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벤져스가 분열한 후 '로스 장관(윌리엄 허트)'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도망친 '나타샤 로마노프/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어느 날 오래간만에 휴식을 취하던 그녀 앞에 16년 전 위장 가족으로 첩보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던 가짜 여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가 나타난다. 그녀는 나타샤가 과거에 제거한 줄 알았던 소련 첩보조직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레이 윈스턴)'가 건재하며, 레드룸이 여전히 많은 위도우들을 세뇌해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나타샤는 상대의 능력을 복제하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의 위협에 맞서 레드룸을 제대로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레드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 때 옐레나와 함께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첩보활동을 했던 옛 동료 '알렉세이(데이빗 하버)'와 멜리나(레이첼 와이즈)'를 찾아간다.

어벤저스 원년 멤버 중 홍일점이자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죽음을 맞이한 블랙 위도우의 첫 솔로 영화인 <블랙 위도우>는 겉보기에 풍성한 선물 보따리같다. 국내에서는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2년 만에 만나게 된 마블 작품이기에 MCU의 팬이라면 격하게 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타샤의 가족을 쫓는 쉴드부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속 공항 전투 직후 나타샤를 쫓는 로스 장관, 직접 등장하지는 않아도 깨알같이 언급되는 어벤져스의 존재감은 관객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이미 선보인 <팔콘 앤 윈터솔져>와 하반기에 선보일 드라마 <호크아이> 간의 연관성을 부각하는 쿠키 영상도 앞으로 이어질 MCU의 페이즈 4에 대한 기대감을 키운다.

또한 한 편의 007 시리즈를 보는 듯한 오프닝 크레디트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다양한 첩보 영화를 닮은 <블랙 위도우>의 액션은 오랜 기다림에 충분히 보답하는 듯 보인다. 우선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태스크마스터와 펼치는 추격전과 이어지는 지하철 역에서의 액션의 구성이나 전개는 < 007 스카이폴 >을 연상시키면서도 약간의 변주를 더해 전반적인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몇몇 장면들에서는 <제이슨 본> 시리즈의 그림자가 진하게 느껴진다. 옐레나가 모로코에서 해독제를 쫓는 장면이나 부다페스트의 한 아파트에서 자매가 부엌칼부터 커튼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이용해 펼치는 액션을 격렬한 핸드헬드로 촬영한 시퀀스는 장소, 배경, 액션의 합, 촬영 및 편집까지 <본 얼티메이텀>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블랙 위도우>가 <본> 시리즈의 액션을 오마주한 것은 과거 자신의 잘못을 되돌리려고 한 제이슨 본처럼 나타샤도 스스로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떨쳐내려 하는 것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또 오랜만에 만난 자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와 감정선을 액션에 담아 단순한 볼거리 이상으로 승화시키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다만 아쉬운 지점이 없지는 않다. 빌런인 태스크마스터의 활용법이 대표적이다. 상대의 기술을 복사하는 그는 분명 짧은 순간에도 캡틴의 방패술, 호크아이의 궁술, 블랙 팬서의 발톱, 블랙 위도우를 닮은 움직임까지 모두 보여준다. 하지만 다리 위에서 나타샤와 잠시 대치할 때를 빼면 그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뽐낼 분량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드라마의 비중을 높이는 대신 액션의 분량이 줄어든 점도 문제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장면들을 제외하면 추가된 장면이 없는 수준이다.
   
특히 액션의 분량을 줄인 것에 비해 드라마의 완성도가 높거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럽다. <블랙 위도우>의 드라마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가족 영화 서사와 레드룸에 세뇌된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하는 여성 영화 서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플롯 모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네 명의 주인공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그 과정이 너무 빠르고 간편하다. 나타샤, 옐레나, 알렉세이, 그리고 멜리나가 만나는 순간 그들 사이에는 날카로운 감정과 아픈 경험, 시간이 흐른 만큼의 오해가 쌓여 있다.

