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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 때 묘역 담장에 설치된 현수막의 일부
 5월 1일 신암선열공원 국립묘지 승격 기념 행사 때 묘역 담장에 설치된 현수막의 일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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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국립묘지로 승격된 대구 신암선열공원을 찾아 김세영, 이봉로, 백남신 세 분 독립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김세영 지사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 이봉로 지사는 같은 해의 파리장서 사건, 백남신 지사는 산남의진 때 활약했던 독립투사들이다. 이렇게 관련 사건이 두루 다른 분들의 유적을 답사하면 배울 것이 많다.

영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세영 지사

김세영 지사 묘소 앞 표지석
 김세영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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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지사는 1889년 5월 21일 경북 영덕에서 출생하여 1979년  3월 4일 타계했다. 지사는 1919년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궐기한 영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지품면 낙평동 교회 조사였던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서울 남대문 밖 박준거 장로가 경영하는 여관에 머물렀다. 당시 서울에는 독립 선언식 후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는데, 김세영 지사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그 무렵 평양신학교가 휴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 지사는 평양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이튿날 즉시 귀향했다. 그는 평소 친분이 두텁던 구세군 참위 권태원을 만나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이 채택된 사실과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한 뒤, 병곡면 송천동 교회 조사 정규하와 상의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사람 많은 장날에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

경북 영덕군 영해면 독립운동 기념탑
 경북 영덕군 영해면 독립운동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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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권태원·정규하를 중심으로 한 영덕인들은 3월 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들은 태극기를 만들고, 군내 토착 양반인 권·남·박·이·백 등 5성을 중심으로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 일대의 기독교도 및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는 등 사전 준비를 추진했다. 그러나 김세영 지사는 이튿날 일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검거되어 1주일 동안 감금되는 바람에 3월 18일의 독립만세운동에는 참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정규하·남효직·남여명 등이 이끈 3월 18일 만세운동은 3000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성내동 장터에서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불길은 이웃인 병곡면·창수면·영덕읍·지품면 등지로 일시에 번져나갔다. 김세영 지사는 영해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이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파리장서운동의 주도적 인물 이봉로 지사

김세영 지사의 묘소 동쪽은 이봉로(李鳳魯) 지사의 묘소이다. 이봉로 지사는 1902년 대구 달성에서 출생하여 1916년 서울 중동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 영어 학원을 수료했다. 1924년 중국 북경의 서성 공업 대학에 유학하였다.

1919년 한국 유림단 대표 137명은 조국의 광복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리 강화회의에 직접 제출하기 위해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했다. 이봉로 지사는 김창숙과 함께 파리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고, 이듬해부터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파리강화회의와 파리장서


파리 강화(평화) 회의가 1919년부터 1920년까지 1차 세계대전 승리국들이 모여 전쟁 책임 문제, 영토 조정, 평화 구축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이 회의는 1920년 1월 16일 국제연맹을 발족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1919년 곽종석, 송준필, 장석영, 김창숙 등 유림들은 성주 백세각에 모여 3.1 독립선언에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서한(파리장서)을 보내기로 결의한다. 이 날 전국에서 모인 내로라하는 선비 137명 중 60여 명이 경북 유림이었다.

김창숙이 서한을 품고 국경을 넘는다. 김창숙은 상해에 도착하여 신규식, 신채호 등과 논의한 끝에 영문과 한글로 번역한 수 천 통의 서한을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와 각국 외교기관에 우송한다. 국내 향교 등에도 보냈다. 이 일로 수많은 선비들이 투옥된다.

1924년에는 김창숙·김화식·송영호·손후익 등과 함께 총기와 탄약을 국내에 은밀히 반입하여 군자금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지사는 파리장서 사건 이후 경북 유림들이 독립군 군자금을 모으다가 일제에 체포된 소위 '경북 제2 유림단 사건'으로 북경에서 잡혀 대구로 호송되었다. 그 후 미결수로 2년간 고생하다가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지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40년 별세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파리장서 작성과 제출 문제를 놓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성주 백세각
 파리장서 작성과 제출 문제를 놓고 유림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성주 백세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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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로 지사의 형 이용로(李龍魯)도 독립지사이다. 동생 이봉로 지사보다 다섯 살 위인 이용로는 일본 유학 중 3·1 운동을 만났다. 1919년 동아 예비 학교(東亞豫備學校)에 재학 중이던 이용로는 경상남도 합천 출신의 장인환(張仁煥)과 함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용로 지사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7년 7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일본 도쿄 중앙대학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20년 재일 조선인 학생 기독교 청년회 사건으로 대구 형무소에 약 7개월 동안 구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학년을 채 못 마치고 대학을 중퇴했고, 고향인 달성군 하빈면 하산동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년도 못 다니고 대학 중퇴, 고향에서 농사

이용로는 1948년 9월 22일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공포되면서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구성되고, 1949년 2월 반민특위 경상북도 위원회가 발족하자 조사관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가 조사한 인물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의 장진홍을 탄압하여 유명해진 경상북도의 거물급 친일 경찰 최석현(崔錫鉉), 양산 농민조합 사건을 조사한 친일 경찰 장자관(張子寬), 독립운동가 유시태(柳時泰)를 일제 경찰에 밀고한 혐의의 이인희(李麟熙) 등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을 지지 세력으로 규합한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 해산 조치 탓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벌은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한국전쟁 전후에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 발생한 피학살 사건의 희생자들을 발굴하고 가해자 처벌,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보상을 위한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었다. 이용로 지사는 이 단체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 정권은 이 활동을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몰아  혁명재판에 회부했다. 지사는 징역 15년을 구형받았다가 뒷날 무죄로 석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백남신 지사 묘소 앞 표지석
 백남신 지사 묘소 앞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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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으로 활동한 백남신 지사

이봉로 지사의 묘소 동쪽은 1882년 10월 12일에 태어나 1964년 10월 12일 타계한 백남신(白南信) 지사의 묘소이다. 묘소 우측 전방에 세워져 있는 비석의 앞면에는 '山南義士水原白公南信之墓'라 새겨져 있다. '산남의사 수원백공 남신지묘'는 영천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의병 부대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일원이었던 백남신 공의 묘소라는 뜻이다. 산남의진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원용팔·정운경·박장호 등의 군대, 경상도의 김도현·유시연·신돌석 등의 군대와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 의병, 전라도의 최익현·백낙구·고광순 등의 군대, 양서 지역의 우동선·전덕원의 군대 등이 그 무렵 나라 전체의 대표적 의병 부대였다. 그 중 산남의진은 고종황제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받은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1906년 3월 경북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부대였다.

영천 조양공원 산남의진 기념비
 영천 조양공원 산남의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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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경주·포항 청하·청송 등지에서 활동한 산남의진은 신돌석(申乭石) 등 인근의 의병들과 연합 작전을 펼치기도 하고, 독자적으로 여러 차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포항 죽장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대장 정용기 이하 참모진이 다수 전사하였다. 그 후에도 산남의진은 정환직과 최세윤(崔世允)을 중심으로 1908년 7월까지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에 나오지 않는 백남신

그런데 국가보훈록 공훈록에 백남신 지사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서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니 그는 백영촌(白永村)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공훈록의 공적 내용 소개에 따르면 그는 1906년 4월에 산남의진 의병대장 정용기의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약하여 영덕 강구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는 정용기의 순국 이후  정환직 막하에서 영덕·흥해 등을 함락시킬 때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1911년 7월에 일제에 의해 소위 강도 살인 및 구타 등의 죄로 대구지법에서 7년형을 언도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참조



태그:#신암선열공원, #백남신, #백영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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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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