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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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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동맹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시체제가 된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인 지도자들은 방략을 바꾸었다.

만주와 러시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다수의 한인애국자들은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대전이 독일에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되고,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되면 한국의 독립이 가능할 것이라는 나름의 희망적인 전망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에 21개조 요구를 제시하는 등 중국 침략의 의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비교적 활동이 자유롭고 교통의 요충지인 상하이를 새로운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택한 이들은 속속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곳에서는 이미 신규식 등이 영국조계에서 배달학원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중국 청도에서 조성환, 베이징에서 성낙형, 시베리아에서 유동열, 국내에서 유홍열과 이춘일 등 민족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였다. 사전에 비밀리에 연통한 것이다. 뜻을 같이한 이들은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이상설, 감독에 박은식을 선임하였다. 신규식은 상하이의 책임을 맡았다. 신한혁명당의 조직체계는 다음과 같다.

신한혁명당 본부와 지부

본부장 : 이상설
재정부장:이춘일
교통부장:유동열
외교부장:성낙형

지부 - 중국

감독 : 박은식
상해 : 신규식
한구(漢口) : 김위원
봉천:
장춘 : 이동휘
안동부 :
연길현 : 이동춘

지부 - 국내

서울 : 난회(蘭會)조직활용
원산:
평양 : 정항준
희령 : 박정래
나남 : 강재후

〈출전〉 강영심, 「신한혁명당의 결성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8, 118쪽.
  
 
예관 신규식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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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혁명당은 본부를 베이징에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베이징에 본부를 둔 것은 원세개 (袁世凱)의 베이징정부와 교섭하여 대일투쟁을 강화하려는 전략이었다. 신한혁명당의 요인들은 장차 동맹을 맺게 될 중국과 독일이 모두 군주정치를 표방하는 것을 고려해 구황실의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국제사회의 대세는 공화주의 쪽으로 가고 있었지만 우선 목적달성이 유리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편의적인 방략이었다. 

신한혁명당의 주된 활동은 유사시 한국독립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수행에 필요한 군비를 정비해 두는 것과 외교적 측면에서 독일의 보증하에 중국과 군사원조동맹인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이란 밀약체결계획을 세웠다. 이는 제1차 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예견하에서 전후 한ㆍ중ㆍ독의 연합방식으로 일본을 응징하려던 방안이었다.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고 군주정치를 표방한 방략에서 신한혁명당은 일개의 독립운동단체가 아니라 독일ㆍ중국과 동맹을 맺고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적인 성격의 단체로까지 발전시키려 한 의도였다.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무장준비계획은 군비준비와 국내 국경지역 진공계획수립으로 이루어졌다.

이 계획은 구주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한 뒤 동양으로 진출하면 일본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며 이 경우 연합체제가 구축될 것이므로 우리의 독립군도 각국과 연합체제가 구축될 것이므로 우리의 독립군도 각국과 연합해 독립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전제에서 마련된 것이다.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비의 조달은 기존에 정비되어 있던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군과 무기 등을 기반으로 보다 신속히 조성될 수 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주석 6)


신한혁명당의 활동은 국제정세의 역전과 일제의 식민지배체제, 그들의 정보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예상과는 달리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이 밀리고 일본이 속한 연합군이 승세를 장악해나갔다. 국내에 파송된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일경에 검거돼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는 1915년 이른바 '보안법위반사건'이라 하여 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두 검거하고 보안법으로 다스리면서, 고종의 망명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신한혁명당은 그토록 어려웠던 상황에서도 중국정부와 맺고자 한 19개조의 조약(초안)에서 "한국혁명의 성공 후 중국은 한국의 내정에 용훼하지 않을 것. 단 의방의 의무로서 세관 혹은 철도 등의 사업에 관하여 기수 혹은 번역원을 고양할 사(제11조)" 등 민족적 자존과 이익을 확고히 마련하고 있었다. 신규식의 인맥이 크게 작동한 것이다. 
  
대동단결의 선언문-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 대동단결 선언문 대동단결의 선언문-등록문화재 제652호 「대동단결선언문서」는 신규식, 박용만, 조소앙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통합적인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려는 뜻을 가지고 민족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1917년 7월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에게 작성한 한글과 한문으로 된 문서이다.
ⓒ 독립기념관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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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가는 신한혁명당의 역할과 역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분석ㆍ정리한다. 

신한혁명당의 독립운동방략은 첫째는 민족독립을 위해 실리적인 방략을 중시하여 공화주의를 포기하고 보황주의적 노선을 채택하였다. 동맹국이 될 독일과 중국과 같은 제정(帝政)을 표방하고 광무황제를 당수로 추대하였다. 물론 이 경우 복벽적이라기보다는 입헌군주적 제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한혁명당 계획의 실패 이후 복벽주의나 보황주의적 방략은 그 자체의 한계로 더 이상 독립운동방략상 주된 노선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7년 「대동단결선언」단계에 이르면 공화주의노선이 독립운동의 이론으로 정립하게 되는 진척을 가져왔다. 

둘째는 신한혁명당이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정부의 조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정부가 어떤 형태라는 설명이 없어 정확한 파악은 어렵지만 국내외 간 외수내응(外受內應)의 효과적 독립운동을 추진키 위한 중추기관으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방향제시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이는 신한혁명당 이후 1917년 「대동단결선언」에서 통일된 최고기관인 정부의 수립을 위한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화된 실시방법을 제시할수 있는 단계로 발전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비록 계획으로 그쳤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란 급격한 상황변화 속에서 각지의 운동역량을 통합ㆍ재정비하여 연합조직을 추구한 점과 타국과의 국제적인 협약체결을 계획하여 외교적인 면만이 아니라 장차 정부수립의 가능성을 환기시켰다는 점 등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주석 7)


주석
6> 강영심, 「신한혁명당」, 『한국독립운동사사전(5)』, 345쪽.
7> 윤병석, 『증보이상설전』, 346~34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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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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