창대. "김운범이 이기는 게 내가, 우리가 이기는 겁니다"라는 그의 도발과 동기부여의 힘은 강력했다.

그렇게 금권 선거가 판치던 시대, 서창대는 거침이 없었다. 일례로 상대 공화당이 뿌린 금품을 '줬다 뺏는' 듣도 보도 못한 방식까지, 실행 가능한 네거티브를 모두 동원할 것, 후보가 나서지 못하는 뒷거래도 서슴지 않을 것.

후보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후보 자택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마저도 언론 보도를 위해 활용할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림자'가 할 일이라는 듯이. 그렇다면 그림자가 '똥 묻은 놈들'하고 싸울 때 빛은 무얼 하느냐.
 
유달산과 영산강의 영이 있고 삼학도가 혼이 있다면 이 김대중을 보호 주십시오.  이 김대중이도 죽어서까지 목포를 지킬 것입니다.

<킹메이커>는 1967년 목포 선거 당시 김대중의 유명 연설을 보기 좋게 시각화한다. 마치 그게 정치인이 할 일이라는 듯이. 그렇다. 정치는 언어의 예술이요, 말의 향연이다. <킹메이커>는 김대중, 아니 김운범이 애민정신은 물론 청중을 마음을 휘어잡는 화술의 소유자였음을 드라마틱하게 잡아낸다. 그림자의 위기를 빛이 이겨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빛과 그림자의 이상과 현실이 조화를 이루면서 김운범은 대선후보로까지 나가게 된다.

결정적인 아이러니는 그 그림자도 욕망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 비극은 그 그림자 서창대가 빛이 되고 싶을 때, 그 욕망이 강해졌을 때 발생한다. '금배지'란 희망이 현실이라고 느꼈을 때, 서창대는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회유도 당차게 내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자택 테러사건을 둘러싼 소동 끝에 김운범과 서창대는 갈등을 빚는다. 김운범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며 서창대에게 공천권을 주지 않을 것을 시사하고, 그러자 서창대는 김운범을 떠나 "똥 묻은 놈"의 품에 안착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 그리고 역사와 현재

이상과 현실 사이. <킹메이커>는 영화 전편을 통해 정치가, 선거가 이상과 현실 그 어디쯤에 자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김운범은 서창대의 방식이 과하고, 서창대는 김운범의 이상론이 답답하다. 서창대 입장에선 자신이 없었으면 대선후보 김운범도 없었다.

빛과 그림자의 관계처럼. 그림자는 그게 못내 답답하다. 서창대 자신도 배지를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의) 정치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 이전에 내가 있고 내가 살아야 지속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 비범한 인물이 특히 대선후보까지 나간 정치인일 때는 그 관계와 영향력이 더 복잡해지지 않겠는가. 이를 잘 알고 있는 <킹메이커>는 나름의 후일담을 통해 둘의 애틋한 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현실 속 엄창록은 1971년 대선 이후 정치인 김대중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은 길게 부연할 필요 없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갖은 고초를 당했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25년이 넘는 세월을 인내해야 했다. <킹메이커>가 길어 올린 바로 그 지역주의 선거의 피해자이자 또 수혜자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시 정치 여정 및 박정희 시대의 정치상을 엿보는 실화로서의 재미와 장르적으로 풍성한 정치 드라마의 완성도를 모두 갖춘 <킹메이커>. 하필 2022년 대선 직전에 찾아  보는 일은 유권자들에게 남다른 감흥을 던져줄 수밖에 없다. 

'세상 바뀌는 꼬라지'를 보고 싶은 관객들 모두는 어쩌면 지지와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각자가 상상하는 '똥 묻은 놈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김운범의 이상론을 지지하든, 서창대의 현실론을 지지하든 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서창대가 말한 김운범, 아니 김대중의 "고루하고 순진한 방식"이 2022년에도 여전히 정치판에서 추앙받고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이리라. 
킹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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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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