그런데 영화는 16년의 세월 동안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단칼에 잘라버린다.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추억의 물건을 바라보는 식으로 그들 간의 갈등은 간단하게 봉합된다. 이 장면들을 제외하면 작중 네 식구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대목은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영화는 곧장 레드룸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는 끈끈한 가족의 모습을 비춘다. 이러한 가족의 화해와 결성 과정을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직접 영향받았다고 밝힌 엑스맨 시리즈의 <로건>과 비교해보면, 이 과정의 분량과 비중이 확연히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나타샤가 가족이 혈연이 아니라 함께한 세월과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일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과 그렇기에 자신에게 두 가족이 남아있음을 깨닫는 것은 MCU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용이다. 나타샤가 어벤져스라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다는 모두가 아는 미래에 개연성을 더하고, 그녀의 뒤를 이을 옐레나의 행보에 당위성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러한 가족 드라마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은 그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도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 다른 축인 여성 해방 서사도 다르지 않다. 물론 나타샤가 다른 위도우들을 해방시키는 플롯 그 자체는 유의미하다. 우선 영화 외적으로 뜻깊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 CEO인 아이작 펄머터가 여성 캐릭터의 완구 판매량이 적다는 이유로 블랙 위도우의 완구 판매를 중지시키는 등의 수난을 겪은 바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나타샤가 레드룸에서 학대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그 기억과 관련해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이미 밝혀진 만큼, 히어로인 그녀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돕는 것은 자연스럽다. 실제로 <블랙 위도우>는 그 결과로서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인 옐레나와 나탸사의 간의 관계성을 부각하고, 둘의 뭉클한 자매애만큼은 관객들의 뇌리에 강렬히 새기는 데 성공한다.

문제는 세뇌에 걸려서 조종당하고 목숨이 걸린 상태로 현장에 투입되는 등 극심한 억압을 받는 위도우들을 구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나타샤는 자신이 부다페스트에서 죽인 줄 알았던 드레이코프의 딸 안토니오와 재회하고, 아버지에게 조종당하던 그녀를 세뇌에서 풀어준다. 그런데 아무리 기계적으로 세뇌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람의 말 한 마디를 듣고서 그 어떤 적대감도 없이 순순히 그를 용서하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피해자의 심리가 전혀 묘사되지 않은 채 나타샤의 감정선만이 일방적으로 전개되기에 더욱 그렇다. 이는 영화의 의도와 메시지에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끼워 맞추는 작위적인 전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안토니오를 다른 캐릭터의 사례와 비교하면 <블랙 위도우>의 문제는 더욱 명확해진다. 사실 <블랙 위도우>는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와 유사한 측면이 많은 영화다. 두 히어로 모두 자신의 과거에 의해 고통받는다. 캡틴은 가장 절친한 전우인 버키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나타샤는 어린 아이였던 안토니오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죽였다. 그 죄책감의 대상이 한때 자신이 제거했다고 믿은 적(하이드라와 레드룸)에게 세뇌당한 상태로 재등장하는 것도 동일하다. 세뇌 피해자인 윈터솔져와 안토니오 모두 자신이 속한 집단과의 권력관계에서 철저히 을의 입장이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안토니오와 달리 윈터솔져(버키)는 세뇌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 이후로도 3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에서 치열하게 스스로와 싸워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윈터 솔져>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블랙 위도우>의 여성 해방 서사는 힘을 잃는다. 안토니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며, 그녀가 내적으로 주도권과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결과 그들을 내리찍고 있는 억압과 폭력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고, 여성 간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메시지에도 의도한 만큼의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극 전개의 중심 소재로 등장하는, 한 번 맞으면 모든 세뇌를 단번에 풀어내는 빨간 해독제가 간편한 스토리텔링을 상징하는 도구로 보이는 이유다.

이렇게 <블랙 위도우>는 기대에 부응하는 볼거리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를 선보이면서 끝난다. 서두에 언급했듯 앞뒤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캐릭터를 소개하고, 다가올 시리즈들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다는 측면에서는 거대 프랜차이즈의 일부로서 본연의 몫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20편이 넘는 작품들을 통해 영화를 얼마나 잘 만들 수 있는지 그 능력과 가능성을 마블이 충분히 입증한 상황에서 지나치게 무난한 완성도가 그 자체로 아쉬움을 남기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결국 <블랙 위도우>는 마지막 인사라고 하기에는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MCU에서 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