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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 선생 대표어록을 적어놓은 비석. 해공 선생 생가 앞에 위치해있다.
 해공 신익희 선생 대표어록을 적어놓은 비석. 해공 선생 생가 앞에 위치해있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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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간직한 조국독립과 함께 또 하나의 꿈이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역사가 소멸되는 이유 중에는 국민이 깨어나지 못한 까닭이 크다고 믿었고, 그래서 20세 때에 고향에 광동의숙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쳤다. 망명기 중국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근대적인 교육ㆍ훈련기관을 보게되고, 이 꿈은 더욱 영글어졌다. 

환국 후 여러 가지 분방한 속에서도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은 변하지 않았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이땅에는 이렇다할 교육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조국이 해방되고도 미군정이 들어서고 신탁통치가 운위되고 있는 상황은 여전히 교육수준이 낮아 국민이 깨어있지 못한 때문이라 보았다.

중국에서 한ㆍ중합작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귀주성(貴州省)에 들러 허허벌판의 길섶에서 밤을 세우며 나라를 되찾으면 무엇보다 훌륭한 대학을 세우겠다는 꿈을 그렸다. 환국 뒤 국민대학을 설립하면서 그때를 돌이킨 술회이다.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아서 왜놈이 거꾸러지고 우리 나라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에 돌아가서 학교를 세우자, 중국 강유위(康有爲)의 만목초당(萬木草堂),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가 신생 중화민국의 새롭고 건전하고 위대한 동량지재(棟樑之材)를 산출하고, 일본의 송하숙(松下塾)이 유신 일본의 주역들인 거물 정치인을 배출케 한 생생한 역사를 볼 때, 무엇보다도 앞서 해야 할 일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 동지적(同志的)인 환경에서 학생을 집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교수를 규합해서 스승과 제자가 일체가 되어 일의전심(一意專心)한다면 중국혁명의 위업을 달성한 그 사람들이나 일본 유신의 홍업을 성취한 그 사람들을 왜 부러워할 것이며 어째서 흠모할까.

순하인(舜何人)ㆍ여하인(余何人)이지 순(舜) 임금은 그 누구며 나는 또 누구냐 말이다. 우리 국민의 총명과 예지를 가지면 천하의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만 못할 것인가. 신생 대한민국을 떠메고 나갈 준재와 수재, 교초(翹楚)를 배출하여 어렵고 힘든 건국의 일을 맡겨야 할 것이다. (주석 8)
해공 신익희(1894~1954)
 해공 신익희(1894~1954)
ⓒ (사)해공신익회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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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한 1주일 뒤인 12월 6일 교육 분야에 역량이 있는 백남(白南) 윤교중(尹敎重)을 만난데 이어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대학창설을 위해 일을 서둘렀다. 뜻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서 혼란기인데도 신속히 진행되었다.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회합하고 종합된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위대한 민족운동의 효시(嚆矢)인 3ㆍ1운동은 국민으로서는 조국 광복운동이고, 세계사적으로 보면 전세계 민주주의의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만치 앞으로의 신생 국가는 3ㆍ1정신을 계승하고 3ㆍ1의 대의를 기초로 해서 건국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 건국될 것이고, 더구나 불구대천지수인 왜적이 물러간 마당에서 참신하게 견학될 이 학교만은 과거 낙후한 대한제국이나 또는 일제 통치하에서 인ㆍ허가된 교육 기관과는 달리 가장 비참한 사업인 혁명운동과 가장 위험한 사업인 독립운동에 시종 헌신한 분으로 하여금 고문과 명예회장ㆍ회장직을 맡게 하고, 비교적 깨끗하고 양심적이며 능력 있는 분을 창립위원으로 위촉할 것.

둘째, 대학은 법문 계통의 야간 대학으로 시작하되 학부에는 법학과ㆍ정경학과의 두 과를 설치하고 전문부에 법과와 정경과 두 과를 둔다. 생활상 사정의 소치로 주경야독을 지망하는 허다한 구학 청년에게 최고 학문을 연구하는 우선의 기회를 주어서 최고 교육의 보편화에 노력할 것. 

셋째, 기성회 사무실과 강당은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있는 기존 학교의 교사(校舍)를 차용하도록 하되 그 교섭은 백납(白南)이 담당할 것. (주석 9)

신익희는 가칭 국민대학설립 기성회라는 임시사무소 간판을 걸고 각종 서류를 준비하여, 1946년 1월 하순부터 고문에 이승만과 김구를, 명예회장에 김규식ㆍ조소앙, 기성회장은 자신이 맡기로 하였다. 

그밖에 이사 40명, 상무이사 등을 선정하고, 서울 종로구 내수동 15번지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집을 차입하여 개교준비를 서둘렀다. 1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작은 강의실 1개, 2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로, 아직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학부는 법학과 50명(야간)
        정경과 50명(야간)

전문부 법률과 100명(야간)
        정경과 100명(야간)

신익희는 오랜 꿈이었던 국민대학을 1846년 9월 1일 개교하고 재단 이사장 겸 학장을 맡아 경영하면서 직접 강의도 하였다. 강의주제는 '민족학'이었다. 신탁통치 찬반탁을 둘러싸고 혼미가 거듭되는 시기에 이룬 성과였다. 

 
주석
8> 신창현, 앞의 책, 205쪽.
9> 앞의 책, 20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공, #신익희, #신익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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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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