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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 콜트기타를 아시나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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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잘린 기타 인생들의 11년을 기억하는 11일간의 연대 프로젝트가 열린다. 그들이 길거리로 나앉은 지 3000일이 되던 때는 전국 유랑 투어를 다녔었다. 콜트-콜텍 기타 만들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박영호 사장은 노조가 있는 인천 콜트공장이 싫어 별도 법인으로 대전에 통기타만 생산하는 콜텍을 별도로 만들었다.

1999년 중국 공장까지 만들고는 모든 주문을 해외로 빼돌린 후 있지도 않은 '경영상의 위기'를 문서 상으로 만들었다. 2007년 4월에는 인천 콜트악기 노동자 56명을 정리해고하고, 7월에는 계룡시에 있는 콜텍 악기를 위장폐업하고 남아있던 67명 전원을 정리해고했다. 곧이어 두 공장 모두 위장폐업으로 전원 해고되기까지 대전 콜텍에는 노동조합조차 없었다.

얼마나 더 그들의 이야기를 해야 그들이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간 그들도 얼마 전 네 번째 단식을 하다 병원으로 실려간 쌍차 해고자 김득중처럼, 오늘로 149일째 서울 목동 서울에너지공사 70m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스타케미컬 노동자들처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다. 분신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국회가 건너다보이는 양화대교 송전탑에 올라가 고공 단식농성도 했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 본사에 항의하러 들어갔다가 1시간도 안 돼 경찰특공대에 모두 끌려 나오기도 했다. 위장폐업으로 문 닫힌 부평 공장을 점거도 해보고, 그 비탈진 옥상까지 올라갔다가 끌려 나오기도 했다. 단식도 여러 번 했고, 삼보일배, 오체투지, 삭발... 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봤다.

세계의 음악인들과 악기 판매상들에게 박영호 사장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미국·독일·일본 등 총 여섯 번의 해외원정 투쟁을 다녀오기도 했다. 만들 줄만 알지 칠 줄은 몰랐던 기타를 뒤늦게 배워 '콜밴'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돌아다니기도 한다. <기타이야기>, <꿈의 공장> 다큐영화도 2편이 나왔고, <구일만의 햄릿>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빈 공장을 갤러리로 꾸며 준 미술인들도 있었다. 홍대 앞 클럽 '빵'에서는 지난 7년여 동안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콜트·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주고 있다.

국제연대도 많았다. 2010년 1월 미국 애너하임에서 열린 세계적인 악기쇼 'NAMM Show(이하 남쇼)'에 갔을 땐, 세계적 록그룹 'RATM'의 탐 모렐로와 남쇼의 공식 초청홍보대사이자 방금 전 미식축구 프로리그 결승전에서 공연을 하고 온 피닉스 벤자민 등이 공식 지지 선언과 공연에 함께 해주기도 했다. 탐 모렐로는 "기타는 결코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국적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려 한다면 이에 대한 노동의 투쟁 역시 다국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한 'Worldwide Rebel Song'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영국의 기타 회사 아발론의 스티브 맥윌리스는 "우리는 박영호 사장을 신뢰하지 않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거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었다. 미국의 기타 회사 ESP의 맷 매시안다로 회장도 "우리는 더 이상 콜트와 관계가 없다, 박영호 사장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도 거래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라고 했다. 몇 년 전 주 거래사인 휀다사에서는 여론에 밀려 공식적인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일본 '후지락 페스티벌' 사무국에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공식 초청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박영호 사장은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일하다 잘려 길거리에서 11년을 지내고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오히려 용역 깡패들을 내세워 몇 번이고 테러와 같은 폭력을 자행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수세미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여러 해 된장·고추장을 만들어 팔며 근근이 11여 년을 버텨 와야 했다.

"2005년부터 자꾸만 회사는 적자라며 힘들다고 했어요. 이 말이 사실인 줄 알고 저희 노동자들은 정말 자재도 아끼고 시간 외 수당을 쳐주지 않아도 참고 일했어요. 나중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알아보니 매년 100억 대의 이익을 남기는 알짜기업이었어요." -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증언 중에서

출근 시간보다 1~2시간 빨리 나오게 해도, 일손이 달려 근처 집에 있는 아내를 불러들여 잔업, 철야를 하면서도 기타를 만들며 나오는 조금의 월급에 감사하면서 살았다. 자꾸 밖을 쳐다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이 하나도 없던 공장이었다. 밀폐된 도장실에서 유기용제에 노출되어 직업병을 앓는 사람이 전체의 59%가 넘어가도, '빼빠질'과 그라인더질, 기타줄을 당기고 피스를 박다가 대부분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려도, 기관지 천식 환자가 36%를 넘어가도, 만성기관지염 환자가 40%를 넘어가도 괜찮았다. 너무도 분해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11년을 살아왔다.

