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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마다 곤로 불 앞에서 밥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한 소년이 있다. 오른 손에는 교과서가 들려 있다. 졸린 눈꺼풀 사이로 글자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 중이다. 백열전구 아래에서 졸음이 쏟아지는지 소년의 고개가 ㄱ자로 수그러진다.

모락모락 하얀 김이 밥솥에서 피어오른다. 밥솥 뚜껑을 열면 따뜻한 김이 부스스한 소년의 얼굴 위로 퍼진다. 세수를 한 듯 금세 얼굴이 맑아진다. 매일 새벽밥을 짓는 17살의 소년, 바로 나의 셋째오빠였다.

지방으로 장사를 떠난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는 우리집 살림꾼이었다. 오빠의 솜씨는 여자만큼 야무졌다. 곧잘 감자국이나 계란국도 끓여냈다. 연탄불 위에서 기름 바른 김을 바삭하게 구울 줄도 알았다. 당근과 양파를 곱게 다져 넣은 계란말이도 가지런하게 내어놓았다. 동생들 몫까지 학교에 챙겨갈 도시락도 쌌다. 집안 청소까지 도맡았다. 발 씻은 물로 걸레까지 빨았으니, 어설픈 새댁 못지않았다.

오빠의 꼼꼼한 성격은 공부에서도 빛을 발했다. 1987년 오빠는 대학교 2학년이 됐다. 장학금을 타기 위해 도서관 붙박이가 되어야 했다. 취직이 잘 된다고 해서 ROTC에도 합격해 놓았다. 학기 중이었지만 제복을 입고 학교에 갈 때도 있었다. 오빠는 늘 막차를 타고 집에 왔다. 그 해 6월 서울 하늘은 최루탄 가스로 뿌옇게 흐렸다. 오빠의 귀가 시간이 빨라진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셨다. 뉴스를 보며 중얼거리셨다. "저러다 죽어, 또 죽는다고." 누구보다도 아버지는 오빠의 이른 귀가를 반가워하셨다. 요즘 같은 시국에 친구 따라 강남 가면 인생 망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집안의 대들보. 미래의 대기업 사원. 연신 재채기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훈계에 오빠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눈이 맵다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루는 오빠가 테이프를 들고 집에 들어왔다. 카세트에 테이프를 넣고 크게 볼륨을 높였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노래였다. 오빠에게 무슨 노래냐고 물었다. "운동권 노래야." 오빠의 대답에 고개를 돌려 안방 쪽을 바라보았다. 인기 있는 유행가와 비슷한 음색이라서 부모님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빠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목청이 찢어져라 불러댔다.

벽 너머로 오빠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라디오 대신 오빠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노래가 슬퍼 꼭 오빠가 울고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밤들. 시간이 흐른 뒤에 알았다. 주구장창 불러대던 오빠의 노래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제복에 갇혀 있었던 오빠의 1987년을.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오빠의 청춘을. 같은 또래였지만 시위대에 동참하지 못했던 오빠의 죄책감을.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해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책
▲ 김숨 장편소설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를 복원해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책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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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L의 운동화>를 읽으면서, 1987년 온 마음을 담아 노래 한 소절을 곱씹었던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주름지고 머리카락이 세어버린 오빠의 젊은 날이 희미하게 먼 기억으로부터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 보면 그 어떤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때는, 그것이 죽어 갈 때가 아닐까. 희미해져 갈 때, 변질되어 갈 때, 파괴되어 갈 때, 소멸되어 갈 때." (33쪽)


책 속 L의 운동화란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이다.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 열사의 오른 발에 신겨져 있었던 운동화. 이 책은 김겸 박사(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의 이한열 운동화 복원 자료와 인터뷰 등을 기초로 해서 쓴 장편소설이다. 과장된 감정의 호소 없이 차분한 응시 속에서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그날 L은 소크(SOC)였다. 소크란 북유럽에서 암소와 송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튼실한 소떼가 뿔을 바깥쪽으로 두고 울타리처럼 둘러싸는 것을 말한다. 시위 현장에서 젊은 소떼 역할을 하는 남학생을 소크라고 불렀다. 주로 2학년 남학생이 맡았다.

1987년 6월 9일 L은 시위대 앞 쪽에 있었다. 5시 경 L은 교문 안쪽에서 전투 경찰이 발포한 직격 최루탄에 왼쪽 뒷머리를 맞았다. 원래 최루탄은 45도 이상의 각도로 쏘아야 발사된다. 최루탄 총신의 개조 작업이 없었다면 직격으로 발사될 수가 없다. 시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부상당한 L을 부축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L의 운동화는 그의 곁에 없었다.

