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페이스북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 페이스북
ⓒ 추미애 페이스북 캡처

관련사진보기

 
알면서도 반복하는 잘못, 잘못인지 모른 채 저지르는 잘못, 어느 쪽이 더 나쁠까? 보통은 전자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기 쉽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반복한다면 악의가 있거나 개선의 의지가 결여된 것일 수 있고, "몰랐다"는 변명은 정상참작 혹은 면죄부의 근거가 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생활 속에 오랜 세월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장애인 비하 표현'의 경우는 어떤가? '장님 코끼리 만지듯',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처럼 대부분 관용어구나 속담을 통해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데, 당사자는 잘못된 표현을 썼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옛날부터'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잘못인지 모른 채 저지르는 잘못이다.

'장애인 비하 표현'이 '장애'와 '부정적' 이미지를 연결하고 장애인에 대한 소외와 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지적되어오고 있기 때문에 이제 많은 이들이 잘못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언어습관이란 그토록 바꾸기 어려운 것인지 '무심히' 또는 '공공연히' 사용되는 장애인 비하 표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알면서도 반복하는 잘못이다.

최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외눈, 양눈'이란 표현을 사용해 논란이 됐고, 그에 앞서 지난달에는 김은혜 국민의힘 서울시장 보궐선거 선대위 대변인이 상대당 후보 남편이 보유한 아파트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꿀 먹은 벙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들일 뿐, 큰 파급력을 지니는 정치인들의 장애인 비하 발언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 새만 해도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이 많다", "대통령이… 벙어리가 돼버렸다", "절름발이 총리", "외눈박이 공세" 등 정치인들의 장애인 비하 표현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그때마다 해당 정치인이 곤란을 겪는데도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뼈에 박힌 언어습관 때문이 아니라면, 그러한 표현이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지독한 무심함 때문일 것이다.

외국서도 논란이 되는 장애인 비하 표현

장애인 비하 표현이 문제가 되는 건 영어권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달 초 BBC뉴스에는 "당신이 모르고 사용하는 해로운 장애인 차별 언어(The harmful ableist language you unknowingly use)"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서 제시한 영어로 된 장애인 비하 표현의 예는 다음과 같다. 'fall on deaf ears'는 '귀가 들리지 않음'을 뜻하는 단어 'deaf'를 사용해 '묵살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make a dumb show'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뜻의 'dumb'으로 인해 '손짓으로 나타내다'란 뜻을 지닌다. '앞을 못 본다'는 뜻의 'blind'로 만든 'turning a blind eye to a problem(보고도 못본 체하다, ~을 무시하다)'라는 어구도 있다.

그 밖에도 'acting crazy(미치광이 짓을 하다)', 'calling a boss psychopathic(상사를 정신병자라 부르는 것)', 'having a bipolar day(조울증 같은 하루를 보내다)' 등이 예로 제시됐다.

장애인 당사자인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어구를 사용하는 이들은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가 없거나 다른 이의 감정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지만, 자신 같은 장애인에게는 그런 말들이 작은 폭력으로 다가온다고. 그리고 그런 표현은 개인적으로 행해지는 직접적 모욕보다 더욱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해를 미친다고 말이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
 휠체어를 탄 장애인
ⓒ 언스플래쉬

관련사진보기

 
영국 신경근육 관련 질환자들을 위한 자선단체(Pathfinders Neuromuscular Alliance)의 제이미 해일은 BBC 기사를 통해 "그런 말들이 특정 장애인을 겨냥해 쓰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잠재적으로 해를 끼친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장애인 차별적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곧 장애인들의 존재방식을 열등한 것으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많은 경우 그런 언어에 장애인을 해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장애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적'이라는 세계관을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장애를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언어사용이 어떤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우선, 그런 말들은 장애를 지닌다는 것에 대한 부정확한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무엇에 의해 '불구가 되었다(crippled)'고 묘사하는 것은 그에게 '제약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 장애인인 자신은 스스로의 존재를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은유나 비유로서의 장애 표현 역시 하려는 말의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fall on deaf ears(묵살되다)'라는 어구는 고정관념을 갖게함과 동시에 상황의 실체를 애매하게 한다는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deaf)는 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상태인데 반해, 무언가를 묵살한다는 것은 '의도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벙어리가 돼버렸다"는 표현 역시 '말을 할 수 없는' 의지와 무관한 상태를 '의도적으로 함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니 이와 같은 맥락의 표현이라 하겠다.

또 하나, 부정적인 혹은 열등한 무언가를 가리키는 약칭으로 장애를 이용하는 것은 부정적인 태도와 행동을 강화하고 더 큰 압제 시스템이 자리 잡도록 부채질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어진 다음 말은 우리가 어떤 말을 내뱉기 전 반드시 떠올려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를 편하게 사용하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장애인 차별의 구조를 강화하게 될 것이다."

역시 같은 BBC 기사의 미국 비영리단체 'Communication Service for the Deaf(청각장애인을 위한 의사소통 서비스)'의 로사 리 팀이 한 발언도 나의 언어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장애인 차별 언어는 분열의 문화를 부추긴다. 사람들을 규정하고, 배제하고, 하찮게 여기도록 만든다. 이는 장애인 차별적인 문화 인프라에 직면했을 때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방관자가 되게 한다."

그는 훗날 겪게 될지 모를 '부메랑 효과'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분열된 문화 속에서 '방관자' 노릇하던 이들도 노화나 사고, 혹은 건강상의 문제 등으로 차별받는 장애인의 입장이 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만들어놓은 억압적인 환경에 의해 스스로 상처 입는 '부메랑 효과'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언어 습관의 힘

대학 시절, 고전문학 교수님의 강의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시험을 보기도 전에 "자네 시험에 합격했다지!"라고 말해줌으로써 합격을 기원하는 표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혀 시제가 맞지 않는 표현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사촌오빠의 별명도 떠오른다. 어릴 적부터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사촌오빠를 이모와 이모부는 늘 "우리 이박사!"라고 부르곤 하셨다.

"자네 시험에 합격했다지!"란 말을 들은 사람이 정말로 합격을 했는지, "우리 이박사!"라는 말을 듣고 자라서 사촌오빠가 정말로 박사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 셋을 키우는 나는 말이 지닌 힘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것도 몰라?"라는 부정적인 말이 아이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이렇게 잘 해냈구나. 언제나 널 믿어"라는 말이 아이의 능력을 북돋기도 한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옛날부터, 흔히' 써왔으니까 무심코 장애인 차별 표현을 사용하는 일은 접어두기로 한다. 언어습관이 무섭다면 새로운 습관으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일상 속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인지한 뒤 다른 언어로 교체하고, 그런 뒤엔 입 밖에 내기 전 한 번만 멈추면 될 일이다.

서두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알면서도 반복하는 잘못, 잘못인지 모른 채 저지르는 잘못, '장애인 비하 표현'에 있어서는 양쪽 모두 나쁘다. 아직 인지하지 못한 비하와 차별의 언어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겠다. 알면서도 자꾸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면 새로운 습관에 익숙해져야겠다. 모두가 평등해야 할 세상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태그:#장애인 비하 표현, #정치인 장애인 비하 발언, #차별, #배제
댓글1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