방종운형은 처음엔 가족들에게 조금 긴 수련회에 간다고 나왔다고 한다. 딸과 아들이 고등학교 다니고, 대학교 다닐 동안 등록금 한번 못 줘 본 아비의 심정을 아느냐고 한다. 아들도 딸도 비정규직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 분노 갚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 꼭 이겨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 아빠가 되고 싶다는 방종운 형, 그리고 삼익악기와 성음악기를 거쳐 30여 년 기타만 만들었다는 임재춘형과, 그렇게 그렇게 가죽 공장에서 14년, 기타 공장에서 7년, 그리고 거리에서 해고자로 11년 보냈더니 인생이 다 갔다는 김경봉형을 보며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 그렇게 네 명이서 지켜가는 초라한 농성장이 나를 눈물 나게 한다.

거리 공연을 준비하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 콜트·콜텍 노동자 거리 공연을 준비하는 콜트·콜텍 노동자들
ⓒ 송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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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텐트 벽면에 붙어 있는 그림은 해고자로 보내야 했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아픔이 드러나 있다.
▲ 일하고 싶다 농성장 텐트 벽면에 붙어 있는 그림은 해고자로 보내야 했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아픔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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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민사·형사·행정소송 포함하면 법률 공방만 수십 건이었다. 내용상으로는 질 수 없는 재판들이었지만, 보수적인 법원은 자본의 편에 더 자주 섰다. 2012년 2월 23일 대법원은 부당해고였다는 고법 판결을 뒤집고 다시 사건을 고법으로 파기 환송시키기도 했다. 박영호만 노동자들을 죽이는 건 아니었다. 파기 환송심에서는 재판부가 지정한 회계 법인에서도 경영상의 위기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지만, 고법과 이어 열린 대법 재상고심에서는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도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기가 막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 판례는 콜텍을 넘어 2200만 노동자들의 미래에 어두운 먹구름이었다.

콜트·콜텍 악기는 오늘도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와 중국 대련에 소재한 최첨단 생산공장으로부터 연간 100만 대에 육박하는 기타를 생산·수출하고'(콜트 악기 홈페이지 기업 소개란) 있다. 국내 공장만 운영하던 때도 이미 세계 기타의 1/3을 생산하는 알짜기업이었다. 주문자 생산방식으로 세계적인 기타 브랜드인 '아이바네즈, 깁슨, 휀다, 마틴, 아바론, 센트루이스' 등을 생산했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해 박영호 사장은 1999년 중국 공장까지 설립하고는 천천히 국내 생산 라인을 축소시켜 나갔다. 주문을 모두 해외로 빼돌리고, 국내 공장은 위장 위기 상황을 만들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당시 조남호가 했던 일과 똑같다. 현재도 인도네시아와 중국 공장에서 3천여 명의 노동자를 부리고 있다. 몇 년 전에도 한국지식경제부에서 선정하는 세계 일류 상품으로 콜트 기타가 선정되기도 했다. 주식상장도 하지 않은 1인 지배 회사인 콜트 악기의 박영호 사장은 1200억 원대의 '소문난 알부자'로 한국 부자 순위 120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경영상의 위기'가 있는가.

그들과 만나 함께 한 지도 벌써 10년째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하고 있을 때, 구로공단 뒷골목으로 그들이 찾아왔다. 해고 500일을 맞는데 문화제를 한 번만 했으면 좋겠다고 찾아 왔었다. 몇 달 전 '공장문학의 밤'을 하러 찾아갔던 대전 콜텍 공장의 어두운 작업장이 떠올라 거절할 수 없었다. 한번이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그들을 위해 함께 노래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동료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그들을 응원하는 대책위를 만들었다. 문화연대 벗들과 사진을 찍는 노순택, 노래하는 연영석, 명인, 그리고 <클럽 빵> 사장 김영등과 파견미술가 모임 등이 모여 첫 회의를 하던 때가 기억난다.

