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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오경복, 윤정희, 전미경 유족(왼쪽부터)이 발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유해발굴 현장을 찾고 있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오경복, 윤정희, 전미경 유족(왼쪽부터)이 발굴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유해발굴 현장을 찾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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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인 전미경, 윤정희, 곽귀덕, 오경복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우리 부모님 유해를 찾아 모시는데 당연히 자식들이 나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전미경씨가 첫 돌이 막 지난 어느 날, 아버지(전재흥)는 딸이 걷는 걸 보겠다고 집에 들렀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24살 청년인 아버지는 6.25 한국 전쟁이 터지자 부역자로 몰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살해됐다. 끌려가는 아들을 붙잡던 할머니는 경찰과 우익단체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일급 청각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징용에 끌려간 큰 고모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네 살 위 오빠는 우익단체 사람들에게 독살당했다. 연좌제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막내 삼촌은 세상을 한탄하며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과 등졌다. 전씨의 할아버지는 거듭된 충격으로 끝내 정신을 놓으셨다. 전씨의 작은아버지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 월북했다.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은 전씨를 '쟤네 아버지는 빨갱이'라며 꺼렸다.

전씨는 연좌제로 인한 가족들의 피해를 지켜보다 지쳐 부여 백마강에 세 번이나 몸을 던져야 했다. 지난 2013년 62년 만에 전씨의 아버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당시 재판장은 "어떠한 위로의 말도 소용없는 것으로 재판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죄'라는 판결 결과를 통해 재심 신청인에게 위로의 뜻을 전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유해 드러날 때마다 쏟아지는 눈물

윤정희씨의 부친(윤여병)은 충남 논산에서 면서기를 하다 좌익 활동 혐의로 체포됐다. 징역 3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전쟁이 나자 골령골에서 희생됐다.

파평윤씨 문정공파인 부친은 말을 타고 땅을 관리할 만큼 큰 부자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총살되자 윤씨의 할아버지마저 뇌졸증으로 쓰러졌고, 병시중을 들던 할머니마저 1952년 세상을 떴다. 이후 윤씨는 시장에서 다른 사람의 바느질을 돕고 심부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명예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 오빠와 남동생마저 병환으로 사망했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전미경 유족과 박귀덕(오른쪽) 유족이 드러난 일부 유해를 보고 있다.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전미경 유족과 박귀덕(오른쪽) 유족이 드러난 일부 유해를 보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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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귀덕씨의 아버지(박정환)는 여수 14연대 소속 헌병으로, 여순사건 당시 광주 집으로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하던 중 경찰에 연행됐다. 그 후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부친을 면회했지만,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자 골령골로 끌려가 희생됐기 때문이다.

박씨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아버지 손을 잡고 동네를 돌던 때다. 박씨는 5년 전부터 아예 대전으로 이사 와 시간이 날 때마다 골령골 골짜기를 헤매고 있다. 남은 생이나마 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다.

오경복씨의 시아버지(변문수)는 1950년 6월 말, 대전 신탄진지서 경찰로부터 보도연맹 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갔다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시아버지는 며칠 뒤 골령골에서 총살됐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헌병대와 경찰관 지휘관이 '준비'하면 사수들이 하나씩 발로 등을 밟고서 머리 뒤통수에다가 사격을 했다. 사진은 1950 대전 골령골 학살 당시 현장을 찍은 사진이다.1950년 7월 당시 대전 골령골 학살현장으로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헌병대와 경찰관 지휘관이 "준비"하면 사수들이 하나씩 발로 등을 밟고서 머리 뒤통수에다가 사격을 했다. 사진은 1950 대전 골령골 학살 당시 현장을 찍은 사진이다.1950년 7월 당시 대전 골령골 학살현장으로 미 극동군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Abbott) 소령이 찍고, 고 이도영 박사가 1999년 말 NARA에서 발굴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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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다. 유해가 드러날 때마다 눈물을 쏟아낸다. 전씨는 "유해가 구덩이에 내던져진 형태로 나올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며 "시신마저 내동댕이치고 암매장할 만큼 잘못한 게 뭐냐"고 반문했다. 윤씨와 박씨는 "하루빨리 유해를 수습해 편안한 곳으로 모시는 게 바람"이라고 말했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은 지난달 22일부터 40일 간의 일정으로 대전 골령골 제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희생자유해를 찾고 있다. 13일 현재 40~42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가 자행됐다.

태그:#유해발굴, #골령골,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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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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