L의 오른 짝 운동화를 들고 병원을 찾아온 여학생이 있었다. 집에 돌아가려면 신발이 필요할 것 같아서 병원까지 찾아와 L의 어머니에게 전해주고 갔다.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라고 하니까,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해요……. 우리 아들의 운동화인가 보다……. 나는 솔직히 저 운동화가 우리 아들이 신었던 운동화인지 잘 모르겠어요." (124쪽)


L의 운동화는 사이즈 270mm, 삼화 고무에서 나온 흰색 타이거 운동화였다. L의 운동화에는 특이한 매듭이 묶여져 있었다. 신발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단단하게 맨 L의 운동화 매듭. 그날 운동화 끈을 고쳐 묶으면서 감기 몸살로 아팠던 L은 시위가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대개 시위 현장의 마무리는 주인을 잃어버린 운동화를 찾아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날 L의 왼짝 운동화도 한 학생의 신고로 시위대 본부에 맡겨졌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찾아줄 수 없었던 왼짝 운동화. 그 운동화가 L의 운동화였다는 것은 훗날에야 알게 됐다.

L의 운동화는 신촌 부근 L의 기념관에서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전시됐다. 아크릴 진열장에서 햇빛에 그대로 노출됐던 L의 운동화는 "중환자실의 생사를 다투는 환자"나 다름없었다. 우레탄의 열화 현상으로 균열이 생겨 신발 밑창이 갈라졌다. 신발 밑창에서 떨어져나간 폴리에스터 우레탄 조각들을 이어 붙여 굳히는 경화 작업이 쉽지 않아보였다. 떨어져나간 100여 개의 조각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 나가야 하는 작업이었다.

기술적인 부분의 어려움을 차치하더라도 복원의 심리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게 남았다. 이 소설 속에는 많은 미술 작품들과 그에 대한 복원의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미술품 복원 전문가는 처음 작가의 의도를 헤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복원을 감행한다. 복원할 대상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추가할지를 결정한다. L의 운동화가 미술품은 아니지만,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시대적 유물임에는 틀림없다.

이 시대에 L의 운동화란 대체 무엇인가. L의 운동화는 "역사와 시민에 의해 선택"되었다. L의 운동화는 "L을 대신하는 피해자이자 증인"이다. L의 운동화는 "시대를 이어가면서 복원해야할 역사적인 유형물"이다. 소설 속 L의 기념관 채 관장이 복원 전문가에게 이런 말을 전한다.

"나는 역사를 기억의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억은 구체적인 매개물로 형성되고 유지되는데, L의 운동화 같은 물건이 그 매개물이 아닌가 싶어요." (135쪽)

L의 운동화 밑창이 부서지는 동안에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난항을 겪어 왔다. 광장에서 누군가는 죽었고, 철탑 위에서 누군가는 외로운 투쟁을 이어갔다. 하나의 밑창이 100여 개의 조각으로 흩어지는 동안에도, 외쳐야할 구호와 타올라야할 촛불들은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L의 운동화가 걸어가고 싶었던 세상을 향해 여전히 시대가 풀어야할 과제는 남아 있다.
무엇보다 소멸되어 가던 L의 운동화를 복원한 것은 우리 시대의 염원이었다. 주인을 잃어버리고 혼자 남은 L의 운동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복원시키려고 한 것일까. 3개월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온 L의 운동화란 어떤 의미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나는 L의 운동화에 셋째오빠의 1987년을 담아주고 싶었다. 바로미터가 되어 가난과 불운을 재단하고 반듯한 삶의 모양을 갖춰가기에 바빴던 오빠의 척박한 삶의 무늬를 그려놓고 싶었다. 시대의 과제에는 눈 돌릴 겨를이 없어 L의 운동화와 함께 발 맞춰 걸어가지 못했던 오빠의 미안함을 그 안에 넣어주고 싶었다. 밤마다 애타게 열창했던 오빠의 노래 한 소절도 들려주고 싶었다.

뿌옇게 흐려지는 탁한 대기와 열을 지어 다가서는 군홧발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 그리고 최루탄이 빗발치던 학교 정문을 서성거렸던 L의 초여름 날, 그 떨렸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전투 경찰을 향해 휘두를 날카로운 뿔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테지만, L은 맨몸으로 시위대 앞을 지켜야 했다. '민주주의'라는 온기가 세상에 고루게 비쳐질 그날을 위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고집 센 황소처럼 버티고 서 있었던 L의 운동화.

역사란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다. 내 기억의 카테고리에 L의 오른짝 운동화라는 이름의 파일을 첨부해 놓았다. 22살 한 청년이 황소고집을 피우며 지켜내려 했던 시대의 가치라는 내용으로 저장해 놓았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시작은 내 기억의 카테고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L의 운동화

김숨 지음, 민음사(2016)


태그:#이한열 열사 , #김숨 , #L의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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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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