우리도 이렇게 긴 세월을 걸어와야 할지 몰랐다. 가끔씩 연대하는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당사자들은 오죽할까. 2016년 겨울엔 그런 콜트콜텍과 쌍차와 스타케미컬(파인텍)과 기륭전자와 며칠 전 또 농성장이 철거당했던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박근혜퇴진 광화문캠핑촌'을 꾸려 함께 생활하기도 했었다. 단 5개월이었는데도 난 녹초가 되어 집에서 한동안 나오기가 싫었다. 단 5개월도 그러한데, 그들은 캠핑촌이 해단하고는 바로 광화문 네거리 전광판에 올라 또 한 차례의 연대 고공농성을 해야 했고, 곧이어 지금 있는 세종로 공원으로 거리농성을 들어가야 했다. 

그런 그들의 모진 11년을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자고 소수의 사람들이 11일간의 연대 프로젝트를 꾸려 주었다. 오늘(9일)부터 19일(목)까지 정부종합청사 옆 농성장에서 열린다. 농성장도 예쁘게 꾸며주었다. 노순택, 전진경, 이윤엽, 신유아 등 파견미술팀들이 또 나서서 천막 미술관도 세워주었다. 들어가 보니 언젠가 그들과 함께 어깨 걸고 노래하던 나의 한 때도 찍혀 있다. 이런 시간들이 눈물겹다. 음악인들이 연대하는 문화제를 준비하고, 미술작가들이 진행하는 현장 드로잉데이도 잡혔다. 이번 주 토요일에는 늘 함께 해왔던 '곧미녀상단'의 벼룩시장도 열린다.

콜텍 노동자들의 11년을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기 위한 11일간의 연대 프로젝트를가 9일~19일까지 정부종합청사 옆 농성장에서 열린다.
▲ 콜트 콜텍 문화제 콜텍 노동자들의 11년을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기 위한 11일간의 연대 프로젝트를가 9일~19일까지 정부종합청사 옆 농성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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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답고 소중한 마음들. 나는 무엇을 보태야 할까. 올해엔 인도네시아 콜트 공장 원정투쟁도 준비한다. 박영호가 죽든, 우리가 죽든 끝을 보겠다고 한다. 그 피눈물들을 뭐라 해야 할까. 세상은 바뀌었다는데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아픔과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촛불항쟁 내내 차디찬 광화문 광장에서 매일 촛불탑에 불을 밝히고, 모두가 돌아가면 점등을 하던 이가 콜트콜텍 김경봉형이었다. 박근혜가 탄핵되지 않으면,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면 우리는 맨 먼저 구속이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자리를 지켰던 이들이다.

김경봉 형과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그랬고, 지금 저 까마득한 70m 굴뚝에 올라가 있는 스타케미컬(파인텍) 홍기탁과 박준호가 그랬고, 며칠 전 병원으로 실려 간 쌍차 김득중이 모두 그 광장 캠핑촌의 촌민들이었다. 세상이 바뀌고도 촛불 광장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내고 지켜낸 이들의 끊이지 않는 고난이 참 아프다. 이명박근혜가 없는 세상은, 그들의 특권과 무한한 권력과 폭력이 사라진 사회라면, 이들의 고난 역시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닐까. 또 다른 제2의 이명박근혜에 다름 아닌 박영호와 같은 이들이 사라지는 사회 아닐까. 왜 그것이 안 되는 걸까.

목 잘린 기타 인생들의 11년.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그들을 길거리에 내버려두어야 할까. 언제까지 박영호와 같은 악질 자본가를 용납하며 살아야 할까. 언제까지 이런 세상의 그릇된 구조 아래 이 많은 평범한 인간가족들이 신음해야 할까.

빨리 가서 기고 글이나 쓰라고 등 떠미는 사람들을 두고 돌아오는 길. 길가 이동식 화단의 봄꽃들이 그래도 너무 아프진 말라고. 이렇게 겨울을 뚫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지 않느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기운 내라고 한다. 내 글 하나가 무슨 힘이 될까마는 전력을 다해 피어나는 저 봄꽃들처럼, 여린 새싹들처럼 다시 최선을 다해 꿈을 꿔본다. 그들과 함께 언젠가는 어깨 걸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날을.


태그:#콜트 기타, #콜트-콜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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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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